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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晩沙相公 沈之源(심지원, 1593~1662)의 업적과 淸德碑

심재석(역사학 박사. 종보편집위원)

 

 

1. 경북 永川<沈之源 淸德碑>를 찾아가다
만사상공의 신도비에는 공께서 영천과 홍성의 군수로 나간 적이 있다고 하며, 이임 후 선정비가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은 <영천선생안>에도 보인다. 부랴부랴 비석의 현존 상황을 탐문해 보니, 영천의 것은 남아있고 홍성의 선정비는 사라진 것으로 파악하였다.
 

 

 

9월의 선선한 새벽바람을 등지고 인천에서 서울역을 거쳐 영천시내 조양공원으로 향하는 필자의 심사는 즐겁기 그지없다. 조양공원 내에 일군의 비석들이 줄 지어 서 있고, 그 중에 군수심공지원청덕비가 있었다. 백성들이 흠모하고 감사해서 세워준 청덕비를 찾아가는 행운이 나에게 오다니. 감격이다.
 

1) <심지원 청덕비>의 현존 상태
청덕비는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을 기리어 세운 비이다. 만사공께서 청렴하여 언제나 가세가 빈한했기에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민망함이 있었다. 이에 41(1633)에 어머니를 시골에서 편히 모시기 위하여 인조대왕에게 진정하여 영천군수가 된다

 


청덕비 전면

 

병자호란 이후 관직이 제한되다가 억울함이 풀리면서 영천군수가 되었다. 1년 간 애민 구휼에 온 힘을 다 하였고, 떠난 후 백성들이 청덕비를 세워, 지금도 영천시 조양공원 思賢臺에 보존되고 있다.

만사공 청덕비의 비석 머리 문양이 특이하다.

▲청덕비 머리 부분


만사상공은 청성백(덕부)과 인천 문씨 사이에서 태어난 인수부윤공()9대손으로 안효공()의 친형이다. 청성백(德符)-인수부윤공()-양혜공(石雋)으로 이어지는 명문가 후예이다. 


2) <청덕비 후면> 내용과 외증손 이명희 군수의 청덕비 재건립 

영천의 조양공원에는 목민관의 선정비 21좌를 모아둔 思賢臺가 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비문이 바로 만상공의 청덕비 후면 기록이다. 1년 간 영천군수로 재임한 만사공은 사헌부 中丞(=執義. 3)로 발령받아 조정에 들어갔다가 효종 때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후 영천 사림들의 공론에 따라 松谷書院에 배향됐다.


▲청덕비 후면
 

만사공 이임 후 세워졌던 청덕비는 82년이 흐른 후 외증손 이명희 영천군수가 1714년에 부임 한 이후 재건립되었다. 훗날 승지도 역임한 이명희(순흥부사, 청풍부사, 상주목사, 승지 역임) 영천군수는 심지원 청덕비가 낡고 이끼가 끼어 퇴락해 있는 상항을 보았다. 그리하여 후손으로서 그리고 후임 목민관으로서 송구함을 이기지 못하여 정성껏 비각을 짓고 비문을 다시 새겨 오래도록 전해지기를 소망하였다. (청덕비 후면의 원문 전체는 이 원고 하단의 부기참조). 그것이 우리가 지금 확인 할 수 있는 조양공원의 비이다.
 

3) 영천시 청태면 <송곡서원>에 배향되다
만사공은 숙종 때 송곡서원에 배향되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될 때까지 오랜 세월 지역유림과 백성들의 추숭을 받았다.


▲만사상공을 배향했던 <송곡서원>(영천시 청통면 애련리)

 

한 인물이 서원에 배향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 유림들 모두가 그의 인품을 공인하고 존경하는 공론이 형성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영천 출신이 아닌 만사공이, 1년 만 근무했던 그곳의 서원에 배향되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만사상공의 훌륭했던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다. 청덕비를 만난후 방문한 송곡서원의 가을은 쓸쓸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훼철한 이후 이 서원도 근래 재건립된 건물이다.
 

4) 사라진 홍성의 <홍주목사 심지원 去思碑>
만사공이 51(1643)에 홍주목사로 부임하여, 그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던 지 去思碑가 백성들에 의해 건립 되었다. 공은 목사 재임 당시에 청렴하고 강직하여(廉謹)하였으며, 한결같이 백성을 사랑하여 조정의 혜택이 민간에게 미치는 것을 방()으로 官門에 붙였다. 이로써 시골 사람들에게 선포하여 백성에게까지 그것을 알리는데 힘쓰니 벼슬의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갈 때 홍성의 백성과 선비들이 去思碑 善政碑를 세웠던 것이다. 언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으나 아쉽기 짝이 없다.
 

 

 

2. 명필 재상 심지원의 글과 필적을 찾아서
 

 

 

1) <정창연 신도비>를 썼다()
영천의 청덕비를 만난 후, 필자는 서울 동작구 사당5동의 동래정씨 임당공파 묘역을 찾아갔다. 만사공은 명필로 이름나 있었기 때문에 좌의정 정창연의 신도비문의 글씨를 쓴 것이다.

신도비의 주인공인 정창연의 손자가 영의정 정태화이다. 만사공이 영달하고 있을 때 동래 정 씨 가문의 영의정 정태화 역시 효종의 사돈으로서 정계를 이끌고 있었다. 만사공과 정태화는 각별한 인연이 있었고 각기 아들이 효종의 부마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좌의정 정창연의 신도비 글씨를 만사공이 썼다.


▲만사공이 글씨를 쓴 <수죽정공신도비각과 신도비>(동작구 사당 5동 ‘동래정씨묘역’) 만사공 친필 의 정창연신 도비 - 본문 일부분 만사공 친필 의 정창연신 도비 - ‘沈之 源 書’ 부분
 

이 신도비는 대표적인 17세기 비석으로 문장과 서체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서체는 바로 우의정 시절의 만사공 필적인 것이니 우리 심 문의 중요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정성들여 쓴 유려한 만사공의 필적을 만날 수 있다.

필자가 사당동의 정 씨 묘역을 방문하여 보니 이 신도비는, 비석 자체가 매끄럽지 못하여 탁본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글씨가 콩알만큼 작아서 도저히 작업이 어려워 사진만 찍고 내려왔다.

 

 

2) <권득기 묘갈명>을 지었다()
성남시 금곡동 쇳골마을에 만사공의 장인이신 권득기 공의 묘갈이 있다. 공의 초배위 안동 권 씨는 만사공이 19세에 결혼하여 41세 정월에 사별하였다. 자식이 없었다. 이후 파평 윤 씨와 혼인하여 익상, 익현, 익창, 익성 등 42녀를 출산했으며, 익현이 효종대왕의 사위인 부마가 되어 집안의 품격을 한층 높이게 되었다. 만사공은 효종대왕과 사돈 관계가 된 것이다.
 

 

 

권공이 돌아가시자, 만사공이 사위로서 비문을 쓰게 되었다. 공은 비문에서 지나간 일을 회상하니 눈물이 흐른다.”면서 士林(권득기 선생을) 의지하니 百世의 스승이라고 추앙해마지 않았다.
 

필자가 이 비석을 찾아간 날은 보슬비가 내려 급히 탁본을 마쳐야 했다. 도심의 산속에서 만사공의 엄호를 받으며 홀로 묘갈명의 후면을 탁본하였는데 전혀 힘든 줄 몰랐다.


▲만사공이 비문을 작성 한 <권득기묘갈명>(성 남시 분당구 금곡동 쇳 골마을)

 

3. 병자호란(1636)과 심지원
병자호란이 발생하였을 때 만사공은 왕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공의 병든 아우가 있어 함께 피난하려다 시기를 놓친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공은 노모를 충청도 楮島에 모셔놓고, 남한산성 근처에 이르렀으나 왕이 강화도로 갔다는 소식에 부득이 근왕병을 모집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왕을 호위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되어 수년 간 관직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門外黜送으로 충청도 저도와 영남의 풍기를 전전하다 홍주목사에 임명되었다(1643).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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