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6일 심수택 의병장 추모식이 고향인 전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에서 기관장, 사회단체장, 도의원, 군의원, 유족 일가 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대종회에서는 수영 편집위원, 재석 문학박사, 갑택 문화이사가 참석하여 분향하였다.
아직도 공의 손자인 만섭(남일 심수택 의병장 기념사업회 회장)씨가 고향에서 대대로 살며 공의 기념관을 관리하고 있었다.
선조님은 일제강점기 하에서 오직 조국을 위해 국권침탈에 맞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순국하셨다. 기념관에서 공의 기록을 보며 숭고하고 거룩한 애국정신에 감명을 받았고, 훌륭한 선조님이 계시다는 것에 숙연해진다.
남일 심수택(南一 沈守澤)의병장 본관은 청송(靑松) 지성주사공(知成州事公諱:繼年)파 22대손이며, 1871년 3월 30일 전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신기마을에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심의봉(沈宜奉)과 진주 강씨(姜氏) 사이의 三男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수택(守澤)이고 자는 덕홍(德弘)이며, 호는 남일(南一)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1907년 9월 기삼연(奇參衍)의병장이 주도하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
會盟所)에 참여하였고, 그 해 12월 5일 전남 각지의 향교에 통문을 돌리고 {격고문}을 붙여 함평군 신광면 원산리 덕동재에서 거의하였다.
처음에는 김율(金律)의 진의부장(部長)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3월 30일 김율 의병장이 피체되자 의진을 수습하고, 300~700여 명의 의진을 전남 중남부 지역에서 의병투쟁을 벌였다.
의병장 남일 순절비문(義兵將南一公殉節碑文)
여기 一生을 조국수호(祖國守護)의 제단(祭壇)에 바친 의병장 심공은 명(名)은 수택(守澤)이요, 호는 남일(南一)이요, 본관(本貫)이 청송(靑松)이요, 려말(麗末)의 절신둔재계년(節臣遁齋繼年)의 후예(後裔)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의봉(宜奉)의 삼남(三男)으로 辛未年 서기 1871년 2월 10일 (전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재질이 뛰어난 위에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을 배워 충효의 뜻을 깨달아 자기의 갈길을 정하고 병서와 역학을 읽어 무술의 묘법을 익힘으로써 내일의 국난(國難)에 대비 하더니, 을미년 1895년 일본인의 손에 국모가 살해된 뒤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공(公)은 (27세)의 청년으로서 비분한 뜻을 참지 못해서 10년이 지난 뒤 이른바 을사매국조약(乙巳賣國條約)이 체결되자 공은 산업(産業)을 폐하고 오직 왜적을 내쫓고 국권을 되찾기 위한 경륜(經綸)에만 몰두하더니, 다시 2년 뒤 丁未年에 고종황제의 폐위(廢位)와 함께 군대마저 해산되므로 공은 비로써 의병(義兵)을 일으켜 함평 신광 산중에서 훈련을 거듭하며 각도에 격문을 전하고 왜적을 따르는 탐리배 들에게 격문을 뿌리자 수월도안에 각처로부터 모여든 의병들이 무릇 700명을 넘었다. 1907년 37세 되던 해 3월 제1차 강진, 오치전투에서 왜적 수십급을 목 베고 그로부터 무릇 3년 동안에 전후 20회를 싸웠는데 장흥, 관암과 신풍, 남평, 장담원과 거성동, 능주, 노구도와 석정과 풍치, 영암, 사촌, 나주, 반치, 해남, 성내, 보성, 웅치, 천동 등에서 왜적의 수많은 군대와 마주 싸우며 어느 때는 기이한 계책으로써, 또 어느 때는 담략으로써 오직 전승 무패 한 의병장이요. 엄격한 규율 중에서도 언제나 부하와 함께 감고를 같이 했으며, 민중을 사랑하고 어루만지므로 누구나 공을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건마는 때는 이미 다 되어 스러지는 나라를 떠받들 길이 없고, 의병해산의 조서까지 내려 사기마저 꺽이므로 공은 양천호곡하기를 마지못했다.
그러나 乙巳年 1909년 10월에 능주 풍치에서 적에게 잡혀 광주감옥에 갇히되 왜장을 꾸짖는 늠름한 자세는 자못 태산에 비길 만했고, 그 해 12월 대구로 이송되어 왜의 법정에서 대의를 들어 웅변하고 온갖 고난에도 굽히지 않는 기백은 열일에 견줄 만 했으며, 마침내 庚戌年 1910년 10월 4일 교수대에서 향년 39세로 태연자약하게 순국하신 것은 완전한 시사여귀(視死如歸)의 모습이라.
우리는 오늘여기 공(公)의 뜻과 행적을 돌에 새겨 길이 전(傳)하고 자주독립노선(自主獨立路線)으로써 우리 민족(民族)의 갈 길을 삼으려 한다.
서기1972년1월
의병장 남일 심공 순절비건립위원 (義兵將 南一 沈公 殉節碑建立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