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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공 영의정 심순택 묘소 답사

심대평 대종회장,
   평택 진위면 소재 청령공 영의정 심순택 묘소 봉심(奉審)

 

- 필자 : 심재석(종보편집위원)

심순택 초상화

 

    

 

1. 회장 일행의 진위(振威) 방문 : 지난 12월 19일(목), 대평 대종회장과 언태 총무이사, 갑택 문화 이사, 운영위원장 상억, 종보편집위원 재석 그리고 사복시정공 회장 익섭, 총무 규섭 등이 청령공 심순택 선조의 묘소를 방문하여, 참배하고 현황을 살폈다.

2. 영의정 묘소의 현재 상황 – 묘소가 위치한 山이 경매가 진행 중이고, 묘소가 방치되고 있다.

관리를 하지 않아 방치되어 있는 묘소 / 답사 일행 참배

1) 자손들의 분쟁으로, 50년 간 고택을 지키던 고손자 며느리(양영숙, 83세)은 동네 허름한 집 문간방을 빌려 거주하고 있다.

2) 고손자 며느리가 50년 간 살았던 고택이 넘어가고, 그 자리엔 타성의 집이 차지하고 있다.

심순택 고가

 

 

 

 

      

 3. 시급한 문제들

직계 후손과 연락해서 벌초와 사초 등 묘소를 관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항구적인 보존과 관리를 위해서는 묘소 일대를 문화재로 지정하려는 노력이 요청된다. 적어도 시급히 향토유적으로 등재해야 한다.

4. 심순택은?

1824년에 태어난 청령공의 간략한 계보는 ‘온(안효공)→연원→인겸→광세→택현→풍지→순택→상진’으로 이어진다. 조선 최초의 ‘공작(公爵)’ 칭호를 수여받은 청령공은, 27세에 급제하여 충청도 관찰사(51세), 이조판서(57세), 영의정(62세)을 역임하였다. 청령공은 딸만 셋, 양자 상진은 생부가 청령공의 동생인 이택이다.

5. 청령공이 진위면 봉남리에 정착한 계기

손자가 일찍 세상을 뜨고, 그 위패를 현 묘소에서 가까운 ‘만기사’에 봉안하고 위령제를 지낸 것이 계기가 되어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진위를 비롯해 충청도 일대에 토지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6. 심순택 행적

∙ 홍문관, 예조, 이조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영의정까지 올랐던 것은 당대 인정받는 학자였으며 국왕의 신임이 컸다. ∙ 격동의 시기에 그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적인 입장에 있었다.

∙ 갑신정변 때는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급진 개화파의 개혁에 반대해 청군의 출병을 요청했다.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영의정으로서 농민군을 막는데 노력했지만 한계를 느끼자 청나라에 원군 파병을 요청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 을미사변(1895)과 아관파천(1896) 후에도 의정부 의정(議政)으로서 대한제국 성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 근왕주의(勤王主義)적 성격이 강해 근대적인 개혁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윤용선, 조병식 등과 함께 독립협회로부터 규탄 받아 관직에서 해임됐으나 곧 복직돼 을사조약(1905) 때까지 관직생활을 했다.

∙ 고종의 두터운 신임과 왕실에 대한 충성으로 1906년 청녕공(靑寧公)에 봉해졌다.

∙ 을사조약 후 조병세 등이 자결하자 심순택도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자 했으나, 왕의 만류로 시행하지 못하고(신도비 : 경은 죽지 마시오, 죽지 마시오<卿勿死勿死>) 집으로 돌아와 1906년 83세로 서거했다.

신도비

7. 관심 있는 종인들의 묘소 참배와 송덕비 방문을 권한다

1) 묘소 위치 : 진위면 봉남리 동부마을. ‘진위면 사무소’ 뒤 우측 산정

2) 송덕비 위치 : 평택시 진위면 진위로 49 ‘진위향교’ 앞 비각 내

<비문 내용> : 정경부인 능성 구 씨는 영의정 심순택의 부인이다. 부군이 타계하여 그의 묘를 진위군 봉남리의 북쪽에 쓰고 갑인년(1914) 봄에 묘소 아래 精舍를 짓고 살기 시작하였다. 그 부인의 인자하고 후덕하며 자애롭고 선한 마음을 그 누가 우러르고 찬양치 않으리오. 친척이나 이웃 중에 가난하여 음식을 못 먹는 자와 의탁할 곳이 없고 집이 없는 자 그리고 소득이 없는 자는 모두 그 부지런함을 막론하고 간절하게 두루두루 시혜를 베풀었다. 학교(黌舍)를 세워 교사를 초빙하고 돈을 내어 다리를 놓으며 도로를 보수하였다. 그리고 자기 소유 토지의 소작인 조합을 만들어 그들의 근면하고 게으름을 평가하여 시상하였다. 매년 봄에는 무이자로 곡식을 빌려주어 이웃들이 먹고 사는데 도움을 주었다. 음력 12월에는 극빈자를 택하여 쌀과 반찬을 나누어 주었으니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들을 어찌 입 다물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만구동성으로 이 사실을 돌에 새겨 ○○○○ 대감마님(閨閤)께서 가난한 집(蔀屋)에 곡식을 무이자로 대여하고, 곤란한 사람을 건져주고 위태로운 사람을 붙들어 주었으니(濟困扶危),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바로 세우신 活佛이요, 만인(萬戶)의 길한 별(福德星)이시다. 이에 지역 주민들이 ○○○○○ 기념하여 돌에 새기어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는 바이다.

3) 청녕공 사후 정경부인 능성 구씨가 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지다!

(1) 금릉학원 설립 : 왕조의 몰락을 지켜보는 공의 심정은 어떠

했으랴. 청령공이 별세하자 정경부인 능성구씨는 평택시 진위

면 봉남리에 공의 묘소를 마련하고, 精舍를 지어 본격적으로

거주하였다. 정경부인은 청령공이 남긴 유산으로 구씨학원을

세우고 이것이 금릉(金陵)학원으로 변했으며, 이후 진위국민학교로

편입되었다. 이후 학원 터에 고등공민학교가 만들어져 운영되다가 진

위중고등학교로 합해 진 듯하다.

(2) 빈민구제와 무이자 곡식 대여, 연말에 쌀과 반찬 공급 : 정경부인은 청령공의 유산을 이웃을 위해 썼다. 먼저 가난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는 자와 의탁할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두루 시혜를 베풀었으며, 다리를 놓고 도로를 보수하였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조합을 만들어 근면을 권장하고 춘궁기에 무이자로 곡식을 빌려주었다. 연말에는 쌀과 반찬을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8. 심순택 신도비(총 높이는 289cm, 비신의 높이 178cm, 폭 66cm)

∙ 서거 2년 뒤인 1908년(융희 2) 그의 무덤 동남쪽에 신도비를 세웠다.

∙ 비석의 글은 규장각 대제학 김학진이 짓고,

글씨는 당대의 서도가 민병석이 썼으며,

두전(頭篆)은 의정부 참정 김성근이 썼으며, 필체가 힘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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