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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가 낳은 의병장 沈友信【Ⅰ】

김포가 낳은 의병장 沈友信【Ⅰ】

                                              京畿鄕土史學에서

 

1. 머리글

심우신(沈友信)은 김포 태생이다. 임진왜란 당시 마지막까지 지킨 의병장으로 장렬히 순절한 충의의 표상이다. 그러나 장사의 기록은 물론 역사의 뒤안길에서 조차 한 걸음 비켜 서 있다.

그러한 푸대접에 대하여 뜻 있는 선비들과 지방관까지 줄을 잇는 상소를 했고, 1652년(효종3년壬辰) 8월, 진사 이장운(李章運) 등 수백 명이 효종에게 상소하여 효종대왕의 윤허가 있었음에도 제대로 포장(襃獎)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장수들은 모두 진주의 창열사(彰烈祠)에 배향(配享) 되었으나 유독 심우신만 배제되었다. 또 선무공신 (宣武功臣) 등록에서 빠져 선무원종공신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그쳤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필자는 이단하(李端夏)(1)가 쓴 심우신의 행장(行裝)을 근거로 하여 인간 심우신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우리 역사인물을 재조명 할 때 출생지나 생존 시에 특별한 연고가 있거나 유택이 있으면 이를 토대로 그 고장의 역사인물로 인정하고 조사 연구하여 밝힌다.

우리고장 김포의 대표적인 역사 인물인 중봉 조헌선생의 예를 보아도 구두물(현 김포시 감정동)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나 관직을 떠나서는 옥천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였고 장기전에 필요한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호남지역에 침입하는 왜적을 금산에서 맞아 700의병과 함께 중과 부족으로 대항하다 결국 순국했다.

후학을 양성하고 의병을 일으켰고 유택이 있는 옥천과, 왜적을 맞아 마지막 한사람까지 처절한 전투를 벌였던 금산에서는 이 같은 중봉 제향과 선생의 우국충절을 기리는 제향과 추모행사, 그리고 학술회의 등이 매년 거국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또 선생의 출생지인 김포에서도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선생의 옛 집터에 우저서원(牛渚書院)을 세워 그 충의를 이어왔다.

천행이도 우저서원을 중심으로 그 명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지금 중봉선생을 현창하는 여러 가지 사업이 가능했다.

이러한 중봉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김포가 낳은 또 한분의 의병장인 심우신을 재조명하기 위함이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에서 마지막까지 진주성을 사수한 심우신 장군을 김포지역에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아마도 청송심씨 문중 이외에는 없을 것 같다. 필자도 지난해 9월18일 (음력 8월 21일 생신) 전남 장성군 삼서면 유평리 373번지 부귀마을에 있는 표의사(彪義祀)에서 봉행한 제향에 참사하고 심우신이라는 인물을 처음 알게 되었다.

역사 기록에는 통진 출신으로 기록이 있으나 김포에서 간행된 김포 군지나 김포 시사, 김포 인물지 등 어디에도 전혀 수록된 적이 없다.

필자도 조사기간이 충분하지 않아 역사적 환경을 좁은 의미로 축소하여 심우신 위주로 글을 썼다. 그 점 양해를 구한다.

 

2. 출생

심우신의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자(字)는 공택(公擇)이다.

가승(家乘)에는 가정(嘉靖) 갑진(甲辰)생으로만 기록되어 있으나 1544년(중종 39년 甲辰) 음력 8월 21일, 청송 심씨 입향조 세거지인 통진 학당굴(2)에서 곡산군수를 지낸 심수(沈鐩)와 어머니 죽산(竹山) 박씨(朴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3. 가계와 입향조

청송심씨의 시조는 고려에 문림랑 위위시승(文林郞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이고, 5세조 심온(沈溫)은 조선왕조 제4대왕 세종의 국구(國舅)로 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을 지냈다.

심온의 증손인 8세손 심순문(沈順門)은 통정대부의정부사인(通政大夫議政府舍人) 증 순충보조공신영의정청평부원군(贈 純忠補祚功臣領議政靑平府院君)으로 1504년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화를 입고 김포시 통진읍 옹정리에 안장된 후 그 후손들이 입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심순문의 장자로 9세손인 심연원(沈連源)은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충혜(忠惠) 이다. 심연원의 장자인 10세손 심강(沈鋼)은 명종의 국구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청능부원군(靑陵府院君)으로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익효(翼孝) 이다. 이와 같이 청송심씨 일가는 3대에 걸쳐 영의정을 배출하는 가문이 되었고 심강의 8형제는 모두 관직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그 후손들이 김포시 통진읍 옹정리, 마송리, 김포시 장기동, 풍무동 등지에서 정주하고 있다.

심순문의 차남인 심달원(沈達源)은 금천현감을 지내고 호조참의를 증직 받은 심형(沈泂)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지냈으며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재임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조광조(趙光祖)등과 함께 파직되어 옥고를 치른 후 통진의 선영하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사후에 이조판서를 증직 받았다.

심달원의 셋째아들인 심전(沈銓)은 경기감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되였으며, 심전의 아들인 11세손 심우선(沈友善)의 후손들은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에 세거하고 있다.

한편 심달원의 넷째 아들인 심수(沈鐩)는 곡산군수(谷山郡守)를 지냈고 호조판서(戶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증직 받았다.

11세손인 심수의 첫째아들 심우성(沈友聖), 선무원종공신인 셋째아들 심우신(沈友信), 다섯째아들 심우인(沈友仁)의 후손들은 주로 대곶면 약암리, 대능리, 양촌읍 유현리, 학운리 등지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현재 김포시 대곶면 대능리 8번지 일원의 비석능산 자락에 학당굴이 있으며 이곳에 심우신가(家)의 세장지가 있다. 새로 제정된 도로명주소로는

대곶남로 57번길 67-9(대능 3리 17번지)에 있는 “한국지방자치아카데미” 건물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에는 14세손인 심재용(沈載龍)씨가 거주하고 있다. 이곳 묘지에는 주검을 수습하지 못한 심우신을 제외하고 심우신의 아버지 심수로부터 첫째아들 우성, 둘째 아들 우현(友賢)은 물론 심우신의 첫째아들 심허, 통훈대부 행사헌부지평겸춘추관기주관(通訓大夫行司憲府持平兼春秋館記主官)을 지낸 심우신의 장손자 심세탁(沈世鐸)의 둘째 아들로 통정대부 보은구수(通政大夫報恩郡守)를 역임한 증손자인 심사침(沈思伔)에 이르기 까지 심우신가의 세장지는 세세연년 누대를 거쳐 오면서 심우신의 기개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정작 학당굴(골)의 주인공인 심우신의 주검은 고향인 통진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생전에 본인이 바라지 않던 상례에 따라 전남 장성에 혼백만 묻혀있다.

                                                                                                                                                         -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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