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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천재화가 현재(玄齋)심사정(沈師正)

Ⅰ. 겸재(謙齋)에게 그림을 배우다

 

심사정(1707~1769) '선유도' 종이에 담채, 27.3×4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유도'는 심사정이 평생의 화업(畵業) 속에서 이룬 부드러운 먹선의 격조 있는 묘사와 은은한 담채의 무르익은 솜씨를 잘 보여주는 아름답고도 쓸쓸한 그림이다. "갑신신추 사(甲申新秋寫) 현재(玄齋)"로 날짜와 호를 쓰고 앞쪽에는 연주인(聯珠印) '현재'를 찍었고, 말미에는 '심씨(沈氏)', '이숙(頤叔)'으로 성씨와 자를 새긴 인장을 찍었다. 부친 손세기(1903-1983) 선생을 이어 이 그림을 소장했던 손창근(1929년 생) 선생이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명품들 중 한 점이다.

현재 심사정이 돌아간 다음해인 영조 46년(1770) 경인년에 심익운(沈翼雲1734-1783)은 [현재거사묘지(玄齋居士墓志)]를 짓는다.

심익운은 현재의 친형으로 청평위(淸平尉) 심익현(沈益顯1641-1683)의

장자인 당숙 심정보(沈廷輔1658-1727)의 양자가 된 심사순(沈師淳 1701-1727)의 손자이다.

비록 양손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형수인 심사순의 처 전주이씨(1701-1777)가 손수 받아서 키워 냈으므로, 현재의 행장을 가장 정확하고 소상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묘지에서 현재가 어렸을 적에 겸재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그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묘지 전문을 옮겨 보겠다.

현재 거사를 이미 장사지내고 다음해인 경인(1770)년에 익운이 돌에 새겨 묘지로 한다. 그 묘문(墓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심씨는 청송을 본적으로 대대로 공훈과 덕망이 드러났었는데, 우리 만사 심지원(晩沙 沈之源1593-1662) 부군에 이르러 드디어 크게 번창하고 현달했다.

거사는 그 증손이다. 거사는 태어나서 두 살이 되자 문득 물건을 형상 지을 줄을 스스로 터득하여 모나고 둥근 형상을 그려냈다.

어린 시절 정원백(鄭元伯 ,謙齋 鄭敾,1676-1759)을 스승으로 삼아 수묵 산수를 했었는데, 옛사람의 화결(畵訣)을 궁구해보고 나서는 눈이 닿는 데로 마음이 이해하여 비로소 그 하는 바를 일변하니 아득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해서 힘써 그 고루 힘을 씻어냈다.

대체 중세(重歲중년) 이래에 이르러서는 녹여서 자연스럽게 이루어 내니 그 교묘함을 기대하지 않은바가 없었다. 일찍이 관음대사(觀音大師) 및 관성제군(關聖帝君)상(像)을 그렸는데 모두 꿈결에서 얻어냈었다.

영경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온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연경시중에 거사의 그림을 파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오직 그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50년간을 괴로우나 즐거우나 붓을 잡고 형체를 그리고 채색을 입히지 않은 날이 없었다. 거의 궁천(窮賤)이 고통스럽게 될 수 있다거나 오욕(汚辱)이 고통스럽게 될 수 있음을 살피지 않았으니 그런 까닭으로 신명(神明)에 깊숙이 통하여 멀리 다른 습속(나라)에 까지 전파되고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사모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림에 있어서 거사는 종신토록 힘을 써서 능히 대성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거사가 이미 돌아감에 가난으로 염습할 수 없어 익운이 여러 부의를 모아 그 장례용구를 도우니 아무 달 아무 날에 그 아들 욱진(郁鎭)1736-1804)이 파주 분수원 아무자리 언덕에 장사 지냈다.

명(銘)으로 이어서 말한다. 거사의 이름은 사정(師正)이고 이숙은 자다.

아버지이름은 정주(廷冑)고 어머니는 하동 정씨다. 부인은 있으나 기른 자식 없어 종형의 아들을 아들로 삼았다. 수명은 63세로 죽어 여기 장사지냈다. 아! 뒷사람아, 그 훼손치 말라. 」

 

그러나 현재가 겸재에게 배웠다는 사실은 이미 현재 26세 때인 영조8년(1732) 임자년 4월 초승에서 선주 남태응(南泰應1687-1740)이 청죽만록[聽竹漫錄]을 지으면서 화사(畵史)편의 화사보록(畵史補錄) 상(上)에서 확실하게 밝혀놓고 있다. 이어지는 문장전체를 옮겨 보겠다.

 

「 육오당(六吾堂,1620-1678)은 네 아들이 있는데 두 아들은 포도를 잘했다고 한다. 한 아들은 인물을 잘했으며 한 아들은 14세에 요절 했으나 타고 난 재주가 더욱 높았으나 싹 나고 피지 못한 사람이다.

오당의 누이 동생인 니산(尼山) 현감 권육의 안사람도 화풍이 빼어나서 아이 때 장난으로 한 고목을 그렸더니 자못 똑같이 느껴져 새들이 진짜인줄 잘못 알고 때로 간혹 날아들었다. 」

 

손자인 권경(權儆)도 바야흐로 포도로 세상에 이름이 나있다.

정유점(鄭維漸,1655-1703)은 그 화업을 사위에게 전 하니 곧 심정주(沈廷周 1678-1750, 周는 冑의 잘못)라는 이로 권 경과 아울러 일컫는다.

심정주의 아들 또한 산수 인물을 전공해서 새로 유명하나 대개 정선(鄭敾 1676-1759)에게 배워 그 거친 필적을 얻으니 대체로 족히 볼만함이 없다. 한집안 남녀에서 외손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림을 잘했으니 예전에도 또한 듣지 못했을 만큼 이채롭다.

그러나 정밀하고도 교묘하여 이름이 드날린 이는 없다. 유점이 남에게 말하기를 “내 아우의 인물화가 아버지보다 낫다.” 했다는데 대개 육오당이 인물화를 잘하지 못한 까닭이다. 세상에서는 망발이라 일컫는다.

남태응이 일부러 겸재를 무시하고 깎아 내리기 위해 그에게서 배운 현재도 보잘것없다. 남태응은 당시46세의 장년이었는데 57세의 겸재와 26세의 현재를 이토록 싸잡아 폄하하고 있으니 그림에 대한 취향 이라기보다는 어떤 사적인 감정의 표출이 아니었던 가 한다.

당대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우리 회화사상 진경산수화와 조선남종화의 시조로 각각 영혼이 추앙받는 위대한 두 화가를 안중에 두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고의가 아니라면 남태응이 화사를 쓸 만큼 감식안을 갖추지 못했다는 애기다. 그런데 화사에서 당대 화가로 조선전기 화풍과 진경풍속 및 조선남중화풍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 공재(恭齋)윤두서(尹斗緖,1668-1715)를 최고의 화가로 꼽고 그를 추종하는 것으로 지면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이토록 편향된 회화사관이 어디로부터 말미암은 것인지 볼일이다.

더구나 남태응은 겸재 선대의 외가 후손으로 겸재가 그의 12촌 척대부(戚大夫,친척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먼 친척이기도 했다. 남태응의 7대조인 예조참판 남응운(南應雲1509-1587), 이겸재의 고조부정연(鄭演1541-1621)의 장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태응이 이처럼 겸재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당색에 따른 이념갈등 때문인 듯하다.

                                                                                                                                                    -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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