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훗날 손주들이 청송을 기억해 준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10명의 가족과 청송으로 가는 심대섭 씨 / 얼마 전 가족 11명이 모두 지리산 온천으로 놀러가서 찍은 사진 |
만약 어느 가장이 당사자들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고 아내와 두 아들 부부, 그리고 손자 5명을 전부 데리고 1박 2일동안 심씨 문중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면 그 호기는 지켜질 것인가, 아니면 깨질 것인가. 부권(夫權)과 부권(父權)이 땅에 떨어졌다는 요즘, 그 약속은 허언(虛言)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그 약속을 떡 하니 지키는 가장이 있다. 폼이 난다. 전북 익산에 사는 심대섭(沈大燮·72) 씨다.
대섭 씨는 대평 대종회장 일행이 10월 5일 청송에서 열리는 ‘청송심씨 한마음대회’를 홍보하기 위해 5월 말경 대전에 왔을 때 즉석에서 식솔 10명을 모두 이끌고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
취재를 하며 느낀 것인데 대섭 씨는 그런 약속을 해놓고도 전혀 걱정을 안 한 것 같다.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 부자(父子)는 다른 집안과는 달리 대화를 자주 하는 편이다. 우리가 하도 재미있게 얘기하는 것을 보고 맥주집 주인이 서비스를 준 적도 있다.”
그뿐 아니다. 대섭 씨는 익산시 석암동에 선산을 갖고 있는데 사진을 보니 금잔디가 기름이 잘잘 흐를 정도로 관리가 일품이다. 두 아들 덕분이다. 큰아들 재범(44)은 익산과 신동탄에서 철강사업체(이름이 ‘청송철강’이다)을 운영하고 있고, 작은 아들 재훈(42)은 공학박사로 서울의 K화학에서 연구원 30명을 거느린 간부로 일하고 있다.
두 아들은 핏줄이니까 그렇다고 치고 며느리는? 대섭 씨가 슬그머니 이런 말을 했다. “두 며느리에게 차도 사주고 대학원비도 대준 적이 있다”고. 오호, 역시….
그렇다면 손주 5명과도 뭔가가 있을 듯하다. 이 대목에선 사모님(이명자·71)이 나섰다.
“애들이 그래도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려고 하는 편이다. 오면 근처의 지리산과 키즈카페 등으로 데리고 가서 재미있게 놀도록 해 준다.” 대섭 씨도 거들었다. “애들이 오면 나이에 맞춰 꼭 용돈을 준다”고도 했다.
그럼, 사모님은? 기자는 대섭 씨에게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연금을 집사람과 완전히 반으로 나눠서 쓰고 있다.”
돈 얘기가 많이 나왔지만 돈이면 다 된다는 뜻이 아니다. 대섭 씨가 가장으로서의 권위에 매몰되지 않고 변화하는 세상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낭창거리지만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처럼.
대섭 씨의 연배가 모두 그렇듯 그도 평탄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진안군 정천국민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6·25전쟁 와중에 고향 석암리로 돌아오다 빨치산에게 끌려가 행방불명됐다. 그때 어머니는 28살이었고, 4살짜리 대섭 씨와 2살짜리 남동생을 두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당연히 생활은 곤궁했다.
대섭 씨는 1974년 철도청에 취업해 수색역에서 근무하다 편찮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1980년 익산역 근무를 자원했다. 2000년부터 순천역에서 근무하다 2004년 정년퇴직했다. 아내와 2인3각으로 35년간 모시던 홀어머니는 2015년 92세로 타계했다.
대섭 씨가 종중 일에 관여한 것은 5년 전부터. “법사랑, 익산문화원 등 지역사회에서 이런저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이제는 문중을 위해서도 일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전북종회 부회장, 대종회 이사, 안효공종회 이사 등으로 일하고 있다.
가족들과 청송에 가는 것이 대섭 씨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손자들이 우리 선조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들이 자기들에게 어떻게 살아가길 원하는지를, 아니 청송에 온 것만이라도 기억해 준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큰아들 재범 씨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청송에 가자고 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언젠가 뿌리 교육 삼아 아이들을 데리고 꼭 한번 가려고 했다. 마침 좋은 이벤트가 있다고 하니 기꺼이 함께 가기로 했다.”
부전자전이다. 며느리와 손주 이름도 기록으로 남겨두자. 큰 며느리 이경은, 딸 아영(중3), 민지(초3), 작은 며느리 오재연, 딸 설아(초4), 아정(초1), 아들 현보(6).
아 참, 또 하나 밝혀둘 것이 있다. 대섭 대부를 취재하러 가자 근처에 사는 종친 어른 12명이 응원을 나오셨다. 기자 생활을 오래했지만 이런 호사를 누려본 적이 없다. 사진으로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