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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우리 청송심가 이야기(8)

얘야, 너는 아버지를 죽게 한 원수를 보게 되면 어떠한 말을 할 것 같니?

 

우리 청송심문(靑松沈門)이 배출한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는 역대 많은 왕후 중에서 가장 어진 왕후로 이름 나 있어. 소헌왕후는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임금이라고 칭송받고 있는 세종대왕의 부인이야. 세종대왕이 훌륭한 일을 많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준 분이 바로 소헌왕후였어.

소헌왕후의 할아버지는 청성백 덕부(德符)이시고,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내신 온(溫)이셔. 소헌왕후는 세종대왕이 임금이 되기 전 충녕대군으로 있을 때에 그의 배필이 되었는데, 그 뒤 충녕대군이 조선 제4대 임금 자리에 오르게 되자 마침내 왕후가 되었어. 소헌왕후가 충녕대군의 비(妃)가 된 데에는 숙모였던 경선공주(慶善公主)의 역할이 컸다고 해.

경선공주는 태조 이성계의 딸로서 태종 이방원의 누나였어. 경선공주는 덕부 할아버지의 여섯째 아드님이신 청원군 종(靑原君 淙)에게로 시집오셨던 거야. 종(淙)은 온(溫)의 동생이었으니 소헌왕후로 보면 경선공주는 숙모가 되는 것이지.

경선공주가 질녀인 소헌왕후를 겪어 보니 매우 지혜롭고 또 따뜻하여 당시 왕자로 있던 친정 조카 충녕대군의 배필감으로 추천하였다고 해.

소헌왕후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어. 역사(歷史)의 기록도 있고 민가에서 전해지고 있는 야사(野史)도 많아. 그만큼 훌륭했기 때문이지.

소헌왕후가 처녀로 있을 때의 일이래. 집안 식솔들과 함께 밭에 뽕을 따러 갔는데 마침 이웃 고을 원님이 이 밭 옆을 지나게 되었대. 원님의 행차라 일꾼들이 모두 나와 밭둑에 엎드렸는데 밭 안쪽에 있는 소헌왕후는 그대로 뽕을 따고 있었대. 모두 숨죽이고 있으려니 밭 안쪽에서 뽕을 따는 소리가 또옥 똑 하고 들려왔어.

그러자 원님 호위대장이 밭 안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어.

“거기 누구인가? 원님이 지나가시는데 나오지 않는 자가! 이리 썩 나오지 못할까?”

그래서 소헌왕후는 밖으로 나오게 되었어. 그러나 소한왕후는 조금도 꿀림이 없이 당당하게 말했어.

“원님은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주기 위해 행차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지금 누에가 빨리 뽕을 먹지 않으면 굶어죽게 됩니다. 백성들이 추위를 막기 위해서는 누에를 잘 키워야 합니다. 원님이 지나가시는 것도 모르고 뽕을 딴 것이 그렇게도 야단을 맞을 일입니까?”

이에 원님은 고개를 끄덕였어.

“과연 옳은 말이로다.”

그리하여 나중에 이 원님이 나라에 왕자비로 추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어. 그만큼 소헌왕후는 어릴 때부터 판단력이 빠르고 담대했다고 해.

소헌왕후가 왕자비로 추천되어 궁궐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라고 해. 여러 대신의 집에서 추천되어 온 처녀들과 함께 면접을 보게 되었어. 방에 들어가니 방석 모서리에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방석이 놓여있었어. 모두 자기 아버지 이름이 적힌 방석을 찾아가 그 위에 앉았어. 그런데 소헌왕후는 방석을 찾아 공손한 태도로 밀어두고 그 뒤에 다소곳이 앉았어.

면접관이 물었어.

“그대는 어찌하여 방석에 앉지 않는 것이오?”

“네, 방석에 이름을 새긴 것은 누구의 자식인지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그 방석을 찾았으니 제 신분은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방석이라 하더라도 아비의 이름 자(字) 위에 어찌 올라앉을 수 있겠사옵니까?”

이리하여 소헌왕후는 또 높은 점수를 받았어.

잠시 뒤, 면접관이 건너편 궁궐 지붕을 가리키며 물었어.

“저 지붕에 기와의 골이 모두 몇 개인지 알 수 있겠소?”

그러자 모든 후보들이 지붕의 골을 세느라 눈을 찡그려 가며 법석을 떨었어.

그런데 소헌왕후는 가만히 앉아있었어.

“아니, 그대는 왜 가만히 있는 것이오?”

“네, 지붕의 골이 몇 개인지는 곧 알 수 있습니다. 잠시 뒤에 비가 내리면 골에서 떨어진 물이 처마 밑에 그 흔적을 남길 것입니다. 그걸 세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잠시 뒤에 비가 온다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소?”

“네, 저는 무명옷을 입고 밭에서 일을 즐겨합니다. 그래서 옷에 땀이 자주 뱁니다. 날이 맑으면 소금기 때문에 옷이 꺼칠꺼칠해지지만 비가 올 때에는 습기가 많아져서 옷이 누글누글해집니다. 그 정도를 보고 언제 비가 올 지를 가끔씩 짐작합니다. 오늘 마침 무명옷을 입고 왔기에 그리 말씀드린 것입니다.”

정말 잠시 뒤에 비가 쏟아졌어.

“으음!”

면접관은 곧 이를 태종에게 알렸고, 마침내 소헌왕후는 왕자비로 간택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소헌왕후는 이처럼 지혜로웠어. 뿐만 아니라 마음 씀씀이도 매우 너그러웠어. 친정아버지인 온(溫)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었음에도 누명을 씌운 박은(朴訔) 대감을 용서하였다고 해.

당시 박은은 태종의 높은 신임을 받고 있었어. 그래서 태종이 이를 이용하여 박은에게 충동질하여 온 할아버지를 모함하도록 하였던 거야. 그 전까지는 온 은 박은과 나랏일을 서로 의논할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까이 지냈어.

온 은 당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전에 박은에게 조정의 일을 부탁할 정도였어. 그런데 박은은 온 할아버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누명을 벗겨주기는커녕 도리어 가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던 거야.

세월이 지나 어느 날 박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어. 그러자 임금이었던 세종은 조정의 대신이자 아버지 태종이 아끼는 신하인 박은에게 조문(弔問)하였어. 이에 박은은 장례를 마치고 인사차 세종을 찾아왔는데 소헌왕후와 먼저 마주치게 되었어.

그러자 오금이 저려진 박은이 진땀을 흘리며 소헌왕후께 머리를 조아렸어.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 본뜻이 아니었습니다.”

박은이 소헌왕후의 아버지 온(溫) 할아버지의 일에 대해 사과를 하는 것이었어. 그러자 소헌왕후는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말했어.

“모든 게 다 나라를 위한 일이겠지요.”

소헌왕후의 가슴은 분노로 끓어오르고 있었을 거야. 그러나 대국적인 입장에서 모든 것을 품어주었어.

이로써 박은은 더욱 어쩔 줄 몰라 하였어.

이러한 소헌왕후를 보고 사람들은 더욱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래, 소헌왕후가 괜히 조선 최고의 국모(國母)라는 칭찬을 듣겠니? 그만큼 큰 인품과 지혜를 지녔기 때문이었지.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를 깊이 알아야 하는 것은 이처럼 훌륭한 선조들의 가르침을 널리 본받기 위해서인 것이야.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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