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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우리 청송심가 이야기(16)

임진왜란 이어 정유재란 다시 출정해 장렬히 순국

11세조 벽절공(碧節公·沈淸) 할아버지(3)

11세조 벽절공(碧節公) () 할아버지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이번에도 맏아들인 응락(應洛)을 데리고 멀리 울산까지 달려가셨어. 둘째 아들인 응렴(應濂)은 나이 드신 할머니(청 할아버지의 어머니)를 보살피도록 하고.

청 할아버지는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 통훈대부훈련봉사(通訓大夫訓鍊奉事)라는 벼슬을 하고 계셨지. 그러니 다시 전쟁에 참여하시지 않아도 부끄러울 일이 없었으나, 나라가 다시 위기에 빠지자 기어이 전쟁터로 달려가셨어.

청 할아버지가 달려가신 울산 태화강가에는 왜놈들이 높이 성()을 쌓고 장차 우리나라를 영구히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 그래서 많은 선비가 분개하여 이곳으로 모여들었던 거야.

전국에서 모여든 2만여 명의 선비 의병들이 왜성을 에워싸자 왜군들은 보급로가 끊기면서 고전을 하게 되었어. 물이 없어 오줌을 받아 마시고, 식량이 모자라자 전투용 말()을 잡아먹는 등 어려움에 빠졌지. 그러다 보니 왜군들은 발악하다시피 반격하였어.

부산에 있던 왜군들이 이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거쳐 울산 왜성으로 올라왔어.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지. 이때 청 할아버지는 다른 의병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시고 말았어. 청 할아버지는 몸을 사리지 않으시고 전투에 앞장섰던 거지. 돌아가실 때 불과 마흔넷이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

다음은 안동 사람 권주욱 선생이 쓴 청 할아버지의 묘비에 나와 있는 당시 모습이야.

 

정유년(丁酉年) 12月 21日, 도산(島山)(1) 전투에서 적들의 칼을 무릅쓰고 힘써 싸우다가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고 순절(殉節)하였다.

(1)오늘날의 울산 지역. 왜구는 이곳을 통해 내륙으로 들어왔다.

아아, 하늘이 어떠한 연고로 충신을 초야(草野)에서 죽게 하였던가? 맏아들 응락(應洛)이 말가죽으로 시체를 거두어 구송정(九松亭)(2) 뒷산에 모셨으니 공의 나이 44세였다.

하늘이 만약 몇 년의 수(壽)를 더 주었더라면 나라에서 원수를 소탕(掃蕩)하는데 어찌 세월이 더 많이 걸렸으리오? (중간 줄임)

아아, 공은 시례지문(詩禮之門)(3)의 자제로서 무사(武士)가 그의 일이 아니며 방어(防禦)가 그의 책임이 아니나, 특별히 의리의 성품으로써 인간의 떳떳한 도리를 지키는 데 나아가고, 충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옳지 못한 일에 양심(良心)을 좇아 분개하였다.

반드시 이기고 지는 것과 날카롭고 둔한 것을 마음에 기대하지 않고, 호미로 무기를 삼고 장대에 기(旗)를 걸어 주사산의 싸움에 이겼고, 공암(孔岩)에서 적을 베어 드디어 백성이 살 곳을 보장하는데 앞장 서서, 당일 조수(鳥獸)들이 저들의 고기를 먹는 것을 보았으니 어찌 당당하지 아니하리오? 이는 마땅히 명(銘)(4)할 만하니 명은 다음과 같다.

 

공이 죽어서 혼(魂)이나마 옛 산에 돌아왔으니

그 혼은 결코 죽지 아니하였도다.

몸은 비록 죽었다 하나

그 이름은 후세에 영원히 살아있도다.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아니한 사람을 보니

이름이 따라서 없어진 자로다.

공의 이름은 천고에 푸르고 빛날 것이니

영원히 살아있도다.

- 기해년 4월 상순에 안동인 권주욱 삼가 지음

 

이 비문을 읽어보면 청 할아버지가 어떻게 마지막을 보내셨는지 알 수 있어. 청 할아버지는 글을 읽는 선비 집안에서 자랐지만 나라의 어려움을 만나 기어이 목숨을 바치셨던 거지. 이에 나라로부터 푸를 벽(), 절개 절()’을 써서 벽절(碧節)’이라는 정호(亭號)를 받으셨어. 그리하여 오늘날 청 할아버지를 벽절공이라고 부르게 된 거야.

벽절공 할아버지의 산소(山所)는 벽절정에서 건너다보이는 관리(館里) 뒷산 오른쪽 길가에 있단다. 옛날에는 이곳을 도치곡(道致谷)이라 불렀는데 청송읍(靑松邑)에서 진보(眞寶)로 나가는 도로 오른쪽 기슭에 있어서 길에서도 쉽게 볼 수 있어.

그 뒤 울산 충의사(忠義祠)가 벽절공 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고 있으니 길이 역사에 남을 일을 하신 거지.  (다음 호에 계속)

(2)여기에서 말하는 구송정(九松亭)은 오늘날의 벽절정이 아니라 청 할아버지가 살았던 청송군 청송읍 덕리 마을에 있던 정자를 말한다. 지금의 청 할아버지 무덤 왼편에 있었다. 지금도 둘레에 소나무가 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3)글을 읽는 선비의 집안  (4)시()로 새겨둘 만 한 일이니

벽절공 묘소와 묘비(경북 청송군 청송읍 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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