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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가 들려주는 우리 청송심가 이야기(12)

8세조 사인공 휘:순문(舍人公 諱:順門)

아동문학박사 심후섭

 

순문 할아버지 내외분 묘소(경기도 김포 소재)

얘야. 네가 만약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어떻게 할 것 같니?

폭군인 연산군 때에 순문(順門, 1465~1504) 할아버지가 계셨어. 증조부는 태종 때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온(溫) 할아버지셨고, 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회(澮) 할아버지셨어. 아버지는 내자시판관(內資寺判官)을 지내신 원(湲) 할아버지였고, 어머니는 부사정(副司正)을 지내신 이의구(李義垢)의 따님이셨어.

순문 할아버지가 어릴 때였어.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어,

“너 또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어디로 갔더냐? 하루 이틀이 아니니 오늘은 매를 좀 맞아야하겠다.”

“앞으로는 열심히 책을 읽겠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학문을 닦고, 집안과 나라를 위해 애써야 할 것이야.”

순문 할아버지는 3살 때에 이시애의 난으로 아버지를 여의었던 거야.

이에 대해서는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쓴 순문 할아버지의 묘갈명에 잘 나와 있어.

공은 어렸을 적에는 차분하고 말이 없었으며 자라면서 보통 아이들보다 우수하였다. 그러나 참판공이 일찍 세상을 떠나 집에서 아버지의 엄한 훈계를 듣지 못하였으므로 열너댓 살이 될 때까지 학문에 대한 뜻을 세우지 못하였는데, 어머니가 몹시 우려하여 불러서 나무라고 타이르자 공이 바로 깨우치고 감동하여 스승을 찾아가 수업하며 부지런히 애써 게으르지 않고, 비록 비와 눈이 내리더라도 거르지 않았다. 학업이 나날이 성취되었으므로 조부인 공숙공(恭肅公)이 매우 기뻐하며 여러 자손 가운데 특별히 사랑을 모아 주었고, 늘 공이 자라서 원대하여지기를 기대하였다.

순문 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어. 이로 보면 순문 할아버지가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어.

1486년(성종 17)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5년(연산군 1) 증광시(增廣試)에서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되었다. 이어서 박사에 승진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성균관전적·감찰이 되고, 이 해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병조정랑이 되었다.

이어서 부수찬(副修撰)·정언(正言)·부교리(副校理)·지평(持平)을 거쳐, 1503년 장령(掌令)에 올랐으며, 이어 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지냈다. 이 때 국왕 의복의 장단을 지적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사고, 이듬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개령현(開寧縣)에 유배되었다가 참수되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직언을 잘하여 연산군의 폐정을 자주 지적하였다. 중종 때에 복관되었다.

다시 순문 할아버지의 묘갈명을 살펴보면 이런 구절이 나와.

조정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었는데, 늘 청렴하고 삼가고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여 비록 작은 일이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 직위에 있으면서 그 직분 다할 것을 생각함은 인신(人臣)의 분수이다.”고 하였다.

이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순문 할아버지는 매우 청렴하셨을 뿐만 아니라 강직하셔서 잘못된 일은 끝까지 직언하셨어. 그 결과 연산군의 미움을 받으셨던 거야. 당시 죄목은 연산군의 잘못을 지적하며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것이었다 하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이에 대해 우정 김극성(憂亭 金克成, 1474~1540)은 순문 할아버지를 적극 옹호하였어. <국조인물고>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어.

연산군이 죄가 아닌 것을 가지고 심순문을 죽이고자 하여 군신(群臣)들에게 물었지만 모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공(김극성)이 대사간(大司諫) 성세순(成世純)에게 이르기를 “간관(諫官) 벼슬로써 죄가 없는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도 말을 하지 않는다면 한갓 몸을 아낄 수는 있겠지만 맡은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니 어찌 하리오”라고 말하자, 좌우에서 아무 말을 못하였다. 그러나 공은 드디어 심순문의 억울한 정황을 아뢰었다. 연산군이 듣지는 않았으나 (김극성에게) 죄를 내리지도 않았다.

이로 보면 순문 할아버지는 죄가 없음이 분명하고, 이를 지적한 김극성 또한 본분에 충실한 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어.

그런데 야사(野史)이기는 하지만 한 기생을 두고 연산군과 다투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순문 할아버지는 같이 벼슬길에 오른 친구 강혼(姜渾)과 함께 어울리며 각기 미모가 빼어난 기생첩을 두고 있었는데, 이를 눈여겨 본 선배 정붕(鄭鵬, 1467~1512)이 은근히 타일렀다고 해.

“빨리 버리어 뒤에 뉘우치는 일이 없도록 하게!”

이 말을 들은 강혼은 곧 기생첩을 버렸으나 순문 할아버지는 웃어넘기고 말았다는 거야. 그 뒤 두 기생이 궁중에 뽑혀 들어가 연산군의 애첩이 되니, 연산군이 질투심에 북 바쳐 순문 할아버지를 해치게 되었다는 이야기야.

그렇다면 우리는 순문 할아버지의 잘못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구나.

그래, 우리가 선조들의 이야기를 되새기는 것은 좋은 점은 본받고 잘못된 점은 고치는 데에 그 뜻이 있는 거야. 순문 할아버지는 폭군을 만나 억울하게 돌아가셨어. 그렇지만 그 전후사정은 따져보아야 하는 거야. 이 과정에서 정론을 펼친 김극성의 용기와, 정붕의 의미 깊은 충고, 강혼의 정확한 사리 판단 등을 잊지 말아야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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