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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천재화가 현재(玄齋)심사정(沈師正)

【Ⅲ】. 겸재(謙齋), 관아재(觀我齋), 현재(玄齋)의

사인삼재(士人三齋)가 한마을에 살다

심사정(沈師正) 장미호접(薔薇蝴蝶)

기법 :지본채색 / 크기 :18.8 x 16 cm / 소장처 :간송미술관

겸재가 <해악전신첩>을 처음 그려내던 숙종 37년(1711) 신묘에는 뒷날 영조(재위 1725-1776)인 연잉군(延礽君 1694-1776)이 18세로 사옹원(司饔院) 도제거(都提擧)를 맡고 있으면서 즉석에서 수묵으로 산수 2폭, 난초 1폭, 매화 2폭 도합 6폭을 그려 작은 항아리의 장식그림을 삼게 했다고 한다. (金時敏, 東圃集 권7, 謹題御 書蛅子後)

뿐만 아니라 이해에 숙종은 영잉군의 신선도를 보고 이런 제화시를 붙인다.

얼굴이 얼마나 훤하고 밝은가!

칼은 등 뒤 칼집에 꽂혔구나!

첫 그림부터 절로 좋으나, 평일에 일찍이 가르치지 않았었네.

왕자가 그림 잘 그리는 것을 국왕이 칭찬하며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대부들이 그 그림을 보배로 여겨 진상하는 분위기이니 그림 길로 나서는 것이 과거 다음으로 떳떳한 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영잉군은 현재가 태어나던 해인 숙종 33년(1707)에 현재 종로구 통의동인 순화방(順化坊) 창의리(彰義里)에 창의궁(彰義宮)을 마련해놓고 이곳을 드나들며 같은 동네에 사는 겸재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겸재가 32세, 연잉군이 14세 때였다. 그 결과 연잉군이 이와 같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왕실측근 사대부사회에서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었다.

이에 죽창은 더욱 현재를 겸재 문하로 보내서 그림을 배우게 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죽창의 장모인 풍천(豊川)임(任)씨(1656-1727)는 겸재의 증조부 정창문 (鄭昌門 1565-1614)의 장인인 자산(慈山)군구 임정로(任廷老1534- ?)의 고손녀로 겸재와는 8촌 남매의 척분이 있었다.

풍천임씨가 겸재보다 20세 연상이었으니 아마 현재는 어린나이에 외조모 손에 이끌려 겸재댁 사랑으로 인도되어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을 듯하다. 늦어도 풍천임씨 환갑해인 숙종 42년(1716) 병신 이전 이었을 것이다.

현재가 10세 겸재가 41세 때니 그 이전인 현재가 8,9세 때일 수도 있다.

현재 모친 하동정씨(1678-1744)는 곡구 정유점(1655-1703)의 무남독녀 외딸이다. 곡구의 양자 정창동(鄭昌東 1693-1764)이 곡구가 돌아갔을 때 겨우 11세였던 것을 보면 죽창은 일찍부터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뒷날 심익창이 역적모의를 할 때 심정주는 전혀 이와 무관하게 되어 공초에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는 외가 집에서 태어나 외조모 손에서 키워졌다고 보아야 하는데 곡구(谷口)라는 정유점의 호를 통해보면 그 집이 인왕곡 입구인 지금 옥인동 초입이었을 듯하다.

이 사실은 겸재가 하양(河陽)현감을 지내고 와서 현재 옥인동 20번지 부근의 자수궁교 근처의 인왕곡으로 이사하고(1727) 난 뒤 어느 때 사천이 현재에게 보낸 시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자네 휘둘러 뿌린 곳 보니, 무한한 미불(米芾, 1051-1107)의 세계일세.

어찌 처자를 두지 않아, 길가에 방황하게 하나. 천년동안(玄宰, 其昌의 號)와 한마을 정하양(鄭河陽, 鄭敾의 전임관직)을, 서로 조석으로 상대하니, 가슴속에 옛 뜻이 자라난다.”

분명 겸재가 하양현감을 지낸 뒤에 현재와 같은 마을에 살았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겸재는 숙종 46년(1720) 경자 12월12일에 하양현감에 제수 되어 설을 쇤 다음 경종 1년(1721) 신축정초에 하양으로 부임해 가서 6년 만기를 채우고 영조 2년(1726) 병오 4월에 상경하여 다음해 정미(1727)에 인왕곡으로 이사한다.

따라서 현재가 21세 되던 해인 영조 3년부터 겸재와 현재가 한 마을에서 살았다고 보아야 한다. 이 시절에는 풍속화의 시조인 관아재(觀我齋)조영석(趙榮祏 1686-1761)도 겸재 댁과 수십 보 떨어진 이웃에 살았다 한다. 겸재 서거 후에 관아재가 지은 <겸재정동추애사(謙齋鄭同樞哀辭)>에서 관아재가 직접 밝힌 내용을 옮겨 보겠다.

「 정공(鄭公)의 휘는 선(敾)이요, 자는 원백(元伯)이며, 겸재라고 자호하니 광산인이다. 어려서부터 한양서울의 북쪽동네 순화방 백악산 밑에서 살고 나 역시 순화방에서 대대로 살며 공보다 10세가 어리니 내가 죽마 탈 때 공은 이미 엄연히 관(冠) 쓴 사람(어른)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항상 공경하여 일찍이 나들이를 한 적이 없다.

매양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면 나에게 보이지 않은 적이 없고, 우리 집 곁으로 이사 와서는 서로 수십 보 가까이 떨어져 있지 않음으로 각건(角巾) 쓰고 청려장 짚은 채 아침저녁으로 왕래하여 거른 날 없이 지금 30년에 이르렀으니 공의 일생을 알기로는 나만한 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

그렇다면 겸재의 인왕곡 거주시기에는 진경시대를 대표하는 사대부 화가들이 겸재, 관아재, 현재의 사인삼재(士人三齋)가 모두 인왕곡 한 마을에 이웃해 살았다는 애기가 된다. 어떻든 현재가 인왕곡에서 태어나 살았으므로 당시에는 지금 경복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겸재 댁과는 그리 멀지않은 거리였다. 그래서 현재가 8,9세 어린나이 때부터 겸재에게 나가 배울 수 있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 하다.

최근 강관식(姜寬植)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겸재는 숙종 42년(1716) 병신 2,3월경에 관상감 천문학겸교수(天文學兼敎授 종6품)로 서사(筮仕, 음직으로 처음 관직에 나감) 승정원일기 제681책 영조 5년 3월21일 을축 참조 이해는 현재가 10세이고 현재의 외조모 풍천임씨시가 환갑(61세)이며 겸재가 41세 되는 해였다.

겸재가 <해악전신첩>으로 화명(畵名)을 조선은 물론 중국에까지 널리 떨치면서 그의 주역(周易)실력과 천문학 실력까지 높이 평가돼 당시 좌의정이던 몽와 김창집의 천거로 특채 되었던 모양이다. 김창집은 겸재의 스승인 심연 심창흡의 맏형이었다. 이렇게 이 시기는 겸재 댁이거나 현재 댁에 경사가 이어져 모두 행복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현재는 양가의 보살핌 속에 칭송과 격려를 받으며 착실하게 겸재문화에서 화법수련의 기초를 다져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갑술환국(1694) 이래로 양시양비(兩是兩非)의 절충론을 주장해 일당(一黨)을 형성한 소론(小論)이 왕세자를 등에 업고 차차 정국을 주도하자 의리명분론을 강력히 내세우며 서인의 적통을 이어가는 노론이 이에 강경 대응했기 때문이다.

결국 숙종은 병신처분(丙申處分 1716)으로 노론의 의리명분을 인정해 소론의 발호를 막는다. 그래서 당시 노론 영수인 좌의정 김창집을 숙종 43년(1717) 정유 5월12일에 영의정으로 승진시켜 정국을 주도하게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김창집 일가의 보호를 받는 겸재의 관직생활은 탄탄대로를 걷는 듯 순탄하여, 초고속 승진을 계속하니 숙종 44년(1718) 무술 윤 8월20일에는 사헌부 감찰(종6품)로 영전한다.

이해 6월8일 숙종이 경희궁(慶熙宮) 융복전(隆福殿)에서 60세로 승하하자 영의정 김창집이 원상(院相)이 되고 우의정 이건명(李健命 1658-1722)이 총호사(摠護使)가 되어 숙종을 장사지내고 왕세자를 보위에 올리니 이가 경종(재위 1721-1724)이다.

        -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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