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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제14대 심수관 선생 추모회

“당신들이 일제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는 것 아닌가”

 

11월 18일 오후2시 프레지던트호텔 부람스홀에서 개최된 고 제14대 심수관 추모회에서 심대평 청송심씨대종회 회장의 추모사가 있었다.

- 추모사 전문 -

지난 2월 13일부터 2박 3일간 청송심씨 일가 20명이 일본 가고시마로 심수관 도요를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계기는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기념해 가고시마시 여명관에서 열리는 ‘화려한 사쓰마야키전’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날 오후에 전시회를 관람할 때의 일입니다. 현지 고교생들이 단체로 관람을 왔는데 마침 해설사가 12대 심수관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학생들에게 “우리는 이 작품을 만든 사람과 같은 집안인데, 이 전시회를 보려고 20명이 한국에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사실인 것을 알고는 곧바로 해설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대단하다”고 감복했습니다.

옆에 있던 일본인 할머니 2명도 놀란 표정으로 “이 학생들은 도쿄대학에도 많이 들어가는 가고시마의 명문고교생들”이라면서 우리 일가들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이 광경은 심수관 일가가 가고시마에 얼마나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존경받고 있는지를 보여주었으며, 당연히 저희 일가들의 가슴도 뜨거워졌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쓰마 도자기의 탁월한 후계자였던 한 도예가의 삶을 추모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고 14대 심수관 선생은 약력 소개와 영상을 통해 보았듯 유구한 사쓰마 도자기의 역사에 풍요로운 예술성을 더한 예술가로서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그의 별세를 아쉬워하는 연유일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심수관 선생은 잘 아시다시피 1598년 정유재란 때 조선의 남원에서 일본의 가고시마로 끌려간 도공의 후예였습니다.

그는 젊었을 적 도공의 길이 아니라 군인을 꿈꿨습니다. 그런 그에게 선친인 13대 심수관 선생은 마당의 나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나무들이 스스로 원해서 여기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산과 들에서 자유롭게 자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있는 자리에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노력한다. 우리도 저 나무와 같다.”

이 말을 듣고 14대 심수관 선생은 마음의 방황을 끝냈으며, 그 후 탁월한 작품활동을 했을 뿐만이 아니라 선친의 유업을 하나하나 실천한 효자가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98년 서울에서 개최한 <400년만의 귀향-일본 속에 꽃피운 심수관가 도예전>이었습니다.

선친이 1964년에 별세하며 남긴 유언은 “아들아, 조상들이 이곳에 온 지 400년이 되는 1998년을 잘 부탁한다”는 것이었고, 14대심수관 선생은 그때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30년 이상을 고민했습니다.

그는 선조 대대로 만든 도자기들에도 혼이 깃들어 있다면 고향에 가보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에 온갖 반대와 난관을 극복하고, 가고시마에 있던 역대 조상들의 귀중한 작품 400여 점을 모두 한국으로 갖고 와 동아일보 일민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김대중 현직 대통령이 관람하는 등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그는 남원 교룡산에서 불을 채화해 가고시마로 갖고 갔고, 그 불은 지금도 가고시마에서 영원히 불타며 사쓰마도자기를 구워내고 있습니다. 남원의 불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일을 진두진휘한 분이 바로 여기 계신 15대 심수관 선생입니다. 14대 심수관 선생은 나중에 한국에서 열었던 이 전시회가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또 공방을 늘리고, 노보리가마를 만들고, 역대 조상들의 작품을 안전하게 모아 전시하는 수장고를 만들면서 사쓰마 도자기의 번영에 기여했습니다. 그의 열정이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의 ‘고향을 어찌 잊으리오’의 모델이 되고, 대한민국 명예총영사가 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14대 심수관 선생은 자신의 핏줄과 근본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잊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살고 있는 일본도 배척하지 않은, 진정으로 한일 화해를 위해 노력한 분이었습니다.

1965년 그는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했습니다. 한일 국교정상화반대로 대학가가 시끄러울 때였습니다. 그는 서울대 강의에서 계란을 맞을 각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사쓰마 도자기는 불행한 시대의 바람에 아버지인 한국의 종자가 어머니인 일본의 대지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14대 심수관 선생은 2002년 한일 월드컵공동개최를 전후해서 만든 한일직능교류회의의 일본 측 실행위원장을 맡아 2002명의 일본인 직능인을 인솔하고 한국을 방문한 것도 그런 소신의 결과였습니다.

한일관계가 최악이라는 요즘, 한일간의 선린우호를 위해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서, 입이 아니라 행동에서 나온 그의 탁견과 실천력이 그리워집니다.

저는 오늘 청송심씨 대종회 회장으로서 14대 심수관 선생을 추모하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심문을 뛰어넘은 인물입니다. 나는 그가 전통에 살면서도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경을 뛰어넘은 진정한 자유인이었고, 일본 규슈의 남단 가고시마의 조용한 마을에서 평생을 지냈으면서도 예술혼만큼은 천의무봉이었던 세계인이라는 헌사를 영전에 바칩니다.

14대 심수관 선생은 15대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돌아가는 녹로의 움직이지 않는 심(芯)이 되거라.”

녹로는 회전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현상에 속지 말고, 주위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이 가야할 길을 묵묵히 가라는 뜻입니다.

이미 15대가 원숙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고, 16대도 일찌감치 도예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행복한 일입니다.

14대 심수관 선생님, 이승의 일은 모두 후손과 우리에게 맡기시고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2019년 11월 18일 청송심씨 대종회장 심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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