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떡거머리 심총각이 장가를 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일타홍은 노마님을 찾아가 도련님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도련님이 처녀장가를 드셔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던 노마님은 깜짝 놀라며 다시 물었다.
“그 애를 장가를 들라는 말이냐? 그럼 너는 어쩌고...”
사실 노마님으로서는 망나니 같던 아들을 지금처럼 훌륭히 이끌어 주고 또 어려운 살림을 한마디 불평 없이 이끌어 나가며 나까지도 정성껏 돌보아주던 더 없는 착한 며느리인데 격식 때문에 아들을 또 장가를 들여야 한다니 기막힌 노릇이었다.
그리고 일타홍이 그런데 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니 대견하고 고맙기는 하나 일타홍에겐 미안하고 안쓰러운 일이 아닐 수 가 없다.
“신분이야 어쨌든 너를 두고 어찌 또 며느리를 볼 수가 있겠느냐 말이다.”
“제가 이 댁으로 들어 온 것도 도련님 잘되게 하기 위해서이고 노마님이 소인네를 이 댁에 들인 것도 또한 같은 일이 아니옵니까? 지금 이대로 있는 다면 애당초 마음먹었던 일은 다 틀어지고 마는 것이 옵니다.”
“그러나 우리같이 가난한 집에 누가 대가 집 규수를 줄려고 하겠느냐?”
“그런 걱정은 마시옵소서. 그동안 규수감을 물색하였는데 지금 승지를 지내고 계시는 노극신(盧克愼) 영감님 댁 규수가 매우 정숙하여 도련님의 배필이 되기에 손색이 없을 듯 하오니 매파를 보내시면 반드시 성사가 되실 것이 옵니다.”
“승지의 벼슬을 하는 집안에서 뭐가 부족해 사랑하는 따님을 우리 같은 가난뱅이에게 주겠느냐!”
“아니옵니다. 마님께서 매파를 보내어 청원하시면 거절은 아니 하실 것이 옵니다.”
“너는 무엇을 믿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노극신 승지로 말씀 올리면 도련님의 스승이신 노수신 영감님의 아우가 되시는 분이옵니다. 형님께 물어보시면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터이오니 어느 부모가 도련님 같은 신랑감을 마다하고 하겠나이까?”
노마님은 일타홍에게 감명을 받은 것이 하나 둘도 아닌데 또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하였다.
다음날 아침 노마님은 노극신 댁으로 매파를 보냈는데 5일이 지나자 허혼 하겠다는 기별이 왔다.
그로부터 두 달 후에 혼례를 올리고 떡거머리 총각 심희수는 어엿한 선비가 되었다.
일타홍은 자기가 서둘러 사랑하는 도련님을 장가 들였으나 서방님이 새색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아무리 그러리라고는 각오하였으나 그 착잡한 심경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희수는 장가를 들고 나서부터 공부도 하지 않고 옛날 버릇이라도 나온 듯 그저 그날그날 술집 출입이나 하며 허송세월만 하는 것이다.
일타홍이 아무리 충고를 해도 이제는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일타홍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보따리를 싸놓고 마님에게 나아갔다.
“소인네가 기녀의 몸으로 이 댁에 들어오게 된 것은 도련님 한 분을 위해서였는데 이제 성공의 날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 마당에서 다시 학업을 게을리 하고 소인네 충고도 무용지물이오니 소인네는 별 도리 없이 이 댁을 떠날까 하옵니다.” 하니 노마님은 깜짝 놀라며
“네가 이 집을 떠나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 하고 간곡히 말렸으나 끝내 집을 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일타홍은 나가면서
“소인네가 이리하는 것도 서방님이 정신을 차리시어 다시 면학에 분발하게 하기 위한 것이 옵니다.” 하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 남자를 성공 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생면부지의 심씨댁에 들어와 3년간을 서방님 글공부며 살림살이며 노마님을 모시기까지 고생고생 하였으나 성공문턱에서 집을 나오게 되니 그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일타홍은 목적지도 없는 길을 지향 없이 걸으며 두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심희수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술집에서 나와 취한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아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노기에 찬 얼굴로 언제까지고 아들만 노려보고 있던 노마님은 갑자기 벼락 치듯 큰 소리로
“이 놈 꿇어 않지 못하겠느냐!”
어머님의 추상같은 호령에 깜짝 놀란 심희수는 얼결에 두 무릎을 끓었다.
“이놈아 너도 사람이냐!” 두 번째의 호통에 심희수는 다시 움츠러들었다.
한참 있다가 노부인은 음성을 낮추어 말을 이었다.
“너는 우리 가문의 심 덕자 부자(沈德字符字)를 쓰시는 개국공신 심정승 어른의 7대 손으로 조선조에 들어와 정승이 다섯 분이나 나온 명문가 아니더냐!”
“그것은 저도 압니다.”
“이놈아 네가 알긴 뭘 알아 못난 놈...”
그러더니 이번에는 비통한 얼굴을 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리 개국공신 가문에 너 같은 놈이 나와 집안을 망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정말 통탄할 일이다. 그 애는 너 같은 놈을 사람을 만들겠다고 그리 애를 쓰다가 결국은 집에서 나가버렸으니 그간에 그 애가 애쓴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듯 아픈 것을 어찌 하겠느냐!”
“그래 그 애는 너를 다시 일어나게 하기 위해 이 집을 나가 버렸느니라.
나는 이제 스스로 죽어 조상님께 사죄 할 것이다.“
심희수는 깜작 놀랐다.
일타홍이 나갔다는 것도 충격이지만 어머님이 자결하시겠다는 말에는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어머님 소자가 미련하여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착실히 공부하여 가문의 영광을 다시 찾겠습니다.”
“그런데 일타홍은 어디로 갔습니까? 간 곳을 알면 제가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일타홍이야 말로 제게는 은인이 아니옵니까?”
“그러나 간 곳을 모르니 당장 찾아 올 수도 없겠거니와 안다 하더라도 그 애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애가 울며 나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네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는 이 집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하였느니라!“
심희수는 그 말을 듣고 깊이 뉘우치며 한숨을 쉬었다.
일타홍 이야말로 나에게는 더 없는 은인인 것을 그가 아니면 어찌 이렇게 타락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양가(良家) 규수에게 장가를 갈 수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할수록 배은망덕한 내가 싫었다.
심희수는 이제부터라도 다시 공부를 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한사코 일타홍을 찾아 집으로 데려오겠다는 약속을 어머님께 드리고 다시 글공부에만 열중하게 되었다.
-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