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사중건기

구암사
소재지: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


구암사 전경


玉果之霽洞쿞山鎭其背鶉江襟其前毓靈而凝精誠一名區也爲靑松沈氏世傳平泉而有翼然一祠扁以龜巖者乃其先忘世亭諱璿霽湖亭諱光亨杜菴諱敏謙龜巖諱民覺四先生妥享之所也夫忘世亭之高風淸節霽湖亭之邃學篤行杜菴之倡義樹功龜巖之爲國効忠祖而傳孫叔以繼姪炳烺輝暎昭載於國乘野史風韻攸洎有足以廉頑而立懦故粤昔 健陵己未鄕章甫與四先生後裔合謀而建此祠春秋舍菜者六十有餘年不幸見毁於 高宗戊辰大同撤院之日襟紳蹄蹌之地變爲樵牧歌嘯之場矣後承之齋恨靡弛至于乙巳復就地築壇獻享然禮疎儀闕殆未免告朔之餼羊矣後孫相演相貴等謀復其舊積數三年而多方劈劃創建祠宇未及告竣相演又不幸就世其族均澤洪燮等繼其後而成其事俾輪焉奐焉復營築講堂屢閱寒暑而浩役次第了畢以今年三月將擧縟禮均澤跋涉五百里踵吾門而語其顚末因求余文爲記余以不敢當辭而其請益勤則歛膝而告之曰尊門此擧於闡先慕賢兩盡其道則如俎豆之儀升降之節守護之芳必各有條貫井井不紊矣余何贅焉惟當於平居暇日思四先生之所樹立慕四先生之所燕翼篤詩書禮樂之敎服仁義忠孝之說修身而正家推而化及于鄕黨州縣則不但有先生德有補世敎也夫然後凡此注措不爲一時之美擧而爲永世之勿替也盍以是相勗哉均澤曰謹聞命矣遂而其說俾揭之于楣

時旃蒙大荒谷風節

後學 德殷 宋在直 謹記
詩山 許敬吉 謹書


구암사중건기(번역문)
玉果고을 제동(霽洞) 경치를 살펴보면 초악산(鷦嶽山)이 뒤에 우뚝 서 있고 鶉子江은 앞을 휘어감고 흘러 정기가 어려 있으니 진실로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마을이로다.
靑松沈氏가 대대로 살아온 이 마을에 날을듯한 한 祠宇에 구암(龜巖)이라 扁額하였으니 그들의 선조인 망세정 휘 선(忘世亭 諱 璿), 제호정 휘 광형(霽湖亭 諱 光亨), 그리고 두암 휘 민겸(杜菴 諱 敏謙), 구암 휘 민각(龜巖 諱 民覺) 네분 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하여 제사를 모신 곳이다.
대체로 忘世亭의 高風淸節과 霽湖先生의 수학독행(邃學篤行)과 杜菴先生의 창의수공(倡義樹功)과 구암선생의 위국진충(爲國盡忠)은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전수하고 숙부는 조카에게 계승시켜 빛나는 이 얼은 국사(國史) 또는 야사(野史)에 분명히 기재되어 유풍여운(遺風餘韻)이 미치는 곳마다 족히 완부(頑夫)를 청렴(淸廉)하게 하고 유부(懦夫)를 自立하게 한 것이다. 때문에 옛날 正祖 己未年(1799)에 고을 선비들이 四先生의 후손과 더불어 뜻을 한데 모아 이 사우(祠宇)를 세우고 춘추(春秋)로 제사를 모시기 60餘年 不幸하게도 高宗 戊辰(1868)年의 서원 훼철령(書院 毁撤令)으로 철폐되어 청금(靑襟)과 진신(縉紳)이 모이던 곳이 초동목수(樵童牧竪)의 놀음 바탕으로 변하여 버렸다.
후손(後孫)들의 원한이 사무쳐 乙巳(1905)年에 이르러 다시 그땅에 단(壇)을 쌓아 제사를 모셨으나 예식(禮式)이 너무 소략(疎畧)하여 거의 형식에 불과하였다. 후손 상인(相演), 상귀(相貴)등이 옛모습 그대로 復設하려는 생각에서 數3年에 걸쳐 多方面으로 계획을 세워 祠宇 창건을 착수하여 준공을 보지 못하고 불행하게도 相演이 세상을 떠났다. 그후 균택(均澤) 홍섭(洪燮) 등이 그의 뒤를 이어 그 일을 완벽하게 끝내고, 다시 강당건립(講堂建立)을 계획하여 몇해에 걸쳐 이렇게 큰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이리하여 금년 3月에 위패봉안(位牌奉安)하는 예절을 거행하기로 하고 균택씨가 5百里 먼길인데도 내집을 찾아와 공사의 전말(顚末)을 이야기하고 또한 나에게 記文을 요청하기에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요청이 너무나 간절하기에 그분 앞에 옷깃을 여미고 告하기를 「貴門 이번 일은 先祖를 천양(闡揚)하는 한편 현인(賢人)을 추모(追慕)하는 두가지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제사를 모시는 의식과 신실(神室)에 오르내리는 예절과 사우(祠宇)를 수호(守護)하는 방책이 제각기 조리(條理)가 있고, 문란(紊亂)함이 없으니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오? 오직 당부하건대 평소에 쉴 겨를이 있으면 4先生이 수립(樹立)한 업적을 생각하고, 4先生의 영혼이 도와 주신 음덕(蔭德)을 추모하며, 4先生의 시서(詩書)와 예락(禮樂)의 가르침을 돈독히 배우고 인의(仁義)와 충효(忠孝)의 말씀을 따라 자신을 닦고 가정을 바르게 할 것이며 그 교화를 온 고을에 미치게 한다면 先生의 德으로만 있지 않고 세교(世敎)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그렇게 한다면 이번의 조처(措處)가 一時의 미거(美擧)만 되지 않을 것이요. 영세(永世)까지 침체(沉替)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이를 힘쓰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均澤氏가 말씀하기를 「삼가 일깨우신 말씀으로 듣겠다」고 하기에 마침내 그 말을 새겨 현판(懸板)하게 하였다.

乙巳年(1965) 봄에
後學 德殷 宋在直은 삼가 짓고
詩山 許敬吉이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