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사강당중수기

양계사 강당(서원)
소재지: 전남 장성군 남면 마령리


양계사 중문


吾鄕長城俎豆先德者五六祠良溪其一也祠以享沈氏靑城伯遁齋愛菴三賢靑城伯諱德符 太祖龍興有勳以開東方萬億年之基拜左相諡定安遁齋諱繼年仕麗知成州事麗社旣屋托跡空門變名避匿物色求之補外羅州到卽投印픫家入珍原山中秉執大義綱紀賴以扶植愛菴諱涓天性忠孝博通經史 太宗朝登第長松明月天褒嘉乃當除監察御史諭彰善斥惡對以君禮臣忠若見唐虞都兪大用竟早世士林惜之靑松縣有淚血岩世傳愛菴公聞 聖朝賓天岩上痛哭石面盡赤人以號之以遁齋先生杖屨於玆地鄕人立祠並享三世而大同撤院置講堂以寓存羊之義與間以士林詢謀築壇釋菜於祠趾而仍重修其堂以資講誦見今異言熾斯文沮喪之餘而此或爲碩果不食儒學重熙之一大消息耶聞而記其事將命者沈生能九歲丙午重陽月幸州奇宇萬謹書

양계사강당중수기(번역문)
내 고향 장성(長城)에 선덕(先德)을 제사지내는 사당이 다섯 여섯곳이 있으니 양계사가 그중 하나이다. 심씨의 청성백과 둔재와 애암 삼현(3賢)이 철향(腏享)되었으니 청성백의 휘는 덕부(德符)로 태조(太祖)가 개국(開國)할 때 공(功)을 세워서 우리나라 만억년(萬億年)의 터를 열어 좌정승(左政丞)에 임명되었고 시호는 정안(定安)이다. 둔재의 휘는 계년(繼年)으로 벼슬이 고려조의 지성주사(知成州事)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중이 되고 이름을 고치어 숨으니 물색하여 찾아서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임명하자 나주에 도착하여 즉시 벼슬을 버리고 가족을 거느려 진원(珍原)의 산속으로 들어가서 대의(大義)를 지키니 기강(紀綱)이 그에 힘입어 바로 잡아졌다.
애암의 휘는 연(涓)으로 천성(天性)이 충효(忠孝)하고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여 태종조 때 문과에 급제하니 임금이 장송명월(長松明月)이라 칭찬하고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하여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물리치는 정치를 물음에 임금은 예의를 지키고 신하는 충성을 다하면 요(堯)임금의 시대를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니 임금이 칭찬하고 크게 쓰려고 하였으나 마침내 조졸(早卒)하니 사림(士林)에서 애석(哀惜)하게 여겼다. 청송현에 누혈암(淚血巖)이 대대로 전하여지니 애암공이 임금이 승하(昇遐)하였다는 말을 듣고 바위에 올라가 통곡(痛哭)하자 돌이 피빛으로 물들었으므로 그렇게 불렀고 둔재선생이 여기에서 머물고 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삼대(3代)를 철향(腏享)하였는데 서원(書院)을 일제히 철폐(撤廢)할 때 강당을 남겨 두어 정신수양하는 의(義)를 부치고 간간히 사림에서 단(壇)을 쌓아 사당 터에서 간단한 제사를 지내고 강당을 중수(重修)하여 경서(經書)를 강송(講誦)하니 지금 이단(異端)이 성(盛)해지고 유학(儒學)이 쇠퇴하는 시대에 혹 자아(自我)의 욕심을 억제하고 자손에게 복을 끼쳐주어 유학이 다시 밝아지는 일대소식(一大消息)이 아닌가 한다. 즐겁게 듣고 기를 써달라고한 사람은 심생(沈生) 능구(能九)이다.

병오년九월에 행주 기우만이 삼가 지음



良溪祠講堂重修記
吁此長城郡南面馬嶺里奐然飛驚于洞天顔曰良溪祠虛江沈先生遁齋沈先生愛菴沈先生三代三顯妥靈之所也是祠之建在於徃古不幸中途被大院君大同毁撤之禍俎豆之享亦闕於久士林之齎恨果何如哉其冤枉屢申於朝至高宗十九年而特蒙設壇之敎以全羅觀察使李書九撰壇碑竪於遺墟權行春秋之享未久當國家社屋之變祠宇復元之機逸失於無奈且杳然冤鬱之情曷可勝言也哉往在乙酉天運循環疆土光復正是回泰之秋以是復元之謀士林與同宗提携而繼起不息幸以戊子冬本孫遁齋公派譜續修論齊發翌年己丑始役而越庚寅春竣役然未及於充得工費故纂捐於各宗中後裔鳩聚蟻集越八年丁酉完得復建實由沈一門齊力其克竣利成之功果宜大書壽傳而不得遺憾不無矣又爾後靈霜經久十餘講堂頹落飜瓦之事漸至焦眉不可遲延粤在戊午秋享後本孫宗議又發結成重修委乃於己未起工以竣役院貌一新壯嚴倍前士當尊賢孫應慕先盖加勉勵以光後日余敢忘僣記實而協贊後裔芳名刻於別板欲壽千秋是爲記焉 光復後三十七年辛酉三月日長興高濟杰謹記 本孫有司 基泳 財務 炯澤

양계사강당중수기(번역문)
아아 장성군남면마령리 경치좋은 곳에 훌륭한 양계사가 있으니 허강 심선생 둔재 심선생 애암 심선생의 삼대(3代) 삼현(3顯)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이 사당은 옛날에 지었으나 불행히 중도에 대원군(大院君) 대동철폐령(大同撤廢令)의 화(禍)를 입어 제사지내지 못한지 오래되니 사림(士林)의 슬픔과 한탄이 과연 어떠하였겠는가 그 억울함을 여러번 조정에 호소하여 고종19년에 설단(設壇)하라는 교지(敎旨)가 내렸고 전라도관찰사 이서구(李書九)가 단비명(壇碑銘)을 지어 유허(遺墟)에 세우고 임시로 춘추의 제사를 지냈으나 오래지 않아 경술국치(庚戌國耻)를 당하여 사우(祠宇)를 복원(復元)할 기회를 잃었음에 어찌 할 수 없었으니 제사지내지 못한 정(情)을 어떻게 이루 다 말하리오 그런데 지난 을유년에 천운(天運)이 순환(循環)하여 강토(疆土)가 광복(光復)되고 국권(國權)이 회복(回復)되니 사당복원하자는 의논이 사림(士林)과 동종(同宗)에서 같이 일어나서 계속 끊이지 않다가 다행히 무자년 겨울에 본손(本孫) 둔재공파보를 속수(續修)할 때 의논이 일제히 일어나 이듬해 기축년에 일을 시작하여 지난 경인년 봄에 일은 끝났으나 공사비를 충당하는데 부족한 금액을 각 종중 후예(後裔)로 부터 희사(喜捨)를 받은지 8년 정유년에 완전히 공사를 끝내니 진실로 심씨일문(沈氏一門)의 힘으로 준공(竣工)한 공로는 마땅히 크게 써서 오래 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였으니 유감(遺憾)이 없지 않았다. 또 그후 세월이 오래되어 강당의 퇴락한 것과 개와를 갈아야 하는 일이 시급한 일로 지연(遲延)시킬 수 없어 무오년 가을 추향(秋享)을 지낸 후 본손(本孫) 종의(宗議)가 또 일어나 중수위(重修委)를 결성(結成)하고 기미년에 기공(起工)하여 일을 마치니 집 모양이 일신(一新)되고 전보다 장엄(壯嚴)하였으니 선비들은 마땅히 존현(尊賢)하고 자손은 선조를 사모하며 더욱 힘써서 뒤를 빛내야할 것이다. 어느날 내가 감히 참람(僣濫)됨을 잊고 사실을 쓰며 돕고 후예방명(後裔芳名)을 별판(別板)에 새겨 오래도록 전하고자 이에 기록한다.

광복후37년신유3월
장흥 고제걸이 삼가 지음
본손유사 기영
재무 형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