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정처사공(휘 학)묘갈

처사공 휘 학 묘소
소재지: 전남 곡성군 겸면 괴정리

묘 비 석


櫟泉宋文元公嘗莅玉果訪南州高士有如陳豫章之於徐孺子者曰不倚亭處士沈公是也公之圽己周百有餘星後孫將樹碣墓途胤澤相元遠來徵銘于余余以拙陋辭歷數年而請之愈力謹按其家狀公諱字聖源靑松人麗朝文林郞諱洪孚之後入我 朝有諱德符號虛江左議政封靑城伯諡定安公至諱璿號忘世亭京畿監司爲 端廟朝杖節名臣再傳而諱淳敦寧都正始居玉果寔公之七世祖也是生諱光亨訓導號霽湖文學著世士林俎豆之高祖諱彦謙宣傳同知中樞府事曾祖諱民獻宣務郞祖諱之澈承議郞考諱世徽以伯父通德郞諱之涉之子入系隱德不仕克繼家聲妣高興柳氏學生攀龍女克有婦德公生於 肅廟庚申正月七日天禀純厚氣貌莊重自幼才藝超凡及就學諸子經傳一覽輒誦性至孝事親無違甘旨菽水之供晨昏定省之節克盡誠敬處兄弟友愛甚篤湛樂之情常怡怡晝而對案論書夜而連被共寢焉勵志劬學至老不懈一以檢身實踐爲務朱書節要家禮心經近思錄太極諸書無不力究貫通見世道寢微絶意名利遂晦跡于林泉結第溪上取中庸不偏不倚之義扁以不倚盖其所蘊之邃所守之正於此槩可想矣嘗於日用動靜以敬字爲操心之符恒以此戒誨子弟酷愛山水遊覽名勝又愛慕尤菴先生尊華之義入華陽洞瞻拜 皇廟周玩先生遺澤摩挲徜徉不忍捨歸其感慕之意溢於諷詠矣 英宗辛未十月十三日以疾考終于家享年七十二葬于本縣鷦山乾柱峰下枕癸原配高興柳氏時遠女孝於舅姑克有賢範生於庚申正月十日卒於庚戌十二月八日葬用魯人之禮生二男二女男長師稷出系伯父次師益 贈掌樂院正女適鄭鎬英盧尙德師益男圭鎭贈吏曹參議女適趙雲豹蔡壽天金夢一埰鎭恒鎭圭鎭男相永 贈吏曹參判埰鎭男志永斗永進士宇永近永周永女適李儒洞鄭煥東恒鎭男民永致永孟永夏永女適丁命輔權晟相永男樂麟生員同知中樞府事樂五樂璣樂文皆克世其家女適朴東龜承旨餘不盡錄嗚呼公之邃學懿行旣被櫟泉先生之奬許斯可以知公之爲公也且名載邑覽足焉考德則亦可不朽公也然人之所嗟惜者以若才器蘊抱未能展布於世鞱晦以終于巖穴是其命也歟
銘曰
大明之洞乾柱之岡有墳四尺維處士藏嗟哉潛微久而未彰垂裕無窮天報在玆我銘其石焉用誽辭有欲知公鏡攷于斯
將仕郞 義禁府都事 德恩 宋秉珣 謹撰
族後孫 愚慶 謹書

16세조 불의정처사 심공 휘 학() 묘갈명
櫟泉 宋文元公께서 일찍 玉果에 赴任하시어 南州의 高士를 찾아 보시고 「옛날 陳豫章이 徐孺子에게 한것과 같다」 하셨는데 불의정처사(不倚亭處士) 沈公이 그 분이시다.
公께서 歿하신지 이미 百餘 星霜인데 後孫들이 墓碣을 세우려고 胤澤 相元이 먼길을 찾아와서 글을 請하기에 내 拙陋함으로써 辭讓한지 여러해 인데 請이 더욱 懇切하였다.
삼가 그 家狀을 살피건대 公의 諱는 학()이요 字는 聖源이요 靑松人이며 麗朝文林郞 諱 洪孚의 後裔이다. 朝鮮朝에 諱 德符 號 虛江은 左議政으로 靑城伯을 封하였고 諡號는 定安이요 諱 璿 號 忘世亭에 이르러서는 京畿監司로 端宗朝 仗節名臣이요 再傳하여 諱 淳은 敦寧府都正으로 처음으로 玉果에서 살으셨으니 이 분이 公의 7世祖 이시다.
이 분이 諱 光亨을 낳으시니 訓導로 號는 齊湖인데 文學으로 著名하였으며 士林이 祭享을 받들고 高祖의 諱는 彦謙이니 宣傳으로 同知中樞府事요 曾祖 諱 民獻은 宣務郞이요 祖 諱 之徹은 承議郞이요 考의 諱는 世徽이며 伯父는 通德郞 諱 之涉인데 入系하였다. 德을 숨겨 벼슬을 아니하고 능히 家聲을 繼承하였고 妣는 高興柳氏 學生 攀龍의 따님으로 婦德이 있었다. 公께서 肅宗 庚申(1680) 1月7日 태어나시니 天禀이 純厚하고 氣貌가 莊重하였으며 어려서부터 才藝가 超凡하여 就學에 이르러서는 諸子의 經傳을 한 번 보면 문득 외곤 하였다. 性品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兩親을 섬김에 甘旨와 菽水의 供養에 어김이 없었고 昏定晨省의 절차에도 精誠을 다 하였으며 兄弟들과 友愛가 매우 敦篤하여 서로 즐기매 항상 和氣가 감돌았고 낮이면 책상을 마주하여 글을 論하고 밤이면 한 이불 밑에 잠자리를 같이 하였다.
뜻을 가다듬고 學問에 힘써 늙도록 게을리 아니하였고 몸을 단속하여 實踐을 힘썼고 朱書節要 家禮 心經 近思錄 太極說등 諸書를 窮究하여 貫通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世道가 寓微함에 名利에 뜻을 끊고 드디어 林泉에 자취를 감추어 溪上에 띳집을 짓고 中庸의 不偏不倚의 뜻을 취하여 不倚亭이라 扁額하였으니 그 蘊蓄의 深遠함과 操守의 올바름을 대체로 想像할 수 있다 하겠다. 일찍부터 日用動靜에 敬字로 操心의 要諦를 삼았고 항상 이것으로 자제를 警戒하고 가르치곤 하였다. 山水를 몹시도 사랑하여 名勝을 遊覽하였고 尤菴先生 尊華의 뜻을 思慕하여 華陽洞에 들어가 皇廟에 瞻拜하고 先生의 遺澤을 두루 구경하고 어루만지고 서성거리며 차마 돌아가지 못하였으니 그 感慕의 뜻이 諷詠에 넘치고 있다. 英宗 辛未(1751) 10月13日 병환으로 집에서 考終하시니 享年이 72요 本縣 鵻山乾柱峯下 癸原에 葬事하였다. 配는 高興柳氏 時遠의 따님으로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閨範이 있었고 庚申 1月10日에 태어나 庚戌 12月8日에 卒하였으며 葬禮는 儒家의 禮를 썼다.
2男2女를 낳으니 長男 師稷은 伯父에게 入系하고 次男 師益은 贈掌禮院正이요 딸은 鄭錫英과 盧尙德에 出嫁하였다. 師益의 아들 圭鎭은 贈吏曹參議요 圭鎭의 딸은 趙雲豹, 蔡壽天, 金夢一에게 出嫁하고 埰鎭과 恒鎭이요 圭鎭의 아들 相永은 贈吏曹參判이요 埰鎭의 아들은 志永과 進士 斗永과 宇永, 近永, 周永이요 딸은 李儒洞, 鄭煥東에게 出嫁하였고 恒鎭의 아들은 民永, 致永, 孟永, 夏永이요 딸은 丁命輔, 權晟에게 出嫁하였으며 相永의 아들 樂麟은 生員으로 同知中樞府事요 樂五, 樂璣, 樂文은 다 家風을 이었으며 딸은 承旨 朴東龜에 出嫁하였고 나머지는 다 記錄하지 못한다. 嗚呼라! 公의 깊은 學問과 아름다운 行實은 이미 櫟泉先生의 奬許를 입었으니 公의 人品을 알 수 있었고 또 이름이 邑誌와 輿地勝覽에 실려 있으니 德行을 상고하기에 足하니 不朽할 것이다. 그러나 차석(嗟惜)한 바는 그와 같은 才器와 經綸을 世上에 펴보지 못하고 才能과 學識을 감추고 巖穴에서 一生을 마침이니 이는 運命인가 보다.
銘하여 이르노니
大明의 골짜기 乾柱峯 등성이 4尺의 封墳은 處士가 묻인곳 안타까워라.
아름다움 감추어져 오래 빛을 못 보았네.
子孫에게 끼침 다함없어 하늘아 갚으시리.
네 빗돌에 새기노니 어찌 아첨한 말이랴.
公을 알고저 하거든 이를 거울삼을 진져.
將仕郞 義禁府都事 德恩 宋秉珣은 삼가 撰함
族後孫 愚慶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