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남일


1871∼191년 本名 守澤 號 德弘 字 南一)
심남일은 1871年 2월 10일(음력) 全南 咸平郡 月也面 정산리(新基) 새터에서 태어났다.
노일전쟁 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1905年 11月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통분을 금할 길 없어 거의 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의병장 김준(金準·金泰元)의 아우 율(聿)의 부장이 되어 장성. 영광. 함평. 남원. 보성. 장흥(長城 靈光 咸平 南原 寶城 長興) 등지에서 일군과 항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金聿이 전사하자 스스로 대장이 되어 군율을 엄히 하고 진용을 재정비하였다.
이 때 그의 예하 장병과 그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봉장:강무경(姜武景) 임만선(任萬善) 장인보(張仁甫)
중군장:안찬재(安贊在) 박사화(朴士化)
후군장:노병우(盧炳友) 나성화(羅聖化) 최우평(崔友平) 김성재(金聖載)
도통장:김도숙(金道淑)
통 장:유치선(柳致先) 공진숙(孔盡淑)
군량장:이세창(李世昌)
호군장:강달주(姜達周) 정관오(鄭官午)
기군장:장문연(張文然) 이덕삼(李德三)
서기겸모사:염원숙(廉元淑)
도 포:장경선(張京先) 김판옥(金判玉) 선도명(宣道明)
도집사:최유승(崔有承)
모 사:권 택(權 澤) 정영태(鄭榮兌)
그리고 향리에서 도학으로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규율을 엄히 하고 민폐를 적게 하기 위하여 민가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무단 내정 돌입과 부녀자를 겁간하든지, 가축을 희생시키는 일 등에 대하여 엄히 처단할 것을 공포하였다.
1907年 11月1日 함평군 新光面에서 기치를 올려 의병을 모집·훈련하기 시작하여 1908年 2月13日 南平으로 행군하면서 적과의 접전을 감행하였다. 그의 첫 접전은 3月7日 강진면 오치동(吾治洞)에서 있었다. 적병 수백 명을 맞아 아침 6時부터 밤 10時경까지의 교전 끝에 수십 명을 살상하고 무기를 다수 노획하여 의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이어서 4月 15日 長興. 곽암(藿岩)에서 적 3名을 사살하고, 6月19日 남평 장담원(長淡院) 전투에서 적 5명을 베고, 6月25日 능주 노구두(綾州 老狗頭)에서 적 5名을 베고 말 2필과 무기를 노획하였다.
7月 30日 영암 사촌(靈岩 沙村) 전투에서 적 10여 명을 죽이고, 8月 1日 나주 반치(羅州 盤峙)에서, 9月20日 장흥 신풍(新豊)에서, 10月9日 해남 성내(城內)에서 10月27日 능주 돌정(石亭) 등지에서 모두 백여 급을 살상하였다.
이와 같은 전투에서 큰 성과를 올렸어나 불행하게도 沈南一과 선봉장 강무경(姜武景)이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 봄까지 접전일기에 기록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기간동안 추위와 병고로 인하여 은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909年 3月 다시 격렬한 교전을 재개하였다.
3月8日 대장 서리 강현수. 박봉주. 박채홍(姜鉉秀 朴奉柱 朴彩洪)이 나주 月橋里에 유진하였다가 밤에 남평 雲三洞에 집합하여 선동(船洞)으로 옮기는데, 탐마대(探馬隊)로부터 적이 내습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심남일은 미리 의병을 요소 요소에 매복시켰다가 적 五名을 사살하자 적은 榮山浦로 달아났다.
이에 보다 적극적인 전투를 전개해야 할 것을 계획하고 한편으로 영산포의 적을 격동시키면서 인근의 의병 부대에 통기하여 연합 작전을 꾀하였다.
이 때 水北의 전수용(全垂鏞). 이대국(李大局). 오인수(吳仁洙). 山東의 안규홍(安圭洪). 김여회(金如會). 유춘신(柳春信) 등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중에 특히 安규홍과는 끝까지 유기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沈남일은 전군을 五부대로 나누어서 東쪽 대치 대항봉 월임치 덕룡산(大峙 大巷峯 月任峙 德龍山) 꼭대기, 병암치(屛岩峙)에 각기 매복시켜서 적의 내습에 대비하였다.
다음날 새벽부터 능주 광주 나주 남평 영암으로부터 내습해 온 적병과 접전하여 적 70여명을 사로잡고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아군의 희생도 적지 않았으며, 본진의 총독 박기춘(朴基春). 좌익장 박여홍(朴汝洪). 우익장 박태환(朴泰煥)이 전사하였다.
11日, 계속하여 적의 내침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여 능주 풍치(風峙)의 좌우에 잠복하고 대기하고 있는데 이웃 12고을의 적병 4百여명의 포위 공격을 받아 百여명을 죽였는데도 적병은 물러가지 않았다.
세부득이하여 징을 쳐서 전병을 불러들여 두문(杜門)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4月2日에는 장흥 友山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곳은 능주 헌병이 매달 5차례씩 20여명이 장흥을 통과하는 곳이었다.
이날 姜현수가 의병 20名을 거느리고 매복하고 있다가 포를 터트려 적 8名을 사살하자 나머지는 모두 도망해 달아났다. 그래서 대포 2개와 다수의 무기를 포획할 수 있었다.
5月15日 보성 泉洞에 주둔하고 보성의 창의장 安규홍과 석호산(石虎山)에서 만나 연합 작전을 계획하였다. 작전수행을 위해 중군장 안찬재(安贊在)와 통장 김도숙에게 군량을 백 리 밖에서 운반해 오도록 하고, 후군장 김성재(金聖載)와 호군장 강달주(姜達周)에게 군사들을 잘 먹이게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보성의 왜장이 산상에 올린 의병의 깃발을 보고 50名 군사를 거느리고 내침해 오자 이들과 격전하여 적 5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安규홍과 장래의 전략을 기획할 때 李世昌이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정한 이치이니 남·북도의 의병이 합세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모두 그 말을 옳게 여겨 각지의 의병 부대와 연락하여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가던 중 의병을 해산하라는 황제의 조칙이 내려지게 되었다. 협박에 못이겨 내려진 조칙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1909年 7月21日 영암군 금마면 고인동(金磨面 古引洞)에서 자진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병을 해산한 후 沈남일은 姜무경과 함께 능주로 잠행하여 전의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 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던 중 10月9日(음 8月26日) 이를 탐지한 일군에게 체포되었다. 9月2日 光州로 이송되었다가 12月15日에 大邱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두 곳의 감옥에서 「10月20日 광주 담판」과 「12月15日 담판」, 그리고 「대구 담판」등의 글을 남겨 좋고 있다. 이 때 沈南一은,
『제 나라를 위한 것도 죄가 될진대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은 무슨 죄에 해당하느냐 대장부가 비록 너희에게 사로잡혔지만 쥐 같은 네놈들과는 옳다 그르다 따지고 싶지 않다.』
고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불의를 질책한 후 마지막으로 고국 산천에 그의 단심(丹心)을 터트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고, 1910年 7月23日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39歲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그의 부하 중 권영회(權寧會)는 1909年 7月 교수형을 언도 받았으며, 金致洪은 그 해 10月에, 李世昌은 9月에 교수형을 모두 순국하였다.
政府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年에 건국훈장 국민장(國民章)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