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원판결사(휘 최량)묘갈


판결사공 휘 최량 묘소
소재지: 광주군 실촌면 오향동

묘 비 석


十五世祖 掌隷院判決事 沈公 諱 最良 墓碣銘
公姓沈氏諱最良字白眉靑松人也考諱梓官止崇祿判中樞府事祖諱儒行執義 贈左贊成曾祖諱昶行郡守  贈吏曹判書高祖諱喜壽左議政靑城府院君 贈諡文貞妣貞敬夫人廣州李氏父諱象乾都事祖諱如圭判決事曾祖諱德馨領議政外祖姓諱柳公亮叅判文化人也鼻祖諱洪孚仕麗朝文林郞衛尉寺丞生諱淵閤門祗侯生諱龍吏曹正郞追封門下侍中靑華府院君生諱德符號虛江三重大匡左侍中入 李朝特進左議政錄功靑城伯靑城府院君 贈諡定安生諱溫領議政誕生 昭憲王后靑川府院君 贈諡安孝生諱澮左議政靑松府院君 贈諡恭肅連三世台輔勳德在於國史諱生湲內資寺判官純忠積德補祚功臣 贈左贊成生諱順門議政府舍人 贈領議政生諱逢源號曉窓同知敦寧府事  贈左贊成生諱鍵承文院正字早夭 贈領議政於公爲五代祖也公生于 仁祖己丑自幼能行孝悌之道學業不怠課程日就聲聞遠近 肅宗乙丑中司馬進士蔭授戶曹正郞己巳登增廣文科選槐院由正字陞博士拜注書歷檢閱校理修撰授通政同副承旨止嘉善掌隸院判決事  肅宗戊戌卒享年七十墓在廣州郡實村面五香洞先塋兆下亥坐之原配貞夫人安東權氏父諱德徹牧使祖諱大恒東昌尉外祖姓諱朴昌文判校密陽人 仁祖丁亥生卒于  顯宗甲寅享年二十八墓受命公兆祔窆無男女之育取姪周觀爲後文科歷翰林止正言娶安東權氏吏曹叅議重經女生二男二女男長敬弼娶豊川任氏應敎珖之女次男敬純娶草溪鄭氏洙天女長女適尹弼廣坡平人次適趙億漢陽人公與余結爲姻親兄弟略叙公之狀以爲銘銘曰
征邁日進早登魁擢詩禮忠孝循蹈世蹟瞻彼香山是公塋域一片貞珉蒼蒼古色
承議郞行承文院正字 丁道謙 撰
承議郞行檢書館校理 洪萬遂 書

15세조 장례원판결사 심공 휘 최량(最良) 묘갈명
公의 성은 沈氏요 휘는 최량(最良)이며 자는 백미(白眉)이고 靑松人이다. 아버지의 휘는 재(梓)니 벼슬이 숭록대부 판중추부사요 할아버지의 휘는 유행(儒行)이니 벼슬이 집의였고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증조의 휘는 창(昶)이니 벼슬은 군수였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고조의 휘는 희수(喜壽)니 좌의정이요 청성부원군이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 광주이씨니 아버지의 휘는 상건(象乾)으로 도사요 할아버지의 휘는 여규(如圭)니 판결사였고 증조의 휘는 덕형(德馨)이니 영의정이요 외조는 참판 문화 유공량(柳公亮)이다.
시조는 휘 홍부니 고려조에 벼슬하여 문림랑 위위시승이요 휘 연(淵)을 낳으니 합문지후요 휘 용(龍)을 낳으니 이조정랑이요 문하시중 청화부원군에 추봉되었고 휘 덕부(德符)를 낳으니 호가 허강(虛江)이요 삼중대광 좌시중이었고 이조에 들어와 좌의정에 특진되었으며 공훈으로 청성백 청성부원군에 녹선되었고 시호는 정안공(定安公)이요 휘 온(溫)을 낳으니 영의정이요 소헌왕후를 탄생하였고 청천부원군이요 시호는 안효공(安孝公)이며 휘 회(澮)를 낳으니 좌의정이요 청송부원군이며 시호는 공숙공(恭肅公)으로 3대를 이어 정승을 지내어 공훈과 덕업이 국사에 실렸고 휘 원(湲)을 낳으니 내자시판관이요 순충적덕보조 공신이며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휘 순문(順門)을 낳으니 의정부사인이요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휘 봉원(逢源)을 낳으니 호가 효창(曉窓)이요 동지돈녕부사였으며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휘 건(鍵)을 낳으니 승문원정자였으며 일찍 돌아갔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니 공에게 五대조가 된다. 公이 인조 己丑年에 낳으니 어려서부터 능히 효제의 도를 행하였고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고 공부가 날로 성취되어 명성이 원근에 퍼졌다. 숙종 乙丑年에 사마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직으로 호조정랑에 제수되었고 己巳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혀 정자에서 박사에 승진되고 주서에 임명되었고 검열 교리 수찬을 역임하고 통정대부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가선대부 장례원판결사에 이르렀고 숙종 戊戌年에 돌아가니 향년이 70이요, 묘는 광주군 실촌면 오향동(廣州郡實村面五香洞) 선영묘 아래 해좌원에 있다. 배위는 정부인 안동권씨니 아버지의 휘는 덕철(德徹)로 목사요 할아버지의 휘는 대항(大恒)이니 동창위(東昌尉)였고 외조는 문과 판교(判校) 밀양 박창문(朴昌文)이다. 인조 丁亥年에 낳아 현종 甲寅年에 돌아가니 향년이 28이요, 묘는 명을 받아 공의 묘에 부폄(쯊킋)하였다. 아들 딸을 두지 못하여 조카 주관(周觀)을 양자로 삼으니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을 역임하고 정언에 이르렀다. 안동권씨 이조참의 중경(重經)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2女를 두었으니 장남은 경필(敬弼)로 풍천임씨 응교 광(珖)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2남은 경순(敬純)이니 초계 정씨(鄭氏) 수천(洙天)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파평 윤필광(尹弼廣)에게 출가하였고 2녀는 한양 조억(趙億)에게 출가하였다. 공과 나는 인친(姻親)의 형제가 되므로 대략 公의 행장을 서술하여 명(銘)을 지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학업이 날로 진취(進就)되어 일찍 문과에 급제하였도다.
시례(詩禮)와 충효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도다.
저 향산(香山)을 보니 公의 영역(塋域)이로다.
한 조각 비석은 옛날의 정취 오래도록 간직하고 영원하리로다.
승의랑 행승문원정자 정도겸(丁道謙)이 지음.
승의랑 행검서관교리 홍만수(洪萬遂)가 글씨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