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응교공 휘 유 묘표석 |
歲庚申憂 上點權倖思用舊人沈君聖潤首入臺憲與趙光甫吳貫之諸人及余不侫並列三司聖潤以掌令獨啓請竄尹鐫閔宗道削黜閔黯安置楨柟等無何堅柟逆獄起廷論將乘時焱發聖潤不激不隨論其巨慝不爲己甚鞫獄旣竟勘保社勳聖潤論保社諸臣雖有勞固臣職耳旂常事重不直輕施請寢錄勳承嚴旨遆職與不侫及吳貫之掌四門課試取士于中學拜司諫院正言選入玉堂爲修撰遷獻納執義兼知製敎是秋鞫獄再起金益勳申範華等五人命追錄勳籍盖範華始與賊家相密再鞫名出賊招甚聚元勳金公錫胄卽其切親以
![]() ![]() ![]() ![]() 維貞侃視余履斷奸回傾世否凌戚勳肅憲紀形于朝志諸史鑑來古爲臣軌 領議政 崔錫鼎 撰 16세조 증영의정 행응교공 휘 유(濡) 묘갈명 庚申(1680)년 여름에 숙종께서 총애하는 능신(能臣)들을 점고하고 관록있는 사람을 등용할세. 심성윤(沈聖潤)이 으뜸으로 사헌부(司憲府)에 들게 되고 조광보(趙光甫)·오관지(吳貫之) 몇 사람과 불녕(不佞)①인 나와 더불어 三司에 함께 참여했다. 이 때 성윤이 장령(掌令)으로서 홀로 계청(啓請)②하여 윤휴와 민종도(閔宗道)는 귀양보내고 민암(閔촒)은 삭출하고 정(楨)과 남(柟)③은 안치(安置)④하게 하였으니 이는 허견(許堅)이 남(柟)과 함께 역적사건으로 옥사에 말려드니 조정의 논쟁이 시기를 타고 불꽃 같이 일어났었다. 성윤은 격하지도 않고 침착하게 큰 죄인들만 처리하고 혹심하지 않게 끝냈다. 옥사가 마감되고 보사훈공(保社勳功)을 세웠으나 성윤은 녹훈을 내리지 말 것을 청원하였다. 『사직을 보호한 여러 신하들이 비록 노고는 있었으나 마땅히 신하로서의 직분일 뿐이니 깃대 들고 앞장선 사람들만 중하게 여겨서 경솔하게 시행할 수 없습니다.』 임금의 엄한 교지를 받고 직위들이 교체될 때 성윤은 나와 오관지와 더불어 사문과시(四門課試)⑤를 관장하게 되고 학문에 능한 선비를 가려 뽑았다. 사간원의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옥당(玉堂)으로 뽑혀 들어가서 수찬(修撰)이 되고 헌납(獻納)으로 옮겼다가 집의(執義)에다 지제교(知製敎)를 겸했다. 이 해 가을에 옥사가 다시 일어났는데 김익훈(金益勳)과 신범화(申範華) 등 5인을 녹훈에 추가로 기록하라는 명이 내렸었다. 실상 범화는 처음에 역적들과 서로 밀접하게 지냈으니 두 번째 심문할 때 역적의 조서 중에서 비밀스럽게 감춰졌던 이름이 나왔으나 원훈(元勳)인 김석주(金錫胄)가 그와 절친했고 역적의 정황을 살펴서 김공에게 보고했기 때문에 공신들이 이것을 공로로 여겼다. 『그 죄를 덮어주고자 했으나 성윤은 달리 여겨 범화가 비록 사적으로 원훈에게 밀고했으나 기록문서에 그의 이름이 없고 또한 일찍이 심문사항으로 취조를 당했거늘 범화가 역적에 가담했음에도 원로에게 보고했다 하여 여기에 붙여 지금 와서 녹훈에 추가로 기록하는 것은 당위성이 없고 마땅히 그 죄를 밝혀야 됩니다.』 이어 그는 드디어 귀양보낼 것을 계청하였다. 이에 원훈 김공께서 석고소변(席藁疎辨)⑥하고 조정에서까지 논의되어 반역자들에게 원수를 갚게 되었고 이어 사찰하고 경계토록 했으니 심군은 범화로 인하여 척의가 있었으나 용서하지 않았다. 성윤이 물러앉으며 말하였다. 『범화는 소신과 7촌 척의가 되었으나 법 앞에는 서로 어찌할 수 없으며 직위가 간관으로 있으니 감히 사적으로 비호할 수 없습니다.』 이에 정승인 이상진(李尙眞)이 탄복하며 대각의 체통을 깊이 파악했다고 칭찬하며 사성(司成)으로 교체시켰다. 인경왕비 국상 때 국장도감(國葬都監)으로 차출되었으나 도청의 임명과정에서 격위가 맞지 않아 환수되고 교리(校理)와 응교(應敎)를 배수했다가 다시 수찬이 되고 관료들과 차자(箚子)⑦를 올려 민유중(閔維重)이 국구(國舅)의 신분으로 경연에 자리를 맡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민공을 사퇴시켰다. 정종의 시호도감 및 선왕의 실록을 중수하는 도감으로 차출되어 총관하고, 이어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부책임관을 맡았고 옥당에 많이 있었는데 얼마 안되어 옥사가 또 일어나서 이덕주(李德周)가 곤장에 맞아 죽었으나 사건이 허위로 발각되어 무고인 김중하(金重夏) 등이 국법에 어긋나서 되 몰리기에 이르렀다. 대신이 밝은 법에 인책하여 죄가 유형(流刑)⑧에 해당되니 성윤이 아뢰었다. 『이것은 가벼운 죄이니 만약 반역으로 인한 무고자를 죄인으로 되몰면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이 때 과장에서 복시(覆試)⑨를 추진하여 응시자가 문간을 메우니 대정에 들어가서 계청하여 취소토록 하였으나 대신이 억제함에 임금께서 엄교를 내려 교체시켰다. 민정승 정중(鼎重)과 이정승 상진(尙眞)이 함께 환수하여 줄 것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로부터 삼사(三司)에 머무르면서 끝내 되풀이하지 않았다. 이 때 훈척(勳戚)⑩이 정사를 잡고 하는 일들이 여러 사람에게 많이 거슬렸다. 성윤이 명사 6~7명과 함께 힘써 타일렀으며 이 일이 논쟁거리가 되었으나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아니했다. 庚申(1680)년 이후 대여섯 번 큰 논쟁이 있었고 그 때마다 대신들의 깊은 미움을 사서 마침내 상하의 직위를 얻지 못하고 때를 만나도 진급하지 못하고 광보 같은 몇 친구들도 역시 권신들에게 배척을 당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류가 끊이지 않고 사람들 또한 서로 이끌려 나가는데 능히 일맥 공의(公議)가 없어지지 않으니 아마도 선비정신을 지닌 여러 분의 힘일 것이다. 조부인 첨지공(僉知公)의 상을 당하고 거듭 상제를 치르다가 마침내 상기를 마치지 못하고 甲子(1684)년 2월 25일에 죽으니 향년 45세이다. 파주 광탄(廣灘)의 우랑골(牛浪谷)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으로 따른 것이다. 뒤에 둘째 아들의 높은 지위로 인하여 이조참판의 증직을 받았으니 군의 이름은 유(濡)이고 聖潤은 그의 字이다. 靑松人으로 귀한 벼슬로써 세상을 빛냈으니 영의정인 이름 연원(連源)의 7세손이며 증조부의 이름은 광세(光世)인데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로서 증직이 이조참판이고 조부의 이름은 억(檍)인데 첨지중추부사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약한(若漢)인데 증직으로 좌승지이다. 숙부인으로 추증된 어머니는 예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며 이미 퇴임한 신응구(申應즧)의 외손이다. 庚辰(1640)년 9월 1일에 군을 낳았는데 문예가 숙성하였다. 壬寅(166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7년 뒤에 정시(庭試)⑪ 문과에서 장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사관(史官)으로 추천되었다가 시강원의 설서(侍講院 說書)를 지내고 正言으로 승급했다가 어머니 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복상이 끝난 뒤 병조(兵曹)의 낭관(郞官)이 되었다. 숙종 원년에 지방인이 용간(用奸)을 부리며 변방에서 서성거렸는데 軍門에 들어가는 것이 본래 그의 뜻은 아니었다. 이미 조정이 현저하게 혁신되어 훌륭한 인사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군은 성품이 온화하면서도 마음속이 강했고 사람을 상대할 때 안팎이 한결 같았다. 항상 古人의 풍절(風節)을 사모하고 선행을 즐기며 의기를 좋아하였고 훌륭한 옛 사람들에 항상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집에 있을 때는 효도와 우애가 독실했고 친척들도 환심을 사서 형제와 자녀들이 모두 그 집으로 모여들었으며 교육에 성공한 사람들도 많았다. 친구간에도 신의를 소중히 여겨 평소에 사귄 사람들은 종신토록 궁하고 어려워도 개의치 않고 더욱 관후하였다. 군이 경사(經史)에 있어서 시율까지 모두 능했고 더욱 역사의 이야기를 즐겨해서 거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니 대개 그의 습성이었다. 古今 수천 년의 치란득실(治亂得失)을 마음속에 가득 담고 있었다.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는 크고 작은 것을 빠뜨리지 않고 널리 흩어져 있는 소설 같은 것도 모조리 읽고 기억을 했다. 나의 이종형인 이만겸(李萬謙)은 곧 군의 心友⑫로서 높은 재주와 넓은 학식을 가진 분인데 항상 사학(史學)으로 서로 겨루되 군을 추켜서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고 판서인 김만중(金萬重)은 군과 더불어 사기를 논할 때 그와 같은 분이 없다고들 하였고 군이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엄한 스승도 없었기에 늘 격려하고 도와주었다. 군은 능히 스스로 분발하고 힘써 배웠으며 뜻을 세워 크게 떨쳤으니 모두들 그가 오래도록 중대한 임무를 이룰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하늘이 여유를 주지 않고 일찍이 죽어서 시행하지 못하니 슬프다. 어찌 이것이 운명일가보냐. 부인 배천 조씨(白川趙氏)는 아버지가 대제학(大提學)이신 문효공(文孝公) 석윤(錫胤)이니 호를 낙정(樂靜)이라 하고 세상을 위한 유명한 분이었다. 부인은 아름답고 유순하며 시어머니를 섬기는데 뜻을 거역하지 않았고 남편을 받드는데 온화하면서 법도가 있었다. 公보다 3년 먼저 죽었는데 합장하였다. 3男2女를 길렀는데 맏아들 제현(齊賢)은 문장이 있었으나 벼슬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인 전 담양부사(潭陽府事) 수현(壽賢)은 문과에 급제하여 청렴이 두드러진 관리였고, 의주부윤(義州府尹)를 지내셨고 셋째 아들인 경현(景賢)은 진사 출신인데 젊어서 죽었다. 딸들은 김상연(金象衍)·이희춘(李喜春)에게 각각 시집갔으며 측실에 1男1女가 있었으니 아들은 공현(恭賢)이고 딸은 이산룡(李山龍)에게 시집갔다. 군이 나의 형님인 양졸공(養拙公)과 함께 진사시에 합격하여 이로 인해 군을 안지 오래이고 내가 일퇴(一退) 유상공(柳相公)과 군을 따라 박사업(博士業)⑬을 전공했으니 의리를 계기로 깊이 사귀었고 앞뒤로 조정에 나아가서 庚申(1680)년의 기강을 고쳐 잡을 때 관복을 입고 서로 주선하였는데 수년이 채 못되어 성윤이 죽었으니 미루어 생각하니 30년이 흘렀고 젊은 시절에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도 시들어 죽고 거의 다해가니 어찌 슬프지 않을 소냐, 부사 형제가 내 글을 징험(徵驗)하여 명을 삼았다. 명(銘)에 이르되, 곧고 강한 이력을 내가 살펴보니 간신을 잘라내고 세상을 경동하게 하지 않았는가. 척훈(戚勳)⑭을 능멸이 여기고 기강을 엄숙하게 했으니 형상은 조정에 엿보였고 의지는 사책에 실렸네. 옛과 지금의 거울로써 신하의 기본법을 삼았네. 領議政 최석정(崔錫鼎) 지음. 주(註) ① 불녕(不佞):재주 없는 사람. 자기의 겸칭. ② 계청(啓請):임금에게 아뢰어 청함. ③ 정(楨)과 남(柟):복창군(福昌君)과 복선군(福善君) 형제의 이름. ④ 안치(安置):죄인에게 일정한 장소를 제한하여 억류시키는 것. ⑤ 사문과시(四門課試):사부학당(四部學堂)이라고도 하는데 동서남북 네 군데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하던 제도. ⑥ 석고소변(席藁疎辨):거적을 깔고 엎드려 변명을 아룀. ⑦ 차자(箚子):간이 상소문. ⑧ 유형(流刑):죄인을 먼 지방이나 섬에 보내어 그곳에 머물게 하던 형별. ⑨ 복시(覆試):초시에 합격한 사람이 다시 보던 과거제도. 회시(會試)라고도 함. ⑩ 훈척(勳戚):공훈을 세운 왕의 친인척. ⑪ 정시(庭試):대궐 안마당에서 보이던 과거 시험. 증광시(增廣試), 별시(別試)등. ⑫ 심우(心友):마음을 허여하는 친구. ⑬ 박사업(博士業):과거 시험을 달리 이르는 말. ⑭ 척훈(戚勳):훈척을 달리 이른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