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영의정공(휘 속)묘표


증영의정공 휘 속 묘소
소재지: 용인군 구성면 동백리 석성산하


 

증영의정공 묘표


府君字源輔系出靑松高麗衛尉丞諱洪孚之後入我 朝自靑城伯諱德符至靑陵府院君諱鋼凡七代四世台輔兩世國舅 五代祖諱義謙大司憲靑陽君高祖諱 玉果縣監 贈領議政出繼溫陽郡守 贈左承旨諱仁謙曾祖諱光世弘文館應敎 贈吏曹參判祖諱檼成均進士 贈吏曹參判考諱若溟咸昌縣監 贈吏曹判書妣靑海李氏司僕僉正 贈參判諱文柱之女府君以癸巳十月十一日生癸酉五月二十五日卒平生抱負行誼爲世所推而天不假年有德無位人莫不歎惜葬于龍仁東村負壬之原先妣草溪卞氏高麗左侍中諱光之後祖諱時益左承旨考諱搏 敬陵參奉生于庚寅四月初三日戊申歸于先府君後先君三十八年十一月十三日卒享年八十一喆範懿行式于內外葬祔先君墓左不肖男宅賢曾經徒一品職 贈先府君左贊成後以原從功 贈領議政先妣眞受 恩誥男長啓賢府使次不肖宅賢行判書次最賢出繼仲父早歿次寶賢早夭次夢賢早歿次得賢正郞次泰賢校理內外孫曾男女四十餘人幷不錄
崇禎記元後百四年辛亥二月 日
不肖男 宅賢 泣血 謹記
長孫男 鐸 謹書
記聞

公居于密陽時因事上洛行到聞慶店舍夜聞越村有一婦之哭聲甚哀寃公問于店人則曰此是兩班家婦人而家極貧窮方遭夫喪己至多日不得殯歛只自守尸呼哭云公聞之慘側而路次無物可賻只所騎鬣者頗好價直百金使店主賣之則只捧四十金公命徒者輸送于喪家使之助用於喪需其婦人不勝哀感願聞公姓名而公終不言之得貰馬而行嶺南人至今傳之爲美事而沈氏昌顯可驗陰德之報云矣
謹按此說余聞於忠州族人而子孫之中無有知者無乃公曾不言於家內而終無所傳耶古人麥舟之賻豈獨全美也哉謹此識之使後世子孫赫世繁顯實有籍於祖先之種德云爾

16세조 증영의정공 휘 속(涑)묘표
府君의 字는 원보(源輔)니 계통은 靑松에서 나왔고 고려 위위승 휘 홍부(洪孚)의 후손이며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청성백(靑城伯) 휘 덕부(德符)로부터 청릉부원군 휘 강(鋼)에 이르기까지 7代동안 사세 정승(4世 政丞)이요 양세 국구(兩世 國舅)였다. 오대조의 휘는 의겸(義謙)이니 대사헌이요 靑陽君이며, 고조의 휘는 엄()이니 옥과현감(玉果縣監)이요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온양군수요 좌승지에 증직된 휘 인겸(仁謙)에게 출계하였고 증조의 휘는 광세(光世)니 홍문관응교요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할아버지의 휘는 은(檼)이니 성균진사요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아버지의 휘는 약명(若溟)이니 함창(咸昌)현감이요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靑海李氏 사복첨정(司僕僉正)이요 참판에 증직된 휘 문주(文柱)의 따님이다. 부군은 癸巳(1653 孝宗4)年 10月 11日에 낳으시어 癸酉(1693 肅宗19)年 5月 25日에 돌아가셨다. 평생의 포부(抱負)가 행의(行誼)로 세상의 추앙(推仰)하는 바 되었으나 하늘이 수(壽)를 주지않아 덕은 있으나 벼슬이 없으니 사람들이 탄식하고 아깝게 여기지 않은 사람 없었고 용인동촌(龍仁東村) 임좌원(壬坐原)에 장사지냈다.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로 고려 좌시중 휘 光의 후손이요 할아버지의 휘는 시익(時益)이니 좌승지며 아버지의 휘는 박(搏)이니 경릉참봉(敬陵參奉)이었다. 어머니는 庚寅(1650 孝宗元年)年 4月 初3日에 낳으시고 戊申(1668 顯宗9)年에 아버지에게 시집오셔 아버지보다 38年 뒤인 11月 13日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81이요 아름다운 德行이 內外에 모범이 되었고 아버지의 묘 왼쪽에 부장(쯊葬)하였다. 불초(不肖) 택현(宅賢)이 일찍이 종일품직(從1品職)을 지냈으므로 아버지에게 좌찬성이 증직되었고 뒤에 원종공(原從功)으로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도 정경부인에 증직되었다. 장남은 계현(啓賢)이니 부사(府使)요, 다음은 불초 宅賢이니 판서를 지냈고 다음은 최현(最賢)이니 仲父에게 출계하였으나 일찍 죽고, 다음 보현(寶賢)도 일찍 죽었으며, 다음 몽현(夢賢)도 일찍 죽었고 다음 득현(得賢)은 정랑이요 다음 태현(泰賢)은 교리(校理)였으며 內外의 손 증손 남녀 40여인은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숭정기원후 백사년 신해 이월   일에
불초남 택현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짓고
장손남 탁(鐸)이 삼가 씁니다.

기문(記聞=들은 일을 기록함)
公이 밀양(密陽)에서 살 때 일로 인하여 上京하다가 문경(聞慶)에 이르러 객사(客舍)에서 밤에 들으니 건너 마을에서 한 부인의 우는 소리가 매우 슬퍼서 公이 객사의 사람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 부인은 양반 집 부인인데 집이 지극히 가난한 중에 바야흐로 남편의 상(喪)을 당한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염(斂)을 못하고 다만 시체(屍體)를 지키며 부르짖으며 울고 있다」 하였다. 公이 그 말을 듣고 딱하고 불쌍하게 여겼으나 도와 줄만한 물건은 없고 다만 타고 온 말이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아 객사 주인을 시켜 판즉 40금(金)을 받아왔다. 종에게 명하여 상가(喪家)에 보내어 초상비용에 쓰라고 하니 그 부인이 슬프고 고마운 것을 이기지 못하여 公의 성명을 듣기를 원하였으나 公은 끝내 말하지 않고 말을 세(貰)내어 타고 떠나니 경상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아름다운 일이라 전하였고 沈氏가 번창하고 현달(顯達)하는 것을 음덕(陰德)의 보답에서 증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이 말을 내가 忠州의 일가에게서 들었으나 자손 중에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은 公이 일찍이 집에서는 말씀하지 않았으므로 끝내 전하여지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한다. 옛날 사람이 배에 보리를 싣고 가다가 초상을 당한 사람에게 보리를 부조(賻助)하여 상(喪)을 치르게 한 것만이 어찌 유독 아름답다 하리오 삼가 이것을 앎으로서 후세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번창하고 현달하여 진실로 조상의 덕을 행한 일에 도움이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