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조정랑공(휘 봉의)묘갈


國家用科目取人往往得有才者而亦往往失有志者夫旣有志矣不求合於世稍屈臨就卑仕以自高其志若圭峯沈公者非臨屈而志高者歟公靑松人諱鳳儀字聖韶上世多聞人高祖諱諿禮曹判書孝簡公曾祖諱東龜弘文館應敎祖諱攸弘文館副提學考諱漢章出後伯父諱敞潛德不仕妣李氏司饔院僉正舜岳女公爲人修潔不喜與俗人游杜門劬書好深湛之思以父母老也時時就公車業然非其好也年四十餘選進士又九年始仕爲 永昭殿參奉凡五遷官而出監井邑縣未幾罷去尋除內贍寺主簿司憲府監察皆不就由義禁府都事三轉而爲工曹正郞年七十三戊午終于家奠于廣州某山某原淑人李氏祔淑人京畿觀察使徵明之女一男道希早卒一女適士人趙德裕道希一男公彦公不嫺言笑獨喜爲詩務不爲塵冗語藻思工麗間亦琢刻一字未定意則削其草不留也故得詩不多而皆可傳也平居好靜坐客至其戶落然若無人焉惟槎川李一源順菴李子平及吾先君子相從遊甚樂數君子至必爲之行酒然公飮少而善醉甫釋爵己渥然丹也顧謂家人曰毋以我醉遂令客不醉銘曰
爰寢爰淸 毋疾于刹名 而幽人之貞 南仲維甥 矢德于銘 孔昭以永寧
甥姪 大提學 南有容 撰

16세조 공조정랑공 휘 봉의(鳳儀) 묘갈명
국가에서 과거를 보아 사람을 선발하는데 왕왕 영재(英才)를 얻기도 하고 또한 왕왕 뜻 있는 자를 잃는 일도 있었다. 이미 뜻을 두고 세상에 부합되기를 구하지 않으나 절개(節介)를 조금 굳혀 낮은 벼슬에 나아가 스스로 그 뜻을 높임이 규봉(圭峯:諱 鳳儀)같은 분이 아니겠는가.
公은 본관이 청송이니 이름은 봉의(奉儀)요, 字는 성소(聖韶)이며 선대에 알려진 사람들이 많았다. 고조 휘 즙(諿)은 예조판서(禮曹判書)이시며 시호(諡號)는 효간공(孝簡公)이다. 증조 휘 동구(東龜)는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이다. 조부 휘 유(攸)는 홍문관 부제학이다. 아버지 휘 한장(漢章)인데 큰아버지 창(敞)에게 출계하였다. 아버지는 덕을 숨기고 벼슬길에 오르지 않으셨으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로 사옹원 첨정 순악(司饔院 僉正 舜岳)의 따님이다.
公은 사람됨이 깔끔하여 일반사람들과 함께 놀기를 좋아하지 않아 문닫고 책을 읽었다. 침착함을 좋아하였으니 父母가 늙으셨기 때문이다. 때때로 소장(疏狀) 작성에 나갔으나 좋아한 것은 아니다.
40여세에 진사(進士)에 선발되고 또 9年만에 처음으로 벼슬하여 영소전(永昭殿) 참봉(參奉)이 되고 무릇 다섯 번 옮겨서 정읍현감(井邑縣監)에 나갔는데 얼마 되지 않아 파직되었다. 조금 후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거쳐 세 차례 전직하여 공조정랑(工曹正郎:正5品)이 되었다. 73세인 戊午(1738 英祖14)年에 집에서 별세하니 광주(廣州)땅 언덕에 장례 지냈다. 숙인(淑人) 李氏와 합장이다. 淑人은 경기도 관찰사 휘 징명(徵明)의 따님이다.
외아들 도희(道希)는 일찍 죽고 딸은 士人 휘 조덕유에게 출가했다. 道希는 외아들 공언(公彦)을 두었다.
公은 말 많고 잘 웃는 일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시(詩) 짓기를 즐기며 힘써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생각하는 도중에 또한 여러 차례 되새겨 한자라도 뜻을 정하지 않으면 초안을 삭제해 버리고 남겨두지 않았다. 그로 詩를 지은 것은 많지 않으나 모두 전해졌다. 평시에 정좌(靜坐)함을 좋아하여 손님이 그 집에 이르면 당연히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사천공(槎川公) 휘 이일원(諱 李一源)과 순암공(順菴公) 휘 이자평(諱 李子平)과 나의 아버지 휘 남한기(南漢紀)와 서로 함께 놀며 심히 즐거워 하셨다. 여러 군자가 찾아오면 반드시 술상을 차려 잔을 돌렸으나 公은 조금 마셔도 잘 취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식구에게 이르기를 내가 취했다고 해서 손님까지 취하지 않게 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이에 묘(墓)를 완성하고
그 자리를 청결하여 利名을 더럽힘 없으리니
유인(幽人)의 정절(貞節) 때문이다.
남중유(南仲維)는 생질로서
그 표덕(表德)을 명(銘)에 표시하여
오래 평안하시기를 크게 고한다.
생질 대제학 남유용(南有容)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