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성공신교서

호성원종공신록권 심 대


호성공신교서(扈聖功臣敎書)
보물 제1175호
◑ 소 장 처:경기박물관
◑ 지정년월일:1993년 11월 5일
◑ 크   기:세로 48,5×261㎝
◑ 재   질:저지(楮紙) 바탕에 생견(生絹) 배접
◑ 판   종:필사본(卷子本)
◑ 년   대:조선 선조 37년(1604) 10월
이 교서(敎書)는 저지(楮紙) 바탕에 비단으로 배접된 권자본으로 사주(四柱)안에는 상하로 양선(兩線), 좌우로 단선의 주선(朱線)이 그어져 있다.
상하 주선에는 3,4㎝의 일정한 간격으로 62개의 주선이 그어져 있고 그 사이에 묵서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말미의 인기(印記)는 시명지보(施命之寶)이다.
이 교서는 심대를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책훈(策勳)한 문서로 본래 1970년 필자가 당시 동아일보 임구빈기자, 문건수 경기일보 기자와 함께 현지 취재 안내중 청송심씨 문중에서 발견하였고 1986년도 부터 3년간 경기도 향토사료실에서 전시하던 중 1993년 경기도 사료실에서 문화재 지정 신청을 내어 보물로 지정받게 된 것이다.
남사면 완장리에 있는 심대의 묘소는 경기 기념물 제三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심대는 명종 1년(1546)부터 선조 25년(1592)때 까지의 사람으로 자는 공망(公望) 호는 서돈(西敦) 시호는 충장(忠壯)이며 본관은 청송이다.
의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선조 五년(1572) 문과에 급제한 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하였으며 권징의 후임으로 경기관찰사에 제수되어 한양을 수복코자 하다가 삭녕 등피나루에서 야음을 틈탄 왜적의 기습을 받자 이에 대적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공신을 책훈할 때 심대는 이원익 등 30명과 함께 2등공신이 되었다.

(扈聖功臣敎書) 原文

嘉善大夫京畿觀察使兼開城留守兵馬水軍節度使 贈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兼判義禁府事世子二師知經筵春秋館事 靑原府院君沈岱書
王若曰臣之見危授命旣不渝乎始終王者崇德報功寧有間於存歿肆擧懋典用答殊勳惟卿喬木奮家土林趐楚文章餘事早擢嵬科忠孝爲心夙負公望孤標絶俗難進易退之風正色立朝勿欺有犯之志頃於去邠之日克著從蔡之勞態掌河魚識取捨拾之素定疾風勁草在板蕩彌堅險阻艱難之嘗奔走羈靮造次顚沛於是協贊猷謀徵兵兩湖倡義聲而齊奮持節三輔抗虜騎之方張常懷循國慷慨之心肯思全軀退避之計佇三捷之秦凱痛一朝之表元雖志業未究於生前而功烈益彰於身後晋之狐趙則無死綏之節唐之張顔則之扈駕之勞惟卿兩全在古罕覿肆策勳扈聖功臣二等圖形垂後超二階爵其父母妻子亦超二階無子則甥姪女婿超一階嫡長世襲不失其祿宥及永世仍賜奴婢九口田八十結銀子七兩表裏一段內廐馬一匹至可領也於戱九京難作褒賞豈愜於予心萬世戚休忠貞庶舊於爾後故玆敎示想宜知悉 一等 李恒福 鄭崐壽 二等 沈友勝 沈 岱  沈忠謙
其他 略

(호성공신교서) 번역문
교(敎)
가선대부 경기관찰사겸 개성유수 병마수군 절도사 증 충근정량효절협책 호성공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의금부사 세자이사 지 경연관 춘추관사 심대에게 내리는 글
왕이 이르시기를 신하가 위험한 때를 당하여 왕의 명을 받고 처음과 나중이 변하지 않으니 임금으로 그 덕을 높이고 공을 보답하면서 어찌 생과 사를 구별함이 있으랴, 이에 아름다운 법을 들어 써 특수한 공에 보답하노라.
오직 경은 세신이오 구가이며 사림의 높은 가지로다. 문장은 말할것도 없이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충, 효를 마음에 지녀 두터운 물망을 지녔도다.
또렷한 지조가 세속과 다르니 어렵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서려는 형이도, 얼굴 빛 바르게 하여 조정에 서니 임금을 속이지 아니하고 충심으로 간하려는 뜻이로다.
지난번 몽진 하던날에 능히 호가(임금을 따라감)의 수고를 나타내었으니 곰의 발바닥인가? 하수의 물고인가? 취와 사가 본디 정하여 졌음을 알았으며 빠른 바람에 굳센 풀처럼 어지러운 처지에서 굳세었도다. 위험하고 어려움을 맛보자니 분주하고 고생되며 엎디어 지는 전패 조차에도 찰라 장면에서 협찬하고 주선하였네 군사를 삼남에서 징발하노라 의성을 외치니 모두 분발하며 절을 각처로 가지고 가니 적기가 바야흐로 기세를 부리는 데서 항거하였네 항상 나라를 위하여 죽으려는 강개한 마음을 품으니 즐기어 몸을 사리고 피하려는 꾀를 생각하였으랴. 하루에 세번 이겨서 개가 아룀을 기다렸더니 하루 아침 목숨 잃음이 마음 아프도다. 비록 뜻과 공업을 생전에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겠으나 공과 열은 더욱 죽은 다음에 들어나는도다. 진나라의 고모와 조리는 순직의 절이 없었으며 당나라와 장순과 언과경은 임금을 보호한 수고는 아니했거늘 오직 그대는 두가지를 겸하였으니 옛날에도 보기 드물도다.
이에 훈을 정하여 호가공신 2등으로 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드리며 두 계급을 올려 그 부모에게 작을 내리며 처자도 두 계급을 오리게 하라.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사위에게 한계급을 올리며 큰 아들은 대대로 승습하여 그 녹을 잃지 않도록 하며 죄의 용서는 영세토록 하라. 인하여 노비 9명과 전 80결과 은자 일곱량 의복 한 벌 내구마 한필을 내리니 받을 지어다. 슬프다. 구경에 난이 작하니 포상이 어찌 나의 마음에 맞을까마는 만세에 아름다움을 함께 하니 충정이 뒤에도 오래하기를 바라노라. 이에 짐짓 교시하노니 생각하건대 마땅히 알아서 다하라.
1등공신 이항복외 1인
2등공신 이원익외 29인
3등공신 이헌국외 52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