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실공(휘 상규)시장


領議政斗室相公諱象奎諡狀(山所在北)
公諱象奎字穉敎靑松沈氏也以高麗衛尉丞洪孚爲初祖入本朝靑城伯定安公諱德符佐開國官左政丞自是勳閥名賢奕世相承至諱攸官弘文館副提學號梧灘雅望重一世於公爲六世祖也曾祖諱聖希弘文館副提學 贈吏曹判書祖諱公獻成均進士 贈議政府左贊成考諱念祖禮曹叅判 贈議政府領議政受 正廟殊知選入 奎章閣爲直提學賜號涵齋而遽下世未克究其用妣 贈貞敬夫人安東權氏判書導女繼妣 贈貞敬夫人南陽洪氏學生啓初女始權夫人方娠有夢硯之兆以 英宗丙戌生公幼聰悟記性絶人於書能五行俱下嗜之成癖涵齋公聚書至數萬卷一日朝饍公不在索之四隣亦不得旣家僮過書室聞謦欬聲啓戶視之公方兀然坐手一卷不知日早晏也自是博極羣籍華聞藉甚涵齋公嘗語人曰好儲書者未必有好學之子如丁覬之有丁度亦千百之一耳吾則幸有此兒庶他日不患爲蠧魚飽也癸卯中進士試年甫十八而遊神光寺詩已膾炙人口是冬涵齋公卒于海西之察營公攀攀之餘情文咸備郡邑吏來吊者爲感歎焉己酉登謁聖文科屢攝起居注被講製文臣選庚戌圈拜 奎章閣待敎兼校書館正字 上念涵齋公不已故欲公趾其美而居數月因微事遞付義盈庫直長 上又念其驟進姑欲裁抑之也明春將有 園幸命還授閣職俾隨駕秋承命監監試照訖試時有負罪人子應講試官不能斥以臺言下理供諉之監試諸人公亦配高城郡未至宥還是冬丁曾祖妣憂癸丑連丁祖妣憂而間入翰薦又以注書舊望陞六品至乙卯冬制闋除弘文館修撰閣有新定之制曾經閣職者不拘館錄直擬館職世所稱閣錄是也丙辰差檢校公疏引李密表辭極悽苦上始賜例批旣而以文體不醇黜補熊川監未半載以邑事對吏 上敎曰飭施矣其令內移除司憲府持平陞掌令兼南學敎授丁巳拜司諫院獻納以文臣兼宣傳官奉命慰松京燒戶還爲應敎戊午 上將有 廟宮歲謁特除公通禮院左通禮使之前導夏 上爲輔 元子延宋諭善煥箕因行朝講講筵之輟已久世以謂盛典于是又特除公副應敎秋公仲弟府使公以太學執綱生不應殿講 上怒亟竄公濟州牧未行而寢始公纔成冠 正廟特召見之語筵臣曰此子白晳類乃父撤御案書命讀曰異哉其聲大於身謂涵齋公曰爾家千里駒也公初名象輿字可權是日改賜今名今字惟 聖意已以奎華期之也後 御製侑涵齋公曰有子克肖又以太學掌議因懲討事配金浦郡大臣金公致仁箚救之批旨有故人穉子之敎然 上以公英穎太露必欲老其才而成就之自在韋布講製動被匪怒之責或令讀書泮宮或使依近先壠欲其沈潛經史歛華就實以作他日大用之器旣釋褐置之承明著作之任俾朝夕左右而雨露之霜雪之無非敎也冬辟禁衛郞不應拜直閣旋以達川聖跡碑搨本 親受時陪進勞陞通政階爲刑曹叅議轉承政院同副承旨己未春通擬三銓新望政筒入 上謂公陞資屬耳遽命拔之未久命復其望差檢校直閣庚申 正廟昇遐八月始拜吏曹叅議因玄隧奉藏 御製有校正未審處配豊德府未幾 貞純大妃擧 先朝待閣臣故事因以因山迫近特揀罪名先是金尙書箕殷選抄啓文臣不欲與宰臣沈英錫作僚盖以其家舊有干係辛壬事也以此荐承嚴敎久靳除名而公適以三銓差金公享帖臺諫趙恒存蔡趾永輩迭劾公辭語罔測辛酉春遂竄于洪原縣冬因疏決宥還壬戌叙還檢校召之公引義不進以違牙牌竄南原府閣例不得違牙牌也到配卽放復差檢校以乘馹過限下吏罷癸亥入銓曹堅不出又坐罷叙爲兵曹叅議移大司諫甲子叅議禮戶曹兼春秋館修撰官與修正宗實錄以堂上官修史極選也秋大臣奏擢嘉善階拜刑曹叅判兼同知春秋館事轉吏曹叅判又辭遞仍兼同知 經筵事差備邊司有司堂上拜同知中樞府事兼都摠府副摠管乙丑出爲全羅道觀察使時湖南半道告饑公疏陳其狀請賑曰臣竊謂有司之力誠有限量 聖主之心則無終窮以有限之力言之則俵給蠲停之多誠若不可以有加於已施然以 殿下無窮之心推之則豊不欲使此民更得幾萬之穀以救其溝壑之命乎卽命許施丙寅叅判吏禮曹在外遞丁卯拜戶曹叅判還察有司仍勾管嶺南差冬至副使大臣以廟務方張奏留之戊辰拜副提學上疏以敬勤憂勞而治怠惰安逸而亂反復陳勉纚纚屢千言 上批曰卿之所陳皆今日急務可不體念而服行當書疏中要語付諸殿壁以觀時人讀公疏者皆曰賈山至言之流亞也後於講筵陳戒曰伏見昨講自止去臘以後不曾一章工課之未能接續豈不可悶王巖叟告宋哲宗曰聖賢之學非造次可成須在積累積累之要在專與勤屛絶他好始可謂之專久而不倦始可謂之勤程叔子亦曰共職經筵但見諸臣拱手默坐當講者立案傍解釋數行而退如此則積年閱歲所益幾何以臣所覩今之講筵少無異焉苟如斯而已則雖一日三講何益之有願 殿下先定聖志所講之若經若史必須體貼心身翫픂紬繹又必不恥下問好察邇言無令諸臣拱手默坐而退焉兼藝文館提學入銀臺爲都承旨己巳入文衡圈擢正卿付知中樞府事因帶知申兼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八月 翼宗大王誕降以産室廳直宿勞陞正憲爲禮曹判書兼知 經筵都摠管庚午歷刑工兩曹判書轉判戶曹兼知義禁差舟橋堂上董 元陵陵役陞崇政兼判義禁知春秋差通信使釐正堂上明溫公主生以內局勞又陞崇祿拜 奎章閣提學尋以前望拜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方力辭適以信行盤費冗濫者畧有釐正信使疏爭之至蒙勘罷公屢引義亦坐罷辛未春 惠慶宮患候平復又用直宿勞陞輔國自嘉善未二朞至正一品近古未有而有司之任輔國後減下例也大臣特請勿拘還差亦罕例也間拜大提學吏曹判書쯂不膺及拜兵曹判書關西土寇發淸北州郡多沒於賊時昇平久擧國震盪發京營兵討之翌年四月賊始平凡籌司本兵之酬酢事務者甚繁氄凌遽殆日不給而公應之沛然若尋常無事者然時人咸服其副時焉壬申遞陞付判樞兼 世子左賓客復判戶曹拜判敦寧府事冬以節使赴燕癸酉由漢城府判尹復쩵銓地又屢疏遞轉禮兵判丙子惠嬪喪卒哭前當行 廟享公以獻官疏陳 正宗室不可用樂引宋余靖疏古者卿佐之喪尙猶廢樂事及 皇朝懿文太子喪禮部翰苑參攷古制請太廟享樂備而不作事仍請詢裁諸大臣言卒哭前 正宗室祼薦尤爲未安請並停大享從之卽公所發也撰進哀冊文旋分司廣州戊寅復判吏曹公於是任自劃不出而判堂之除命已屢遭矣至是引前義復辭至再罷再仍最後命問啓嚴敎荐降公下得已出行大政疏遞己卯由兵判按關西辛巳始膺文衡之任撰進 健陵緬祔誌文前辭以前望違例而今以圈也俄以遠接使儐吊勅壬午判禮曹又移戶曹筵奏以時絀擧贏經用大縮之弊因及宮房免稅踰越國制請裁之 上命與惠堂等堂會査免稅之代盡當收者公退而覈其實以進所減者幾五千結癸未差 綏嬪葬禮都監堂上撰進諡冊文又差 孝懿王后祔 廟都監堂上時開城守臣請畿海稅千五百結以捄弊公據經法不許廟議省豊德府並其兩稅畀之公遂自引遞拜工判甲申差檢校提學乙酉又歷東西兩銓十月進拜議政府右議政公之龜卜已多年所而新命始下朝野爲之想望初筵袖進冊子凡四千七百有餘言首論人君養民之道曰天生斯民立君而牧之是君爲民而立也非爲君而與之民也其在繼世之君則是民也又皆祖宗之所遺而託付于我者是以自古聖哲之主知天爲民而立君也知天心甚惠愛于民也必奉天而養民卽書所云惟天惠民惟辟奉天是也因引大易損益之訓反復致意於本固邦寧之義而極陳民弊自都下貢布之難支至外邑窮貧之無告曰凡此首黔而上戴者皆 殿下赤子仰 殿下如天地望 殿下如父母而今所以養之者若是闕然又曰 殿下之任以民功者不惟不能養之又或虐之其虐之也雖非吾爲之吾之所任以民功者爲之其與吾爲之何異哉 殿下有按察之臣焉有糾劾之官焉則其有虐之而不察不劾使之無忌而卒逞是又與吾知而縱之何異哉彼其至靈也故或不敢怨至愚也故敢怨敢怨與不敢怨吾俱無以自解也繼之曰誠願 殿下奮發聖志勉勉不已辨賢否而明黜陟核功罪而信刑賞恢大公至正之心絶偏私邪屑之害親近忠讜講明義理恭己臨照以大警勅之先自宮禁宦妾御左右供奉之輩掖隸禁兵趍走使令之類莫不曉然知忠勤畏愼之可保而縱恣踰濫之必誅梱限截內外之嚴閽守謹出入之禁宮府洞達莫敢覬蔽痛革舊染一切肅淸是爲綱紀之立於內也次言大臣盡董率小臣效奔走則綱紀立於上也方伯知黜陟守令先字恤則綱紀立於外也以至鄕黨州閭人各奮發敦本實而謹孝悌則綱紀立於下也此在 聖志奮發之如何大奮發則大振而政無不得常奮發則常立而治無不成其言皆痛切著明深中時措之宜公平素持論每謂當平世百僚恬嬉庶務叢脞此自然之勢也于是也不度不量遽欲爲大更張大設施則舊獘未祛新瘼反增莫若先立綱紀漸振頹俗故若是縷縷也 上賜批曰書進之言無非今日之痼瘼寡躬之良箴憂愛之誠深庸感歎予雖否德願安匡弼因令廟堂謄頒講究施行丙戌以諸道編配數多主客俱困請令京外大行疏決雜犯以下放釋者恰過數千人丁亥二月 翼宗大王在春邸代聽庶務公同原任諸大臣登對公引成湯之昧爽丕顯文王之不遑暇食備陳勤政之道且曰勤之爲道亦有勉强與眞實之殊勤而不誠徒勞而已徒煩而已願邸下一念無忽以法成湯文王之勤焉賜溫批始 代聽命下公在政府一遵 正廟代理時例撰進節目會大司諫任存常投書詆公搆捏甚急至及第宅事辭極慘毒 小朝以敲撼嚴斥之因以公遭罹之不可强特令許副而適又湖南伯曹鳳振遞歸以 大小朝陳弊有異得罪於是追論 代理之不請反汗節目之不先禀裁爲曹鳳振之源頭令施刊削之典繼而三司迭發付處于伊川府十月特許放歸田里公歸長湍楸下日與田翁野老談桑麻說陰晴絶口不言世事若將終身焉越六年壬辰始敘付西樞翌夏重卜爲右議政公惶懼不敢膺附奏者五陳疏者三備陳私義之危蹙不安矢心自靖者飭諭敦迫愈益隆摯又命知申偕來公悚然胥命于州獄 上震怒命付處配白川郡未十日特宥仍以前任召之遣正卿敦諭繼下別諭曰予當有非常之擧公卽又胥命于金吾 上臨軒促入公不敢復言私出而膺命時有厨院減供事公因陳崇儉節用之道曰朱夫子釋論語節用愛人章曰國家財用皆出于民將以愛人者必先節用是知愛之一言萬世治民之本節之一言萬世理財之要帝王爲治之道無出乎此又曰不節則雖盈必竭能節則雖虛必盈因乞飭有司考審 三朝財用出入之數按今比舊罷其所可罷損其所當損其浮者必求其所以浮之者而杜之其約者必求其所以約之由而從之加之 聖慮斷之淵衷率是力行不輕用其財如此則國計不虧邦本可固其於保民生而壽國脉者實有賴焉盖積之百年而不足散之一日而有餘矣又有新搆主第事公引貞淑翁主出第時特下薍簾淑徽公主下嫁時不許繡裳事陳惜福遺安之道因言奢侈之獘請申紋緞之禁又言掖屬宮人祈禱寺刹之獘巫覡之容隱城闉誑誘譸張事請痛加禁斷又請禁祠院之冒濫恤貢布之凋殘並賜嘉納盖皆有會而發非空言也甲午陞領議政兼 世孫師扈衛大將十一月 純廟禮陟公行院相事 當宁御極公首以愼起居勤講學嚴宮闈杜倖門察民隱節財用六條反復爲說仍以實心二字爲六條之大本陳勉焉乙未入耆社陳病乞閒章屢上至因山後始許勉副拜領中樞府事丙申差 宗廟增修都監都提調 實錄總裁官丁酉 中殿嘉禮差都監都提調竣事後輒蒙錫馬之賞前此未入相也以享役以直宿以敦匠以撰進文字與 正宗 純宗 翼宗御製印進時勞前後錫馬者多不可記而提擧所歷爲十司都相則藥院廟署禁營厨院武庫也戊戌六月二十日考終于第享年七十有三疾革 上遣醫護視者再訃聞輟朝賻吊如例敎曰此大臣卽 四朝耆舊也淸雅愷悌之姿端方堅正之操華國之文章傳家之秉執非但爲同朝所推詡粤自 正廟在宥際遇隆重託以腹心亦我 純考體先仰成擢至上相逮予小子倚仗之篤不啻若蓍龜况有院相之勞乎一段爲國之苦心何處復見仍命成服日遣承旨致祭家以公遺意辭禮葬特命度支優助葬需哀榮之典於是備矣葬舊豊德府馬勒潭里坐坤之原公所自占也配貞敬夫人延安李氏判書冕膺女柔嘉靜順六親咸宜後公三年而生前公九年而卒始權厝遷而祔焉擧二男長曰正愚次曰正魯並早歿取族孫熙淳爲長房嗣前叅奉公風姿端凝操履堅確而精英之氣自發於眉彩莊重之儀亦見於談笑若遇事之不可處則雖臨之以 天威怵之以時議斷然有不奪不撓之自守故自少時儕友至于朝廷僚寀之際未敢以匪義相干雖强之莫或得之世以簡亢目公亦不恤也公於文章寧簡毋冗寧澀毋流務洗東人膚率之陋藁非三四易不出也尤長尺牘撒手璣珠絢纈溢目零楮片墨人皆珍惜於詩用工最深而使事精切造語高妙他人學之終不能及公自號斗室著有斗室存稿十六卷始公入內閣也 正廟眷顧特異然譴罰黜降最多於諸寮而或覽公文字則 天笑爲新曰自是罕有之奇才也凡有編摩之役必令公與聞義例雖守制居廬之時亦命在家鑑定每進一編未嘗不稱善焉 純廟初爲忌媢者所困幾不自保而及其周流乎館閣廟堂之列東廳之典故西廳之文學一埤遺公則公亦以追報之義隨事殫瘁知無不爲 上嘗引公前席從容詢時務之急仍命編進萬幾要覽十二卷長置 御案以常目焉公旣久在籌司凡國朝典章錢穀甲兵之事無不摠該本末細心理會每朝有大議卿宰號才諝者未有能出公籌度云公於親有終身僾然之慕常以涵齋公好儲書欲繼其志善本稀種有未及藏弆者多方購之別建屋奉涵齋公遺眞左右列峙編籍每一出納必肅衣冠而後始啓鐍故藏書之多甲於國中而裝池完潔如手未觸公甫二齡失恃及屆周甲之歲雖以禮律所無不敢爲追服之請三疏陳情欲得歸依邱壠而未蒙允許則公大以爲慽布素以終其歲拊愛兩弟如一身而終不以朝家事使之與焉此公內行之篤而平居辨色而起衣帶必飭閫內外穆然如公朝入其室圖書鼎彛魚雅如也視其庭惟淺塘老石花竹森列而已每言利用厚生生民之本於製作也欲其堅緻也非欲其靡也於種植也欲其齊整也非欲其華也是以雖筆硏履屐之末務得其所而賓從僕隸皆隨器而使之故費省而事集役寡而功湊人謂公之門無棄人於此可見公精力之所綜理智思之所周遍也竊想公蘊瑞世之才抱宰物之志須之以黼黻笙鏞託之以鹽梅舟楫則遭逢非不盛矣倚毗非不隆矣然公於 正廟時十載禁近最承恩澤而宣室之詢蓮燭之對契合密勿世固靡得而傳焉逮夫 純廟以後眷注益摯位望漸崇八任兩銓三掌度支於是乎事功先於言議簿書多於著述良有以也且公生平所藉手者唯是 君德聖學之篤 也故爰立之初傾嚮甚至若將有許大建立曾不數年公已狼狽去國其後六七年間朝象世道日益泮渙 上由是思復用公昭晣而敦勉之必致乃已者深察公耆德宿望足以坐鎭而公之顔髮亦減於風霜震撼之餘不復有當世念無日不丏免則公雖欲少施展布得乎寅永晩而登公之堂覿德也淺而公所眷愛期勉實深矣今因叅奉君所託不揆僣妄畧述公系閥踐歷以請節惠之典于太常氏非寅永之言卽惟一世之言也

영의정두실상공휘상규시장(번역문)
조인영(趙寅永) 지음.
공의 휘는 상규요 자는 치교이며 청송심씨이다. 고려조에 위위승을 지낸 휘 홍부가 시조이고 조선조에 들어와 청성백 정안공 휘 덕부는 이태조의 개국을 도와 벼슬이 좌정승이었으며 이로부터 높은 벼슬과 명현(名賢)이 대대로 이어졌다. 휘 유(攸)는 벼슬이 홍문관부제학이요 호가 오탄(梧灘)이며 당세에 문학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공에게 6세조이고 증조의 휘는 성희(聖希)이니 홍문관부제학이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의 휘는 공헌(公獻)이니 성균진사(成均進士)요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휘는 염조이니 예조참판이며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정조대왕의 인증을 받아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에 뽑히어 들어갔으며 호를 함재(涵齋)라 내렸는데 갑자기 별세하므로 재능(才能)을 다 쓰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안동권씨이니 판서 도(導)의 따님이요 계비(繼쯼)는 증정경부인 남양홍씨이니 계초(啓初)의 따님이다. 처음에 권부인이 임신(妊娠)중 꿈에 벼루를 보고 영조 병술년에 공을 낳으니 공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총기(聰記)가 보통사람보다 뛰어나서 책을 보는데 다섯줄씩 내려보아야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다. 함재공이 책 수만권을 모아놓고 하루는 아침 밥을 먹는데 공이 보이지 않으므로 사방을 찾았으나 못찾고 저녁이 되어 집종이 서실(書室)을 지나다가 기침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보니 공이 바야흐로 혼자 단정히 앉아서 책 한권을 손에 들고 아침인지 저녁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널리 모든 책을 구하여 보니 화려한 명성이 여러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함재공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책 모으기를 좋아하는 것은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는 아들이 있어서가 아니니 정기(丁凱:송나라의 서책 수집가)가 정도(丁度)에게 책을 모아준 것에 비교하면 천백분의 일도 안되고 나는 다행히 이 아이가 뒷날 책만 읽고 활용(活用)할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을 바랄 뿐이다.
계묘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나이 겨우 열여덟에 신광사(神光寺)에 가서 지은 시(詩)는 이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칭찬을 받았다. 이해 겨울에 함재공이 황해도의 감영(監營)에서 별세하니 공이 슬퍼한 나머지에도 심정(心情)과 예의를 모두 갖추니 군과 읍의 관리로서 와서 조문한 사람들이 감탄(感歎)하였다. 기유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여러번 기거주(起居注:사관(史官)이 임금의 언행을 기록함)가 되었고 강제문신(講製文臣)에 뽑혔으며 경술에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겸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에 임명되니 임금이 항상 함재공을 생각하였으므로 공에게 그 아름다움을 밟게 하고자 몇달 안되어 작은 일로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에 바꾸어 임명하였으니 임금이 또한 생각하여 자주 승진(昇進)하는 것을 억제하고자 함이었다. 이듬해 봄에 임금이 능원(陵園)으로 가는데 규장각의 벼슬을 그만두고 임금의 수레를 따르게 하였으며 가을에 감시(監試)의 명을 받고 시험이 끝날 무렵에 죄인(罪人)의 자식이 응시(應試)하였으나 시관(試官)이 물리치지 못하였으니 사헌부(司憲府)에 내리어 감시(監試)한 여러 사람의 죄를 다스리고 공도 또한 고성군(高城郡)에 귀양가다가 도착하기 전에 석방되었다. 이해 겨울에 증조모의 상을 당하였고 계축년에 연이어 할머니의 상을 당하였으며 그 사이에 예문관에 들어갔고 또 주서(注書)의 옛 천망(薦望)으로써 육품(6品)에 올랐다. 을묘년 겨울에 할머니의 복(服)을 벗고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니 규장각에 새로 정한 법이 있어 일찍이 규장각의 벼슬을 거친 사람은 홍문관에 기록되지 아니하였어도 바로 홍문관의 벼슬에 나갈 수 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각록(閣錄)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병진년에 검교(檢校)로 차임(差任)되어 이밀(李密)을 잡아다가 조사하고 임금에게 올린 글이 지극히 슬퍼하고 괴롭게 되자 임금이 처음에는 준례(準例)대로 하라고 비답(批答)을 내렸으나 점점 문체(文體)가 불순하였으므로 웅천현감(熊川縣監)으로 쫓겨나서 반년이 못되어 고을의 일로 아전에 대하여 글을 올리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조심하여 시행하라 하였고 명령을 내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가 장령(掌令)겸 남학교수(南學敎授)에 승진되었으며 정사년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에 임명되었고 문신으로써 선전관(宣傳官)을 겸하였다. 임금의 명령을 받아 개성의 화재민(火災民)을 위로하고 돌아와 응교(應敎)가 되었으며 무오년에 임금이 종묘(宗廟)에 세배(歲拜)를 가는데 특별히 공으로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임명하고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여름에 임금이 원자(元子)를 돕기 위하여 유선(諭善) 송환기(宋煥箕)를 맞아들여 그 앞에서 원자에게 조강(朝講)을 하라 하니 강의하는 자리가 오랜 시간이 걸림에 세상에서 성전(盛典)이었다고 말하였다. 이에 또 공으로 부응교(副應敎)에 임명하였다. 공의 중제(仲弟) 부사공(府使公)이 태학(太學)의 집강생(執綱生)으로써 전강(殿講)에 응하지 않자 임금이 성내어 바로 제주목(濟州牧)으로 내쳤다가 가지 않고 그만두게 하였다. 처음에 공이 겨우 어른이 될 나이에 정조가 특별히 불러서 보고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 잘 생긴 것이 저의 아비를 닮았다고 하며 임금 책상의 책을 거두어다가 읽으라하자 공이 읽으니 임금이 듣고 그 소리가 몸보다 더 크다하고 함재공에게 말하기를 너의 집 천리마라하였다. 공의 처음 이름은 상여(象輿)요 자(字)는 가권(可權)이었는데 이날에 임금이 지금 이름으로 바꾸어 지어주고 자도 고쳐 주었으니 오직 임금의 마음이 이미 규장각의 명신(名臣)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었다. 뒤에 임금이 함재공을 용서하는 글을 지어 이르기를 어진 아들을 두었다 하였고 또 태학장의(太學掌議)로써 징계(懲戒)하고 제재(制裁)한 일로 인하여 김포군(金浦郡)에 귀양가니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구제하는 상소문을 올림에 임금이 유고인(有故人)에게 어린 아들이 있다고 교지(敎旨)를 내렸다.
그러나 임금이 공이 영리함으로 꼭 그 재주를 키워 성취시키려고 하였다. 벼슬하기 전부터 글을 읽고 지으며 혹은 성균관에서 혹은 조상의 산소 가까이에서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깊이 탐구(探究)하게 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버리고 실지 있는 것을 힘써 뒷날 크게 쓸 그릇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미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임금의 명을 받아 저작(著作)하는 일을 맡아 조석으로 좌우(左右)에 있게 하여 언제든지 가르치지 않음이 없었다.
겨울에 금위랑(禁衛郞)으로 부르니 응하지 않았고 직각(直閣:규장각의 정3품에서 종6품까지의 벼슬)에 임명되어 달천(達川)에서 성적비(聖跡碑)를 탑본(搨本)한 것을 임금이 친히 받아올 때 모신 공로로 통정의 품계에 올라 형조참의가 되었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겼다. 기미년 봄에 이조참의(吏曹叅議)의 삼망(三望:세 사람의 후보자)을 통하여 새로 천망(薦望)되니 임금이 공의 천망을 귀 기울여 듣다가 바로 명하여 뺏었다가 얼마 안되어 다시 천망을 회복하라고 명하였고 검교와 직각에 차임(差任)하였다. 경신년에 정조대왕이 승하(昇遐)하였고 8월에 비로소 이조참의에 임명되어 묘도(墓道)에 쓰는 임금이 지은 글을 교정(校正)하는데 잘못된 곳이 있다하여 풍덕부(豊德府)에 귀양갔다가 얼마 안되어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선조(先朝)에서 규장각의 신하 대우한 고사(故事)를 들어 국장(國葬)이 임박(臨迫)하였으므로 죄를 풀어주었다.
그전에 김상서(金尙書) 기은(箕殷)이 상소문(上疏文)을 초(抄)하는 문신(文臣)을 뽑는데 재신(宰臣)과 같이 하지 않고 심영석(沈英錫)과 동료(同僚)가 되었으니 대개 그 집이 옛날 신임사화(辛壬士禍)와 관계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거듭 임금의 엄명(嚴命)을 받아 오래동안 제명(除名)되었는데 공이 마침 삼망(三望) 김공향(金公享)을 추천하니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조항존(趙恒存)과 채지영(蔡趾永)의 무리가 번갈아 공을 탄핵(彈劾)하는데 그 말이 망칙(罔測)하여 신유년 봄에 드디어 홍원현(洪原縣)으로 귀양갔다. 겨울에 귀양살이에서 풀어줄 것을 상소(上疏)하여 임술년에 방면(放免)되었고 검교벼슬을 주어 부르니 공이 의(義)를 증거로 들어 나가지 않으니 아패(牙牌:상아로 만든 호패. 이품이상의 문무관이 갖었었음)를 어겼다하여 남원부(南原府)에 귀양보내니 규장각의 준례(準例)에 아패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여 귀양간 즉시 방환(放還)하여 다시 검교에 차임(差任)하니 역마(驛馬)를 타고 왔으므로 기한이 지나 파면되었다. 계해년에 이조(吏曹)에 들어가 굳이 나오지 않으므로 또 파면되었다가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대사간으로 옮겼고 갑자년에 예조, 호조참의겸 춘추관수찬관이 되었으며 정조실록(正祖實錄)을 닦는데 당상관으로써 제일 먼저 뽑혔다.
가을에 대신(大臣)이 임금에게 아뢰어 가선계(嘉善階)에 발탁(拔擢)되어 형조참판겸 동지춘추관사가 되었고 이조참판으로 옮겼다가 또 그만두고 동지경연사를 겸하였으며 비변사(備邊司)로 차임(差任)되니 유사당상(有司堂上)이라 하여 동지중추부사겸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에 임명되었다. 을축년에 전라도관찰사로 나가니 그 때 호남(湖南)의 반쯤이 흉년들었다고 고하자 공이 그 진상을 상소문을 내어 구원(救援)해 줄것을 요청하여 말하기를 신(臣)은 혼자 사사로이 말하겠습니다. 관리(官吏)의 힘은 한(限)이 있는 것이고 임금의 마음은 끝이 없는 것이니 한이 있는 힘으로 말하면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고 세금과 부역(賦役)을 덜어주는 것이 이미 시행한 것보다 더 많으면 안되지만 그러나 전하의 무궁한 마음으로 미르시면 어찌 이 백성으로 하여금 다시 몇만의 곡식을 얻게 하여 구렁에 빠진 백성의 목숨을 구제하고자 아니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즉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병인년에 외직(外職)에서 이조와 예조참판으로 바뀌었고 정묘년에 호조참판이 되어 환찰유사(還察有司)로 영남(嶺南)을 맡아 다스렸으며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차출되었는데 대신(大臣)이 종묘의 일이 많다고 하여 임금께 아뢰므로 보류되었다. 무진년에 부제학에 임명되어 경근(敬勤)과 우로(憂勞)로써 태만(怠慢)과 안일(安逸)을 다스려야 한다고 길게 여러 천마디의 말을 써서 상소(上疏)하니 임금이 비답(批答) 내리기를 경(卿)의 상소는 모두 오늘날의 급선무로 깊이 생각하여 시행하여야한다 하고 상소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써서 궁전(宮殿)의 벽에 부치고 여러 사람에게 보이라고 하니 공의 상소문을 본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가산(賈山:한(漢)나라 영천(穎川)사람, 효문제(孝文帝)때 상주문(上奏文)을 올려 치란(治亂)의 도를 논(論)하되 진(秦)나라의 사실(史實)을 끌어다가 비유하니 이름하여 옥언(玉言)이라 하였음)에 버금가는 좋은 상소문이라 하였다. 뒤에 강연(講筵)에서 경계하는 말을 올리기를 신(臣)이 삼가 보건대 전번에 강(講)한 것을 섣달 이후에 스스로 그치고 한 장의 공부도 하지 않으니 어찌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왕암수(王巖叟:송(宋)나라 청평사람 언관(言官)으로 5년을 지나는 동안 충간(忠諫)을 잘 하였음)가 송철종(宋哲宗:송나라 제7대왕)에게 고하기를 성현(聖賢)의 학문은 언제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름지기 적루(積累:쌓고 또 쌓음)하는데 있고 적루의 요건(要件)은 전념(專念)하고 부지런한데 있으니 다른 좋아하는 것을 물리치고 끊어야만 비로소 전념한 것이 오래가고 게으르지 않을 것이며 비로소 부지런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정숙자(程叔子:이름은 이(頤) 이천(利川)선생 송나라의 유현(儒賢)이었다)가 또한 말하기를 경연(經筵)에서 일하는 사람이 팔짱끼고 묵묵히 앉아 강하는 것을 듣는 여러 신하들에게 책상곁에 서서 두어줄의 글을 해석해주고 물러나니 이와같이 하면 여러해 동안을 한들 무엇이 유익하리오 하였으니 신이 오늘날의 강연을 보건대 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진실로 이와같이 할 뿐이라면 비록 하루에 세번 강한들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먼저 마음을 정하시고 강한 바 경서와 사기를 반드시 심신(心身)으로 본받고 깊이 탐구하고 실마리를 찾아내며 또 반드시 아래 사람에게 묻는것을 부끄러히 여기지 말고 잘 살피며 여러 신하로 하여금 팔짱끼고 묵묵히 앉았다가 물러가지 않도록 하옵소서하니 예문관제학을 겸하게 하고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기사년에 문형권(文衡圈)에 들어가 정경(正卿)에 발탁되고 지중추부사에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8월에 익종(翼宗)대왕이 탄강(誕降)하니 산실청(産室廳)에서 숙직한 공로로 정헌(正憲)의 품계에 올라 예조판서겸 지경연도총관이 되었다. 경오년에 형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호조판서겸 지의금 차주교당상(差舟橋堂上)으로 옮겼다. 원능(元陵)의 능역(陵役)을 감독하여 숭정(崇政)에 올랐고 판의금 지춘추통신사 이정당상(釐正堂上)을 겸하였으며 명온공주(明溫公主)가 탄생하는데 내국로(內局勞)로써 또 숭록(崇祿)에 올라 규장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조금뒤에 전에 천망된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에 임명하니 바야흐로 힘써 사양하였다. 마침내 통신사로 가서 노자를 함부로 낭비한 사람이 죄를 지어 파직되니 공이 여러번 의를 인용하여 사직하였다. 신미년 봄에 혜경궁(惠慶宮:경의왕후)의 병환이 나아 건강이 회복되니 또 숙직한 공로로 보국(輔國)에 승진하고 가선(嘉善)에서 2년이 안되어 1품에 오른것은 근고(近古)에 없던 일이요 관리로서 보국에 임용된 후 감하(減下)되는 예(例)가 되었고 대신(大臣)이 특별히 면직(免職)하지 말라고 요청한 것도 또한 드믄 예였다. 그 사이 대제학과 이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더니 병조판서에 임명되자 평안도지방에 도둑이 일어나 청천강 이북의 고을이 많이 도둑에게 빼앗기니 이 때가 태평한지 오래되어 온 나라가 몹시 흔들림에 서울 감영(監營)의 군사를 내어 토벌하자 이듬해 四월에 도둑이 비로소 평정되었고 비변사(備邊司)에서 하는 일이 매우 번거롭고 급한 것이 많아 시간이 없는데도 공은 응하기를 태연히 보통 무사한 때와 같이 하니 그 때 사람들이 그 시대에 부응(副應)함에 모두 복종하였다. 임신년에 벼슬이 바뀌어 판중추부사겸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에 승진되었고 다시 호조판서가 되었다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임명되었으며 겨울에 동지사(冬至使)로써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계유년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서 다시 이조에 임명하니 또 여러번 상소를 올려 그만두었고 예조, 병조판서로 옮겼고 병자년 혜빈(惠嬪)의 상(喪) 졸곡(卒哭)전에 마땅히 종묘에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공이 헌관(獻官)으로써 상소문을 올려 정종실(正宗室)에서 풍악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을 송(宋)나라의 여정(余靖:송나라의 충간(忠諫)을 잘하는 명신)의 상소문에 옛날에는 재상(宰相)의 상(喪)에서도 오히려 풍악을 폐한 일과 명나라의 의문태자(懿文太子:명나라 태조의 맏아들)의 상에 예부(禮部)와 한원(翰苑)에서 옛 제도를 참고하여 태묘(太廟)의 제사에 풍악은 있지만 쓰지 아니한 일을 인용(引用)하여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물어 졸곡전에 정종실에 강신제(降神祭)를 지내는 것이 더욱 미안하므로 풍악은 모두 폐지하고 대제(大祭)만 지내기로 하였으니 즉 공이 소청(疏請)한 것이었고 애책문(哀冊文:왕이나 왕비의 생전 공덕(功德)을 찬양하는 글)을 지어서 올렸고 주선하는 것은 광주(廣州)와 일을 나누어 하기로 하였다.
무인년에 다시 이조판서에 임명하니 공이 나가지 않고 판서로 임명된 것이 여러번 이었으므로 이때에 전의(前義)를 인용하여 다시 사직소 올린것이 두번, 파직된 것이 두번이었다. 최후에 임금의 엄한 명령이 거듭 내리니 공이 부득이 조정에 나가서 사직소를 내고 그만 두었다. 기묘년에 병조판서에서 평안도관찰사로 나갔고 신사년에 비로소 문형(文衡:대제학)의 추천을 받아 건원능(健元陵) 면봉지문(緬奉誌文)을 지어서 올리니 전의 천망은 예에 어긋난다 하여 지금 권점(圈點)을 받은 것이다. 조금 있다가 원접사(遠接使)로써 조문하러 오는 중국 사신을 맞았다.
임오년에 예조판서가 되고 또 호조로 옮겨 시정(時政)에서 경비를 크게 줄이는 폐단과 대군, 군, 공주, 옹주의 궁전에서 국제(國制)를 초월하여 면세(免稅)하는 것을 제재(制裁)하여 달라고 요청하니 임금이 혜당(惠堂:선혜청제조, 대동당상)과 주당(籌堂:비변사당상)으로 더불어 면세의 대(代)가 끝난 것을 조사하여 세금을 거두라고 명령하니 공이 물러가서 그 사실을 조사하여 올리니 감해진 것이 거의 五천결(結)이나 되었다. 계미년에 수빈(綏嬪) 장례도감당상(葬禮都監堂上)에 차임되어 시호를 청하는 글을 지어 올렸고 또 효의왕후(孝懿王后) 부묘도감(祔廟都監) 당상에 차임되었다. 이 때 개성유수(開城留守)가 세금 천오백결을 감해 달라고 요청함에 공이 경법(經法)을 근거로 불허(不許)하니 조정에서 논의하여 감해주고 풍덕부(豊德府)의 세금도 아울러 감해주자 공이 드디어 인책(引責) 사임하고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갑신년에 검교와 제학에 차임되었고 을유년에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10월에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니 공이 정승의 물망에 오른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처음으로 임명되자 조야(朝野)가 사모하여 우러러 보았다. 처음으로 4천7백여마디의 말이 실린 책자를 내놓았으니 제일 먼저 임금이 백성을 다스리는 도를 논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이 백성을 낳아 임금을 세워 기르니 이것은 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지 임금을 위하여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대를 이은 임금에 있어서는 이 백성은 또 모두 그 조상의 자손을 나에게 부탁하며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부터 성철(聖哲)한 임금은 하늘이 백성을 위하여 임금 세운 것을 알며 천심(天心)이 매우 인자하여 백성 사랑할 줄을 알아 반드시 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기르는 것이니 즉 서전(書傳)에 이른바 오직 하늘은 백성을 사랑하고 임금은 하늘을 받든다고 한것이 이것입니다. 주역(周易) 손익(損益)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반복(反復)하고 근본은 굳게 나라는 편안하게 하는 의에 정성을 다하고 민폐(民弊)를 서울에서 공포(貢布:세금으로 내는 베)의 어려움부터 외읍(外邑)의 빈곤(貧困)하여 고할데 없는 자에 이르기까지 다 진술하여 이르기를 이 백성이 위로 받드는 분은 모두 전하(殿下)이니 백성이 전하 우러러 보기를 천지(天地)와 같이 하고 전하 바라보기를 부모와 같이하나 지금 백성 기르는 것이 이와같이 허술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의 임무가 백성의 일인데 능히 백성을 기르지 못할 뿐아니라 또한 학대하니 그 학대한 것이 비록 내가 한것이 아니라 하시더라도 나의 임무는 백성의 일을 위하는 것이니 그 내가 한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조사하여 살피는 신하도 있고 죄상(罪狀)을 조사하여 탄핵하는 관리도 있으나 그 학대하여도 살피지 않고 탄핵하지 아니하여 꺼릴것 없이 멋대로 나간다면 또한 내가 알고도 놓아준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극히 영특한 사람은 감히 원망하지 않으며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은 감히 원망하니 감히 원망하는 것과 원망하지 않는 것은 저도 모두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진실로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임금의 마음을 분발하시고 힘쓰고 힘쓰시어 어질고 어질지 않은 것을 분별하여 못된 사람을 내쫓고 착한 사람을 올리어 쓰며 공(功)과 죄(罪)를 분명히 가리고 상벌(賞罰)을 진실하게 하여 정대(正大)하고 공정한 마음을 넓혀 편벽되고 그릇된 사람과의 사귐을 끊으며 충직하고 의리를 강명(講明)하는 사람과 친근(親近)하여 몸을 삼가고 크게 깨우치는 것으로 통치(統治)하시고 먼저 궁중의 환첩(宦妾)으로 임금을 좌우에서 모시는 무리로부터 하인(下人), 임금을 호위하는 군대, 추주(趨走:어른이나 존귀한 사람의 앞을 지나갈 때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걸어감)하는 심부름꾼에 이르기까지 모두 충근(忠勤)하고 외신(畏愼)하는 것을 깨닫게 하여 방자하고 월권(越權)하면 반드시 처벌하며 문지기는 내외(內外)의 구분을 엄격하게 지켜 궁궐에 출입할 때 조심하고 지나는데 가린데를 넘겨다 보지 못하게 하여 옛날 오염된 것을 깨끗이 고치고 일체 숙청(肅淸)하면 이것이 기강(紀綱)을 안에 세우는 것이요 다음은 대신(大臣)이 소신(小臣)을 잘 통솔하여 부지런히 일하게 되면 기강을 위에 세우는 것이며 감사(監司)가 출척(黜陟:잘못하는 자를 내쫓고 잘하는 자를 올려씀)할줄 알고 수령(守令:원)이 백성 사랑할 줄을 먼저 하게 되면 기강을 밖에서 세우는 것이고 향당(鄕黨)의 여염(閭閻)집 사람에 이르기까지 각각 분발하여 화목(和睦)하고 효제(孝悌)하면 기강을 아래까지 세우는 것이니 이것은 임금께서 어떻게 분발하느냐에 달렸습니다. 크게 분발하시면 크게 떨치어 정치가 잘 안되는 것이 없을 것이며 보통 분발하시면 보통 기강이 서고 다스려질 것입니다 하니 그 말이 모두 절실하고 저명(著明)하여 그 때의 시정(施政)에 맞았다. 공의 평소 지론(持論)으로 항상 말하기를 평화스러운 세상에서는 백관(百官)이 모든 번잡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기꺼이 처리하니 이것은 자연의 형세이다. 이 때에 헤아리지 않고 크게 빨리 개혁하고 시설코자 하면 구폐(舊弊)가 다시 살아나고 새로운 병폐(病弊)가 도리어 증가할 것이므로 먼저 기강을 세우고 점점 퇴폐 풍속을 고쳐나가는 것만 못하므로 이렇게 긴 글을 쓰는 것이라 하였다.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말하기를 올린 글은 오늘날의 병폐가 아닌 것이 없어 내가 꼭 지켜야할 것이고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 깊이 감탄(感歎)하였으니 내가 비록 덕이 없으나 그릇된 것을 고치기 위하여 조정에 명하여 이것을 베껴 반포하고 강구시행(講究施行)케 하리라 하였다. 병술년에 여러 도(道)에서 귀양살이하는 사람이 많아 주객(主客)이 모두 곤란하므로 풀어줄 것을 요청하자 잡범(雜犯) 이하 석방(釋放)된 자가 수천명이 넘었다. 정해년 二월에 익종(翼宗)대왕이 세자(世子)로 있음에 서무(庶務)를 대리로 보게 되어 원임(原任) 여러 대신(大臣)과 함께 같은 자격으로 마주 대하게 되었다.
공이 성탕(成湯:은(殷)나라 제1대왕)의 일찍부터 큰 덕으로 백성 다스린 것과 문왕(文王)의 밥먹을 겨를없이 부지런히 정사(政事)를 돌본 일을 인용하여 말하였고 또 말하기를 부지런한 일이 힘쓰는 것과 진실한 것이 달라 부지런하되 성실치 못하면 다만 수고로울 뿐이고 번거로울 뿐이니 원하옵건대 세자저하께서는 한 마음으로 소홀히 하지 마시고 성탕과 문왕의 부지런한 것을 본받으시옵소서 하니 비로소 대리로 정사를 돌보라는 비답이 내려 공이 정부(政府)에 있으면서 한결같이 정조대왕 때 대리청정(代理聽政)하던 예에 따라 절목(節目)을 지어 올리자 마침 대사간 임존상(任存常)이 투서(投書)에 터무니 없는 말을 날조하여 죄를 뒤집어 씌우고 심지어 집안일까지 지극히 참혹하게 말하자 세자궁에서 쳐 흔들고 엄하게 물리치며 공이 재앙을 당함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여 특별히 보좌하라고 명령하였는데 마침 또 전라도관찰사 조봉진(曺鳳振)이 갈리어 조정에 돌아와 공이 조정과 세자궁에 폐습을 고치라고한 상소문에 죄가 있다고 하여 대리청정을 반환한다고 청하지 않은 일과 절목을 먼저 결재를 받지 않고 올린 것을 추론(追論)하여 상소문을 올리고 이어서 삼사(三司)에서 번갈아 상소하니 이천부(伊川府)에 귀양보냈다가 十월에 전리(田里)로 내쫓기니 공이 장단(長湍)의 선영아래에서 시골 늙은이들과 농사이야기만 하고 흐린 날이나 개인 날이나 절대 세상일을 말하지 않고 거기에서 일생을 살것같이 하더니 6년이 지나서 임진년에 비로소 중추부에 들어갔다가 이듬해에 다시 우의정 벼슬을 내리니 공이 황송하여 받지 않고 임금의 유지(諭旨)에 봉답(奉答)한 것이 다섯번이요 상소문을 낸것이 세번이었다. 마음이 위축되고 불안하며 스스로 편안하려고 맹세한 것을 갖추어 아뢰니 임금이 자주 재촉하고 더욱 융숭(隆崇)하게 대하고 또 승지에게 명하여 같이 오라고하니 공이 황공하여 나라의 옥리(獄吏)로 임명하여 달라고 하니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백천(白川)군에 귀양보냈다가 열흘이 안되어 풀어주고 그전의 벼슬을 주어 부르는데 정경(正卿:정2품의 벼슬)을 보내어 유지(諭旨: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글)를 계속하여 내리고 별도로 유지를 내려 말하기를 내가 비상한 일이 있다 하고 공을 또 의금부(義禁府)에 임명하고 임금이 들어오기를 재촉하니 공이 감히 다시 말못하고 사사로 나와서 명에 응할 때 사옹원(司甕院)에서 공급(供給)을 줄인 일이 있어 공이 절용(節用)을 숭상하는 도를 아뢰어 말하기를 주부자(朱夫子)가 논어(論語)의 절용애인장(節用愛人章)을 해석하여 말하되 국가의 재용(財用)은 모두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장차 사람을 사랑하려면 반드시 먼저 절용(節用)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 사랑을 한다는 한마디 말이 만세(萬世)에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이며 절용한다는 말 한마디가 만세에 재정을 다스리는 길인 것을 알았으니 제왕(帝王)의 나라 다스리는 도가 여기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절용하지 않으면 비록 꽉 차 있어도 반드시 비우게 되고 능히 절용하면 비록 비었더라도 반드시 차는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비옵건대 유사(有司)에게 타일러 세 조정에서 재용(財用)으로 출입(出入)한 숫자를 살피고 지금과 옛적을 비교하여 파(罷)할 것은 파하고 마땅히 덜어야 할 것은 덜며 그 낭비하는 자는 반드시 그 낭비하는 까닭을 찾아서 막고 그 절약하는 자는 그 절약하는 이유를 찾아서 좇아서 임금의 염려로 더해 주시고 깊은 속마음으로 결단하여 모두가 그 재물을 가볍게 쓰지 않으면 나라의 계책(計策)이 이즈러지지 않고 나라의 근본이 견고(堅固)해져서 그 민생(民生)을 보전(保全)하고 국맥(國脉)을 길이 이으는데 진실로 믿음직할 것이니 대개 백년동안 재산을 쌓아도 낭비하면 부족할 수 있고 하루를 모아도 아끼면 여유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출가(出嫁)하는 일에 대하여 공이 정숙옹주(貞淑翁主)가 출가할 때 특별히 완렴(薍簾:억새로 만든 발)을 하사한 일과 숙휘공주(淑徽公主)가 하가(下嫁)할 때 수상(繡裳:수놓은 치마)입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일을 인용하여 석복유안(惜福遺安:검소하게 생활하여 복을 오래도록 누리도록 함)의 도를 아뢰었고 사치의 폐단을 말하여 비단옷 입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또 궁녀가 절에서 기도하는 폐단과 무당이 성문(城門)에 나오라고 꾀어 속이는 일을 말하여 엄중하게 금단(禁斷)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또 사원(祠院)에서 모람(冒濫:버릇없이 어른에게 덤빔)을 못하게 하시고 공포(貢布:세금으로 내는 베)를 내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고 참으로 맞는 말이고 빈 말이 아니라 하였다. 갑오년에 영의정겸 세손사(世孫師)와 호위대장(扈衛大將)에 승진되었다.
11월에 순조(純祖)가 승하(昇遐)하자 원상(院相:왕이 죽은 뒤 잠시 정무를 행하는 임시벼슬, 왕이 죽은 후 세자가 즉위는 하였으나 상중이므로 졸곡까지의 스무엿새 동안 중망(衆望)이 있는 원로재상급(元老宰相級), 또는 원임자(原任者)가 이것을 맡게 함)의 일을 맡게 되었다. 지금의 임금 즉 헌종(憲宗)이 즉위하자 공이 제일 먼저 기거(起居)를 삼가하는 것, 강학(講學)을 부지런히 하는 것, 궁궐을 엄하게 지키는 것, 행문(倖門:요행의 문)을 막는 것, 민은(民隱:백성의 괴로움)을 살피는 것,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것 등 여섯가지 조항을 반복하여 말하였고 실심(實心) 두 글자로 여섯가지 조항의 대본(大本)을 삼아 힘쓸 것을 말하였다. 을미년에 기사(耆社)에 들어가서 병들었으므로 한가히 있는 것을 빌며 여러번 아뢰었으나 국장(國葬)이 끝난 뒤에 비로소 허락되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임명되었으며 정유년 중전(中殿) 가례(嘉禮:성혼)에 도감(都監) 도제조(都提調)에 차임(差任)되었고 일이 끝난 뒤에 말을 하사받았고 앞서 정승이 되기전에 향역(享役), 숙직, 돈장(敦匠:감독) 찬진문자(撰進文字)와 정조, 순조 익종의 사진을 만들어 올린 공로로 말을 하사받은 것은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고 역임한 관청이 열이고 도제조는 약원(藥院), 묘서(廟署), 금영(禁營), 주원(厨院), 무고(武庫)였다. 무술 6월20일 집에서 돌아갔으니 향년 73이었고 병이 위독하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어 병을 치료하라고 한 것이 두번이요 부음(訃音)이 들리자 조회(朝會)를 철폐하고 부조(賻吊)를 예(例)대로 하였으며 교지(敎旨)내리기를 이 대신(大臣)은 네 임금을 섬긴 원로(元老)요 청아(淸雅)하고 개제(愷悌)한 모습과 단정(端正)하고 방정(方正)한 지조와 나라를 빛낸 문장과 집에 전하는 글씨는 한 조정의 자랑 뿐만 아니다. 정조 때부터 대우가 융숭(隆崇)하여 거듭 심복으로 일을 맡기셨으며 또한 순조대왕이 선왕이 대우한 것을 본받아 영의정에 발탁하였고 나 소자(小子)에 이르러 독실하게 의지하고 믿은 것이 시구(蓍龜:점칠 때 쓰는 시초(蓍草)와 거북)와 같을 뿐만 아니었는데 하물며 원상(院相)으로서 일을 도왔음이리오 일단 나라 위해 애쓴 마음을 어디에서 다시 볼까하고 성복(成服)하는 날에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집에서는 공의 유지(遺志)로써 예장(禮葬)을 사양하니 특별히 탁지부(度支部)에 명하여 장수(葬需)를 넉넉하게 도와주니 애영(哀榮)의 은전(恩典)이 이에 갖추어졌다. 장지(葬地)는 옛 풍덕부마륵담리(豊德府馬勒潭里) 곤좌원(坤坐原)으로 공이 스스로 점쳐 놓은 곳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연안이씨이니 판서 면응(冕膺)의 따님으로 유순(柔順)하고 정숙하여 육친(六親:부모형제처자)이 다 좋다고 하였다. 공보다 三년뒤에 낳았고 九년 먼저 졸하니 처음에는 임시로 묘를 썼다가 이장 합폄하였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장남은 정우(正愚)요 차남은 정로(正魯)로 모두 일찍 졸하여 족손(族孫) 희순(熙淳)을 장남의 사자(嗣子)로 삼았다.
공은 모습이 바르고 엄격하며 지조와 행실이 굳고 확실하며 정영(精英)한 기운이 얼굴에 스스로 나타나고 장중(莊重)한 거동(擧動)이 또한 담소(談笑)하는 중에 나타나서 처리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비록 임금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시의(時議)로써 결단하여 빼앗기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스스로 지킴으로 어렸을 때 친구로부터 조정의 동료에 이르기까지 감히 의가 아니면 간섭하지 못하고 비록 억지를 써도 당할 수 없으니 세상사람들이 대쪽같다 하였으며 공도 또한 근심하지 않았다. 공은 문장에 차라리 간략할 망정 쓸데없는 글을 쓰지 않고 차라리 어렵게 쓸망정 흘리지 아니하여 궁벽한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의 천박한 글의 더러운 곳을 깨끗이 닦아 주는데 힘쓰고 초고(草藁)는 세번 네번 고치지 않고서는 내놓지 않았다. 더욱 편지 쓰는데 능하여 붓을 들면 주옥(珠玉)같이 아름다운 문구가 종이에 가득히 쓰여지니 글씨 쓰는 사람들이 모두 진귀(珍貴)하게 여겨 아꼈다. 시(詩)의 공부도 많이 하여 글 솜씨가 정교(精巧)하고 조예(造詣)가 깊어서 다른 사람은 끝내 따라 갈 수 없었다. 공은 자호(自號)를 두실(斗室)이라 하고 두실존교(斗室存稿) 16권이 있다. 공이 내각(內閣)에 들어가자 정조의 은총(恩寵)이 특이(特異)하였으나 벌(罰)을 받고 귀양간 일도 동료보다 많았으며 혹 공의 문자(文字)를 보면 임금이 웃으면서 이 세상에 드물게 있는 기이(奇異)한 재사(才士)라 하였고 여러가지 편집(編輯)할 일이 있으면 공에게서 의례(義例)를 들으며 비록 상중(喪中)이라도 또한 집에서 감정(鑑定)하라 명하고 한 편(編)을 올릴 때마다 늘 칭찬하였다. 순조조 초에 시기(猜忌)하는 자의 모함(謀陷)으로 거의 편안하지 못하였으나 조정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동청(東廳)의 전고(典故)와 서청(西廳)의 문학(文學) 일체를 공에게 주니 공도 또한 보은(報恩)하는 뜻으로 정성을 다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공에게 앞자리에 오라고 하여 조용히 시무(時務)의 급한 것을 묻고 책을 만들라 하니 만기요람(萬幾要覽) 열두권을 올려 길이 임금의 책상에 놓고 항상 보시라고 하였다. 공이 비변사(備邊司)에 있은지 이미 오래되어 나라의 법칙(法則)과 전곡(錢穀)과 갑병(甲兵)의 일을 모두 관리하지 않음이 없어 본말(本末)을 잘 이해하는 것은 조정에서 대강 경재(卿宰)로서 재지(才智)가 있다고 하는 사람중에서 공보다 계책을 잘 세우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공이 부모에게 애연(僾然:어렴풋한 모양)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 항상 함재공의 책모으기 좋아하는 뜻을 이어받으려고 장서(藏書)하지 못한 좋은 책, 귀한 책을 다방면으로 구입하고 별도로 집을 지어 함재공의 유진(遺眞:사진)을 모셔다가 걸고 좌우에 책을 장서하여 한번 출입할 때마다 반드시 의관을 엄숙히 정제한 뒤에 자물쇠를 열었으므로 장서가 나라안에서 가장 많았고 깨끗하게 보관하여 손대지 않은것 같았다. 공이 겨우 두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회갑(回甲)의 해에 이르러 비록 예법(禮法)과 형률(刑律)로는 감히 하지 못할 것이 없지만 추복(追服:초상 때 못입은 복을 뒷날에 입음)할 것을 세번 소청(疏請)하고 산소에 가서 의지하고자 하는 것을 진정(陳情)하였으나 윤허(允許)를 받지 못하니 공이 크게 슬퍼하여 흰 옷을 입고 그 해를 마쳤으며 두 아우를 어루만지고 사랑하였으나 끝내 조정이야기는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안살림에 독실한 것이요 평거(平居)에 아침 일찍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반드시 집안 일을 보살피니 안팎이 화목하였고 그 방에 들어가면 도서(圖書)와 녹권(錄券)이 아담하게 정돈되었다. 그 뜰을 보면 오직 얕은 연못에 오래된 돌과 꽃, 대나무가 죽 늘어서 있을 뿐이고 항상 말하기를 이용후생(利用厚生:기물의 사용을 편리하게 하고 재물을 풍부히 하여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함)이 백성의 근본이라 하고 제작(製作)하는데 견고(堅固)하고 치밀(緻密)하게 하고자 하고 날림으로 하고자 않으며 씨를 심고 식물을 가꾸는데 정돈하고자 하고 화려하고자 않으니 그러므로 비록 문필(文筆)에 종사하지만 일거일동(一擧一動) 끝일까지 잘 맞고 종들도 모두 그릇에 따라 부리므로 비용은 덜어지고 일은 이루어지고 힘은 적게 들고 효과는 크니 사람들이 공의 집에서 버릴 사람이 없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의 정력(精力)이 주밀(周密)하고 조리(條理)있게 처리하는 것과 지혜와 생각이 두루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도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은 상서로운 세상에 재주를 쌓고 재상(宰相)이 되겠다는 뜻을 품어 보불(黼黻:아름다운 문장)과 생용(笙鏞:관악기와 큰 종)을 기대하였고 염매(鹽梅:임금을 보좌하여 선정을 베풀게 함)와 주집(舟楫:국난을 방어함)을 맡았으니 조봉(遭逢:현신(賢臣)이 명군(明君)을 만남)함이 장하였고 믿고 의지함이 컸다. 그러나 공이 정조 때에는 십년동안 금근(禁近:문학으로 임금을 모시는 신하)으로서 은택(恩澤)을 가장 많이 받았으므로 임금에게 충성하는데 힘썼으나 세상은 그것을 알아서 전하지 못하였더니 순조이후로는 임금의 총우(寵遇)가 극진하였고 벼슬이 점점 높아져서 여덟번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임명되었고 세번 탁지(度支:호조)를 맡았으니 사공(事功)이 언의(言議:이러니 저러니 하는 소문)보다 앞섰고 부서(簿書)가 저술(著述)보다 많았음이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또 공이 평생 도운 것은 오직 임금의 성현의 학문을 두텁게 이행토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처음 벼슬하였을 때 경향(傾向:마음 또는 형세가 한 쪽으로 쏠림)으로 보아 장차 큰 뜻을 세울듯 하더니 몇해가 안되어 공이 낭패를 당하고 나라를 버리고 간 뒤 67년간 나라와 세상의 도의가 날로 더욱 어지러워지니 임금이 이로 말미암아 공을 다시 임용(任用)하여 밝히고 힘쓰게 한 것은 공의 높은 덕과 오래된 명망(名望)이 좌지(坐地:극히 높은 지위)에 족하나 공의 얼굴과 모발(毛髮)이 또한 풍상(風霜)을 겪어서 쇠(衰)한 나머지에 다시는 당세(當世)를 생각하지 않고 날마다 사직(辭職)할 것을 빌었은 즉 공은 비록 조금이나마 포부를 폈다고 하겠다. 인영(寅永)이 늦게서야 공의 당당한 덕을 본지 일천(日淺)하나 공에게 정을 두어 알려고 힘을 쓴 것은 실지 깊었다. 지금 참봉군(叅奉君)의 부탁으로 참람(僭濫)되고 망녕됨을 헤아리지 않고 간략하게 공의 계벌(系閥)과 천력(踐歷)을 써서 태상씨(太常氏:증시(贈諡)를 맡은 관아)에 시호를 신청하니 인영(寅永)의 말이 아니라 즉 한 세상의 말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