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포상공(휘 환지)사적

만포상공 휘 환지 묘소
소재지:경기도 용인시 김양장동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김양장동


議政府領議政諱煥之事蹟
1730(영조 6)~1802(순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휘원(輝元), 호는 만포(晩圃). 교리 태현(泰賢)의 손자, 진(鎭)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부사(府使) 김이복(金履福)의 딸이다. 1771년(영조 47)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주로 삼사의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준엄하고 격렬한 언론을 펴서 의리·공의(公議)를 강조함으로써 몇 차례의 유배생활을 겪었다. 1793년(정조 17)이후 이조참판·규장각제학을 거쳐서 이조·병조·형조의 판서에 임명되었으며, 김종수(金鍾秀)·윤시동(尹蓍東)과 정치적 동지로서 신임의리(辛壬義理)의 고수를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위배되는 남인계열의 채제공(蔡濟恭)·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의 징토(徵討)에 앞장서서 이단배척을 역률(逆律)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소론계의 서명선(徐命善)도 공격하였으므로 이른바 벽파(僻派)의 선봉으로 인정되었다. 윤시동이 죽은 뒤 1798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일파의 영수가 되었다. 다음해에는 무본억말(務本抑末)을 내세워 당시 성행하던 금광(金鑛)의 채굴을 금지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800년(순조 즉위년) 정조의 죽음으로 순조가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고,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첨정(垂簾聽政)하게 되자 영의정에 오르고 원상(院相)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세도를 진정시킬 것을 자임하였으나, 실제로는 당동벌이(黨同伐異)에 주력하여 반대파 인물들을 크게 살육하였으니, 이 사건이 곧 신유사옥이다. 그는 정조가 탕평책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던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였고, 김구주(金龜柱)와의 절친하였던 관계를 생각하여 김관주(金觀柱)·정일환(鄭日煥)을 등용, 그들의 사적인 원한이 정국에 개제되게 하였고, 권유(權裕)를 대사헌으로 임명하여, 정조의 처지를 지지하던 김조순(金祖淳)에 대한 공격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죽은 뒤, 곧 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육한 죄와,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대혼(大婚)을 방해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관작이 삭탈되었다. 그는 철저한 노론계 당인으로 인정되고 있어서, 그의 치적은 볼만한 것이 없으나, 다만 죽을 때까지 검소한 생활을 한 점에서 칭찬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