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곡서원

松谷書院重修記
松谷在永山之陰遠近章甫論黨塾輒稱松谷豈非以其賢哉故泰齋柳先生 太宗朝罹文罔編管西原尋量移是郡郡之西山窈而勢阻中焉而廓其有容先生就是谷卜而居之日與門弟子講學不輟由是道遂以南蔚爲嶺海所推宗景泰庚辰旅軒張先生謂先生言行非後人可及謀所以尸祝値兵燹未果 肅宗壬午廟宇始成筵臣白 上而表奬之宣號賜田一如白鹿故事粤若警齋郭先生之盡倫善道大田李先生之夸節卓行聾巖李先生之守正不撓石門尹先生之揚庭孚號彬蔚踵起時異道同此其大略而惟我先祖晩沙先生見幾危邦盡節明時與諸賢前後 美炳若日星且永鄕警齋大田之柔梓而大田學問本之泰齋自聾巖曁我先祖以至石門文翁遺化又在斯郡仁聲所著久而彌遠以次陞享合而 侑一堂六賢隣德不孤焄蒿悽愴歷屢世而洋洋如在其遺風善行可肅鄙薄抑亦斯文之幸歟敦永適尹東京道朝陽祗謁廟貌粗伸羹墻之慕旋東而齋齋爲風雨所圮事巨力綿未遑重建嗚呼李相國㙫卽我先祖宅相也曁孫溵及瀰三節是道於本院事相繼補弊猶懼不逮况以本宗後裔見棟宇傾頹詎不怵然于中圖所以新之者乎於是與一二有司鳩工修擧典祀故廳廢而復理是豈小子淺誠所能及也實諸先生及我先君子所賜也夫
崇禎後四庚戌孟冬 晩沙相公五代孫 敦永 謹識

송곡서원중수기(번역문)
송곡은 영산(永山)①의 북쪽에 있다. 원근(遠近)의 유자(儒者)들이 모여 논하는 글방인데 문득 송곡이라 칭한 것은 어찌 그 어짐 때문이 아니겠는가? 예전에 태재(泰齋)② 유방선(柳方善) 선생이 태종(太宗) 때에 문망(文網)③에 걸려 서원(西原)④에 편관(編管)⑤ 되었다가 이 고을에 이배(移配)되었다. 고을의 서산(西山)은 그윽하고 산세가 막혀 있으나 중간이 트이여 공간이 있다. 선생이 이 골짜기에 나아가 집을 정하고 살았다. 매일 문하의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여 그침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도(道)가 마침내 남쪽에 드높아져서 삼남(三南)의 사람들이 높이고 존경하였다. 경진년(庚辰年:西紀 1580年)⑥에 여헌(旅軒)⑦ 장현광(張顯光) 선생이 선생의 언행(言行)은 후인들이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하고 이 때문에 제사를 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마침 병란(兵亂)을 만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숙종(肅宗) 임오년(壬午年:1702)에 묘당(廟堂)을 처음 세우고 경연(經筵)의 신하들이 아뢰어 이를 표창하게 하여 호(號)와 밭을 내리고 한결같이 백록서원(白鹿書院)의 옛일과 같게 하였다. 이에 경재(警齋)⑧ 곽순(郭珣) 선생의 빼어난 윤리와 선한 도의(道義), 대전(大田)⑨ 이보흠(李甫欽) 선생의 높은 절개와 행실, 농암(聾巖)⑩ 이현보(李賢寶) 선생의 정도(正道)를 지키어 흔들림이 없음, 석문(石門)⑪ 윤봉오(尹鳳五) 선생의 조정에 떨친 신임 등이 성대하게 이어져 내려오며 시절은 달라도 함께 걸어 온 길(道)은 같았으니 그것이 대략일 뿐이다.
우리 선조 만사(晩沙) 선생은 위태로운 나라에 충절을 다하여 밝은 시절의 여러 현자(賢者)들과 더불어 전후로 해와 별처럼 아름답고 빛이 났다. 또 영천(永川)은 경재 선생의 고향이요, 대전 선생은 학문이 태재 선생을 근본으로 하였으며, 농암 선생과 우리 선조에서 부터 석문 선생에 이르기까지 주자(朱子)의 교화를 받은 것이 또한 이 고을에 남아 있다. 어진 명성이 드러난 바가 오래 될수록 더욱 멀리 퍼져 차례로 제향하고 합쳐서 제사를 올렸다. 당(堂) 하나에 여섯 현자(賢者)가 있으니 덕(德)이 외롭지 아니할 것이라. 제사를 올리고 슬퍼하며,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도 뚜렷하게 그 유풍(遺風)과 선행(善行)이 있는듯 하여, 부박(浮薄)한 풍속을 숙정(肅整)하여 왔으니, 이는 우리 유학(儒學)의 행운이라 할 것이다.
돈영(敦永)이 경주의 부사가 되어 와서 조양(朝陽)을 지나면서 사당에 배알하고 추모(追慕)의 뜻을 올린 다음, 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재실(齋室)이 비바람에 무너졌는데 일이 크나 힘이 약해 중건(重建)할 겨를이 없었다. 오호라, 상국(相國) 이집(李)⑫은 곧 우리 선조의 외손(外孫)이요, 그 손자 은(溵)과 미(瀰)와 함께 이 도(道)의 관찰사를 지냈으며, 본 서원의 일에 서로 이어 피폐한 것을 고치려 하였으나, 오히려 힘이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하물며 본 종족(宗族)의 후예가 무너진 기둥을 보고 어찌 슬픈 마음으로 새롭게 하고자 하지 않겠는가? 이에 한 두 관리와 모여 수리를 하고 제사를 오렸으며, 옛날 청(廳)은 부서져 다시 고쳤다. 이것이 어찌 소자(小子)의 얕은 정성이 미칠 수 있는 바이리요? 실로 여러 선생들과 우리 선군(先君)께서 내리신 바이리라.
숭정(崇禎) 후 네 번째 경술년(庚戌年:1850) 초겨울에 만사공의 오대손 돈영이 삼가 쓴다.

註① 영산(永山):경북 영천의 옛 이름.
② 태재(泰齋):유방선(柳方善):조선조 초기의 문신. 태재(泰齋)는 그의 호이다.
③ 문망(文網):법망(法網).
④ 서원(西原):청주(淸州)의 옛 이름.
⑤ 편관(編管):죄를 얻은 관리가 지방의 호적에 편입되어 감시를 받던 형벌. 여기서는 유배를 가리킨다.
⑥ 경진년(庚辰年):원문에 『경태(景泰) 경진』이라 하였으나, 경태 연간에는 경진년이 없으며, 장현광의 생애와 전혀 맞지 않다. 만력(萬曆) 연간인 1590년으로 보인다.
⑦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조선조 중기의 문신. 여헌(旅軒)은 그의 호로, 학문과 도학에 뛰어났다.
⑧ 경재(警齋) 곽순(郭珣):조선조 중기의 문신.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걸려 장살되었다.
⑨ 대전(大田) 이보흠(李甫欽):조선조 초기의 문신. 유방선의 문인으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살해되었다.
⑩ 농암(聾巖) 이현보(李賢寶):조선조 중기의 문신.
⑪ 석문(石門) 윤봉오(尹鳳五):조선조 후기의 문신.
⑫ 이집(李):조선조 후기의 문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