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당공(휘 통원)

만취당공 휘 통원 묘소(향토문화재 제16호)
소재지: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이곡리


신도비 번역비

만취당공 신도비


약도 소재지: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이곡리


有明朝鮮國沈相公晩翠堂神道碑
子嘉善大夫前漢城府右尹兼五衛都摠府
副摠管訓鍊院都正鐳     哭撰
庶子奉正大夫觀象監叅奉 푮 篆
孫     幼     學     克明書
公諱通源字士容靑松府人始祖高麗文林郞諱洪孚玄祖諱德符門下侍中靑城伯本朝開運仍授伯爵高祖諱溫曾祖諱澮連三世致位政丞祖諱湲左贊成父諱順門領議政公生於弘治己未九月十九日幼失怙寄養于祖母李氏之家稍長母夫人口授孝經小學開蒙旣長與兄連源達源逢源受業於外舅申公援學問日就遂與諸兄聞名於世遊於慕齋金公安國之門正德己卯中生員試居泮宮信於儒林嘉靖丁酉擢文科壯元丙午捷重試歷任成均典籍禮曹佐郞戶曹正郞侍講院司書奉常寺正順天府使 擢拜弘文副應敎移授司憲府掌令弘文應敎典翰直提學兵曹叅知大司諫承政院左承旨慶尙道觀察使禮曹叅判大司憲戶曹叅判刑曹叅判吏曹叅判漢城判尹工曹判書禮曹判書吏曹判書議政府左右贊成右議政左議政歲己丑以兄弟相繼台鼎門戶大成連四日伏閤乞遷移拜領中樞府事得遂釋負之志隆慶丁卯爲當道者所忌罷歸田里公禀性寬裕溫厚無疾言遽色嘗於當官處事頗嚴密守法僚佐咸服其柔中有剛也平生處身不儉不奢衣食居處隨其所遇而爲之無矯激文飾過情求名之事待人接物益興和氣其市恩意於賤者一皆善遇恩者之喜而怨者咸化只圖書花石隻琴孤鶴爲三字缺悌慊悶孝悌盡心當時之時伯氏領議政連源仲氏判閣達源先逝獨兄同知逢源氏在世友于之情老而愈篤無日不十七字缺奉七字缺歷長五曹不踰三字缺入政府務存大體人服其德量家食之一字缺四十三字缺夫人李氏德林君諱孜之女定陽君諱淳之孫女臨瀛大君諱璆之曾孫女也 贈貞敬夫人夫人早逝三字缺大夫人申氏二字缺世終我以無方夫人敬承無違一字缺盡神道門闌咸贊服以爲兩美必合誠不誣矣生四男二女二字缺錪次五字缺己酉武科漢城右尹次鈜副護軍次鏵中戊午進士女長適都摠府都事李璜次適知禮縣監尙耆孫四字缺鎰六字缺司別坐次鈁觀象監叅奉女長適宗室昌城副守銘次適族親衛李文賓次幼右尹娶縣監李壅之女無嗣以進士鏵之長子克明繼后副護軍娶監察奉誼之女生二女長適宣傳官裵興立次適幼學李啓元進士娶司成李秣之女生三子長卽克明次宗明次彦明知禮生一女適幼學洪選鎰娶洛陽守之女生一男三女男復明女皆幼鈁娶觀象監正鄭純裒之女生二男一女長哲明次文明女幼夫人生於弘治壬戌三月二十四日卒於嘉靖辛丑三月初七日享年四十同年十月初二日葬于抱川屹山梨荳里岵子坐午向之原公於隆慶壬申七月初八日病卒于東郊別墅享年七十有四用是年九月初七日合葬于夫人之墓以遂遼意焉嗚呼以子記父母之事誠甚未安古人間或有之者鐳明舍弟俱亡身獨存焉丁憂以來纏疾伏忱長在於愈之忘無足若未記事後裔不識哭撰世系以遺後考萬曆三年乙亥秋  立

유명조선국심상공만취당신도비(번역문)
공의 휘는 통원(通源)이요, 자는 사용(士容)이고, 관향(貫鄕)은 청송(靑松)이다.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문림랑(文林郞)이며 휘는 홍부(洪孚)요, 현조(玄祖)의 휘는 덕부(德符)니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조선개국 후 청성백(靑城伯)을 봉(封)하고, 고조(高祖)의 휘는 온(溫)이요, 증조(曾祖)의 휘는 회(澮)니 삼대를 연(連)하여 정승(政丞)이 되었고, 조(祖)의 휘는 원(湲)이니 좌찬성(左贊成)이요, 부(父)의 휘는 순문(順門)이니 증영의정(贈領議政)이다. 연산(燕山) 5년(己未:1499) 9월19일에 생(生)하다. 어려서 부친(父親)을 잃고 조모이씨댁(祖母李氏宅)에서 자라면서 모부인(母夫人)에게 효경소학(孝經小學)을 배워 개몽(開蒙)하고, 성장후 형(兄)인 연원(連源), 달원(達源), 봉원(逢源)과 함께 외숙 신공원(外叔 申公援)에게 수업(受業)하여 학문(學問)이 날로 진보(進步)되므로 드디어 형(兄)들과 함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으며 다시 모재 김공안국(慕齋 金公安國)의 문하(門下)에서 유학(遊學)하여 중종(中宗) 14년(己卯:1519)에 생원진사(生員進士)에 합격(合格)하여 성균관(成均館)에서 기거(起居)할 때 유림(儒林)의 신망(信望)이 두터웠다.
중종(中宗) 32년(丁酉:1537)에 문과장원(文科壯元)에 급제(及第)하고 명종원년(明宗元年:1546) 병오(丙午)년에 중시(重試)에 합격(合格)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예조좌랑(禮曹佐郞), 호조정랑(戶曹正郞),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봉상시정(奉常寺正), 순천부사(順天府使) 등직(等職)을 역임(歷任)하고 홍문관(弘文館) 부응교(副應敎)로 발탁(拔擢)된 후 이어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 병조참지(兵曹叅知), 대사간(大司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예조참판(禮曹叅判), 대사헌(大司憲), 호(戶), 형(刑), 이조참판(吏曹叅判), 한성판윤(漢城判尹), 공(工), 예(禮), 이조판서(吏曹判書), 의정부(議政府) 좌우찬성(左右贊成),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을 차례로 제수(除授)하다. 기축(己丑)년에 이르러서는 형제가 서로 계속(繼續)하여 정승지위(政丞地位)에 올라 집안이 지나치게 영화(榮華)로움을 염려(念慮)하여 연사일간복합(連四日間伏閤)하여 한직(閒職)으로 겸퇴(謙退)하기를 빌어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이배(移拜)되어 큰 책임(責任)을 면(免)하는 뜻을 이루었다. 명종(明宗) 22년(丁卯:1567)에는 당도자(當道者)의 끌리는 바가 되어 전리(田里)에 파귀(罷歸)하다. 공은 천성(天性)이 너그럽고 온후(溫厚)하여 질언거색(疾言遽色)이 없더니 일찍이 관(官)에 임(臨)하여 일을 처리(處理)함에는 자못 엄밀(嚴密)히 법을 지키니 동료(同僚)와 부하(部下)들이 다 그 부드러움 속에 강(强)함이 있음에 복종하더라. 평생의 처신(處身)은 인색지도 않고 사치(奢侈)도 아니하여 의식(衣食)과 거처(居處)는 그 경우(境遇)에 따라 할 뿐이요, 고의(故意)로 허문(虛文)을 꾸미며 명예(名譽)를 구(求)하는 일이 없고 사람을 대(對)하고 만물을 접(接)함에 있어서는 더욱 화(和)한 기분(氣分)을 일으켜서 그 사의(思意)를 천(賤)한 자에게까지 베푸는데 한결같이 잘 대우(待遇)하니 은혜(恩惠)를 입은 자는 기쁨을 알고 원망(怨望)하던 사람까지 모두 감화(感化)하였다. 다만 문필(文筆)과 화초(花草)로 벗을 삼고 효제(孝悌)의 도(道)에 진심(盡心)하였다. 이 때에 백씨영의정(伯氏領議政) 연원(連源)과 중씨판각(仲氏判閣) 달원(達源)은 먼저 별세(別世)하고 형 봉원(逢源)씨가 홀로 재세(在世)하니 우애(友愛)의 정(情)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敦篤)하였다. 어느날이고 서로 만나 지정(至情)을 논(論)하지 아니함이 없고 오조(五曹)의 장(長)을 역임(歷任)하되 규구(規矩)에 넘지 아니하여 정부(政府)에 들어가서는 힘써 대체(大體)를 주장(主張)하니 사람이 그 덕량(德量)에 감탄(感歎)하였다. 부인이씨(夫人李氏)는 종실덕림군(宗室德林君) 휘 자(孜)의 여(女)요, 정양공(定陽公) 휘 순(淳)의 손녀(孫女)며 임영대군(臨瀛大君) 휘 구(璆)의 증손녀(曾孫女)이다. 부인(夫人)이 조서(早逝)함에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증직(贈職)하였다. 대부인 신씨(大夫人申氏)를 섬김에 구고(舅姑)와 군자(君子)를 섬기는 도리(道理)에 조금도 어김이 없어 문중에서 탄복(歎服)하여 말하기를 고부(姑婦)의 아름다운 덕(德)이 반드시 합하였으니 진실한 것이다 하였다. 四남二녀를 두었으니 장남(長男)은 전(錪)이요, 차남(次男)은 뇌(鐳) 기유무과(己酉武科)에 급제(及第)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고, 차남(次男)은 횡(鈜)이니 부호군(副護軍)이요, 차남(次男)은 화(鏵)니 무오진사(戊午進士)이고, 장녀는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이황(李璜)에게 출가(出嫁)하고 차녀는 지례현감(知禮縣監) 상기손(尙耆孫)에게 출가(出嫁)하였다. 측실소생(側室所生) 장남(長男) 일(鎰)은 별좌(別坐)요, 차남(次男) 방(鈁)은 관상감참봉(觀象監叅奉)이요, 장녀(長女)는 종실창성부수명(宗室昌城副守銘)에게 출가(出嫁)하고, 차녀(次女)는 족친위(族親衛) 이문빈(李文賓)에게 출가(出嫁)하고 다음은 어리다. 우윤(右尹)은 현감 이옹(李壅)의 딸을 취(娶)했으나 무육(無育)으로 진사(進士) 화(鏵)의 장자극명(長子克明)으로 계후(繼后)하고, 부호군(副護軍)은 감찰봉의(監察奉誼)의 딸을 취(娶)하여 2녀를 두니 장녀는 선전관(宣傳官) 배흥립(裵興立)의 처(妻)요, 차녀는 유학(幼學) 이계원(李啓元)의 처(妻)이다. 진사(進士)는 사성이말(司成李쬿)의 딸과 결혼하여 3남을 두니 장남(長男)은 곧 극명(克明)이요, 차남은 종명(宗明)이고, 차남은 언명(彦明)이다. 지례(知禮)는 1녀를 두니 유학(幼學) 홍선(洪選)에게 출가(出嫁)하고, 일(鎰)은 종실낙양수(宗室洛陽守)의 딸과 결혼하여 1남3녀를 두니 아들은 복명(復明)이요, 딸은 다 어리다. 방(푮)은 관상감정(觀象監正) 정순부(鄭純쯖)의 딸과 결혼하여 2남1녀를 두니 장남(長男)은 철명(哲明)이요, 차남(次男)은 문명(文明)이고, 딸은 어리다. 부인(夫人)은 연산(燕山) 8년(壬戌:1502) 3월24일에 나서 중종(中宗) 36년(辛丑:1541) 3월 초7일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40이며, 동년(同年) 10월 초2일에 포천(抱川) 흘산면(屹山面) 이동두리(梨洞豆里) 점산록자좌오향(店山麓子坐午向)에 장(葬)하다. 공은 선조(宣祖) 5년(壬申:1572) 7월 초8일에 서울 동교별장(東郊別莊)에서 병졸(病卒)하니 향년(享年)이 74세이고, 동년(同年) 9월 초7일에 부인(夫人) 묘소(墓所)에 합장(合葬)하여 용(龍)의 먼 뜻을 이루었다.
슬프다! 자식으로서 부모(父母)의 일을 기록(記錄)하는 것이 진실로 심(甚)히 미안(未安)하나 옛사람도 혹(或) 행(行)한 자가 있거니와 뇌(鐳)와 극명(克明)의 사제(舍弟)가 이미 죽고 이몸이 홀로 남아 대고(大故)를 당한 이래 병(病)으로 쓰러져 다스리기 어려운 지경에 있으므로 만일 사실을 기록하지 못하면 후예(後裔)가 알지 못할 것이므로 울며 세계(世系)만 기록하여 후일의 참고(參考)를 남기노라.

만력(萬曆) 3년, 선조(宣祖) 8년(乙亥:1575) 가을에 세움.


沈通源先生 墓 및 神道碑(심통원선생 묘 및 신도비)案內板

  鄕土文化財 第16號
京畿道 抱川郡 蘇屹面 梨谷里 42

沈通源(1539~1572) 先生은 朝鮮中期의 문신(文臣)으로 字는 사용(士容) 號는 만취당(晩翠堂), 욱재(勗齋) 本貫은 靑松 順門의 아들이며 영의정(領議政) 연원(連源)의 아우이다. 中宗32年(153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 明宗1年(1546) 문과중시(文科重試)에 丙科로 及第한 뒤 右承旨 左承旨 慶尙道觀察使를 歷任했다. 이어 예조참판대사헌형조참판한성부판윤우의정(禮曹叅判大司憲刑曹叅判漢城府判尹右議政)을 거쳐 明宗19年(1564) 左議政에 올랐다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듬해 王의 외척(外戚)으로 尹元衡等과 함께 權力을 남용(濫用)했다는 彈劾을 받고 辭職 선조(宣祖)가 卽位하던 1567年 官職을 삭탈당(削奪當)했다. 墓는 贈貞敬夫人完山李氏와 합장(合葬)되어 있고 호석이 둘러진 墓앞에는 새로 建立된 묘비(墓碑)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장명등 그리고 左右에는 망주석(望柱石) 文人石等이 各各 配置되어 있다. 墓所 右側에는 1979年 5月에 새로 建立한 神道碑가 있는데 비신(碑身)의 石材는 대리석이다.
墓域은 264㎡(80坪) 봉분(封墳)의 높이는 1,5m 둘레는 4,8m이다. 한편 墓所에서 約 100m 떨어진 도로변(道路邊)에는 宣祖8年(1575)에 建立된 본래(本來)의 신도비(神道碑)가 位置해 있다. 神道碑는 정교(精巧)하게 造作된 이수(쬞首)와 구부(龜趺)를 갖추었으며 材料는 대리석이다. 그러나 碑文은 마멸(磨滅)이 심(甚)한데다 여러군데에 걸쳐 탄흔(彈痕)을 입고 있어 판독(判讀)하기 어려운 상태(狀態)이며 3개의 통대석위에 座定된 구부(龜趺)의 두상(頭象)도 많이 닳아서 原形을 잃어가고 있다.
神道碑는 높이 207㎝ 幅 102㎝ 두께 32㎝의 규모(規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