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루

만세루(문화재자료 제72호)
소재지: 경북 청송군 청송읍 덕리(보광산)


현판글씨

추모재(만세루 부속건물)

萬歲樓重修記
嗚呼此吾鼻祖文林郞公墓祭閣也吾沈之得姓今爲四百餘載而幽先潛德受天報施永垂後世得備各族而近來世閥之衰替子孫之單鮮比諸方興末艾之時不啻如芝草之萎根醴泉之閼脉世閥子孫之興衰尙如此况墓閣之創久而亦安得無頹廢者乎閣之頹圮近尤甚焉爲他人所咨嗟者久矣棟雨宇風有剝落之嘆酒香牲潔無陳判之所於是乎吾宗數人基一敬周慨然有志於重修之一事書而告之面而言之凡三徃反不憚其勞其爲先尊祖誠有大過人者矣吾族祖煥永氏節度使而來莅不肖遠悅知府事而來守距靑非甚遠而其他皆蔚也時各有待意敢或忽吾族祖先出廩餘以仰助之 不 肖 繼聚俸餘以敬助之各五千文實一萬文也何足以爲修茸之萬一而凡人輒稱官享則墓閣享先之所也以玆官廩奉而助之亦一官享重咠墓閣也耶財旣不足事難施停吾諸宗無竆無達散在四方道里甚遠徃覆不便叱皆關之誠一欠焉墓下子孫百餘家皆是貧窶不辭醵收而添助之吾沈之衰甚亦可知也已是役也燔瓦而盖之易柱而新之不日成之告厥丕績是豈非吾宗之大慶大幸也乎至若俎豆之器祭祀之田必有傷廢者而後之吾宗之在藩梱州牧者其能有意於斯否嗚呼墓下諸宗履霜露而攀松栢者皆必有凄然쾩然之思而瞻望墓閣輪奐改觀則益不禁肯堂之懷也非但吾宗之相率而相賀也抑亦行旅樵牧之所指点而皆知有吾鼻祖墓閣之補獘興廢亦有其時也則豈不盛哉豈不美哉昔范文正公置義田而賙恤宗族至今傳爲盛事而從今以徃我諸宗得有享先之齋廬則其視義田輕重果何如也吾宗數人請余小子記其事而此亦先事也顧此不文辭不獲已而又有區區一言者乎吾諸宗瞻依先隴而深寓桑榟敬止之義墓閣之漏者修之墓廬之頹者扶之以爲修毁修補之道則後之見豈至於今之甚者乎吾諸宗勗之哉勉之

哉歲在丙辰秋七月二十二代孫通訓大夫行蔚山都護府使遠悅謹記


만세루(萬歲樓)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2호

이 건물은 조선조(朝鮮朝) 세종대왕(世宗大王)(1418~1450, 재위)이 부사 하담(府使 河澹)에게 명하여 건립한 昭憲王后(1395~1446)의 친가 청송심씨묘제각(靑松沈氏墓祭閣)이다. 이 누각의 뒤편 보광산(보광산)에 있는 청송심씨 선조 묘소에 제사때 비가 오면 이 누각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누각(重層樓閣)으로 목조와가(木造瓦家) 맞배지붕이다.

만세루 안내문

 
만세루중수기(번역문)
아아 이 누는 우리 시조 문림랑공의 묘제각(墓祭閣)이다. 우리 심씨가 성(姓)을 얻은지 지금 사백여년에 조상의 빛나는 음덕(蔭德)이 길게 후세에 드리워져서 나라안에서 명족(名族)이 되었으나 근래 문벌(門閥)의 쇠퇴(衰頹)함과 자손의 고단(孤單)함이 한창 성(盛)하였을 때만 못할 뿐만 아니라 지초(芝草)가 자라지 못하고 예천(醴泉)이 말라서 문벌자손의 흥쇠(興衰)가 이와 같은데 하물며 묘각(墓閣)을 지은지 오래되었으니 또한 어찌 허물어지지 않겠는가 묘각 무너진 것이 근래 더욱 심해지자 다른 사람들이 한탄한지 오래이다. 서까래가 비바람에 무너지고 제사지낼 곳이 없어지니 이에 우리 일가 몇 사람 기일(基一) 경주(敬周)가 개연(慨然)히 중수(重修)하는 일에 뜻을 두어 편지를 써서 알리고 만나서 말하기를 세번 반복하였으나 그 노고(勞苦)를 끓이지 않고 조상을 위하고 숭상한 것이 진실로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게 나았다. 나의 족조(族祖) 환영(煥永)씨가 절도사(節度使)로 부임하여 오고 불초(不肖) 원열(遠悅)이 울산부사로 부임하였으니 청송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고 이때 각각 기대하는 뜻을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나의 족조가 먼저 녹봉(祿俸)의 나머지를 내어 부조하고 불초가 이어서 봉급의 나머지를 내어 부조하니 각각 오천문(五千文)으로 실은 일만문(一萬文)이나 어찌 족히 보수(補修)하는데 만분의 일이나 되리오마는 보통사람이 향관(享官:제관)이라 하면 묘각 제사지내는 곳에서 이 벼슬아치가 녹봉으로 부조하였으니 또한 향관으로서 묘각을 보수하는데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재정이 이미 부족하고 일이 어려워서 중도에 그만두게 될것 같으며 우리 모든 일가들이 산지사방에 살아 길이 매우 멀고 왕복하기가 불편하여 모두 정성을 드리지 못하는 것이 하나의 흠점이다. 묘소 아래 자손 백여집은 모두 가난하나 돈내는 데는 사양하지 않고 부조에 보태니 우리 심씨가 매우 쇠퇴하였다는 것을 알겠도다. 지붕에 개와를 덮고 기둥을 갈아 새롭게 하는데 몇일 걸리지 않고 완성하는 큰 일을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 일가의 큰 경사가 아니리오 제기(祭器)와 제전(祭田)같은 것은 반드시 상하거나 없어진 뒤에 우리 일가로서 감사(監司) 군수가 능히 여기에 뜻을 가질 것이로다. 아아 묘소아래 여러 일가들의 서리와 이슬을 밟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어루만진 사람은 모두 반드시 처량하고 슬프게 생각하고 묘각이 날아갈 듯 크고 아름답게 면모가 일신된 것을 보면 더욱 조상의 유업(遺業) 계술(繼述)할 것을 생각할 것이다. 다만 우리 일가들만이 서로 축하할 것이 아니라 또한 지나가는 나그네가 초동(樵童) 목동(牧童)도 손가락으로 가르치고 우리의 시조의 묘각을 제 때에 보수하였다고 할 것이니 어찌 성대(盛大)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옛날 범문정공(范文正公)이 의전(義田)을 만들고 일가들을 구제하였다고 지금까지 성사(盛事)라고 전하여지고 있는데 지금부터는 우리 일가들도 조상 제사지내는 제각이 있으니 그 의전을 보는 것과 경중(輕重)이 어떠할 것인가 우리 일가 두어 사람이 나에게 그 일을 쓰라고 하니 이것 또한 조상 위한 일이지만 글을 할줄 모르므로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부득이 한마디 말을 쓰니 다음과 같다. 우리 일가들이 조상의 묘를 살피고 고향을 생각하여 묘각의 허술한 것을 고치고 묘막의 무너진 것을 수리하였으니 뒤에 무너진다해도 어찌 지금처럼 심할 것인가 우리 일가들은 힘쓰고 힘쓸지어다.

병진년7월 22대손 통훈대부 행울산도호부사 원열이 삼가 지음


萬歲樓重修記
高麗文林郞靑己君沈公諱洪孚之幽宅在府治西普光山坐辛之原世所稱沈陵是也山之下有萬歲樓樓卽祭閣也四時芬苾之日若遇風雨而不便於墓所周旋則望奠于此樓與府內讚慶樓名雖殊而義則一也公以湥仁厚德韞而不發報施之天眷顧于來裔沙麓之慶宅相之成華于一家三聖后之克纘坤位八大君之篤誠祝祖攷諸徃牒罕見比類盖其積累之蔭流于來百不可量也朝家之軫念逈出椒房之親追崇恩典無有餘憾竪而黽焉表德業封四山焉植松栢命兩刹焉謹守護旣又建祭閣焉以備不虞扁之以萬歲者表異乎凡常丘瀧之齋也顧名思義豈不重且遠矣乎哉刱建以來四百年之間隨圮修葺每以朝令知府奉行焉屋社以後其保守之責全歸於後孫之架漏而藉官庇已屬先天古事撫念今昔甄氏思亭之記晋代新亭之淚千古同感來幾而又有白虎變難各自奔竄守護不能勢也摧圮剝落風雨割其隅鳥鼠棲其內迺於丁未秋享之餕席峻發重修之論輪告于京鄕各派莫不讚同而樂爲之赴經費與材資出自山中而用之不足殘額各派分擔起工於戊申春斷工於翌年夏棟楹仍舊貫丹堊用新制缺者補之朽者改之餘工耶及追慕齋亦一新而奐輪旣乃登樓而望焉則山之崒嵂者益秀麗水之矯夭者益澄淸雲物改觀草木增彩是豈非舊而新之之賜耶噫國朝五百年戚里家丘瀧之制徃徃僭踰而幾與陵寢埓矣及其衰也數畝圭田尙不能守若敖之餒因之况念及於祭閣之頹圮乎今公之後昆棊布全國其麗不億移孝爲忠爲國柱石克紹前烈不墜先業不惟守之又能新之今之舊卽昔之新今之新乃後之舊也詩曰周雖舊邦其命維新以今日新之之心貽厥孫謨雲雲仍仍勿替引之則扁楣之義於是乎名實相符矣奚但今日之新而已哉是以爲記

辛亥黃花節 前 敬陵叅奉 李晩佐 記


만세루중수기(번역문)
고려 문림랑 청기군(靑己君) 휘(諱) 홍부(洪孚)의 산소가 청송부의 서쪽 보광산 신좌원(辛坐原)에 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심능(沈陵)이다. 산 아래에 만세루(萬歲樓)가 있으니 즉 제각(祭閣)이요 네계절 제사지내는 날에 만약 비가 와서 묘소에서 주선하기가 불편하면 이 누와 부(府)안에 있는 찬경루에서 행사(行祀)하였으니 이름은 다르나 뜻은 한가지이다. 공이 인자(仁慈)하고 후덕(厚德)하였으나 은혜를 받지 못하였더니 하늘이 돌보아 후손에게 왕비를 탄생하는 경사를 내려서 한 집안에서 세 왕비가 나시고 팔대군(八代君)이 나셨으니 타성씨(他姓氏)로서는 비교할 수 없는 경사이며 대개 쌓고 쌓은 음덕(蔭德)이 후손에게 미친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라에서 진념(軫念:임금이 마음을 써서 근심함)하는 것이 왕비의 친정에게까지 이르러 추숭(追崇)하는 은전에 유감이 없었고 비석을 세워 표덕(表德)을 새기고 사방의 산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으며 두 절에 명령하여 수호하게 하고 또 제각을 지어 뜻밖에 생기는 변에 대비하였으며 만세(萬歲)라고 현판(懸板)한 것은 보통 무덤의 재실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니 명예를 돌아다 보고 의를 생각하면 어찌 중대하지 아니하리오 창건(創建)이래로 사백년 동안에 무너지면 고치는 것을 나라에서 부사(府使)에게 명령하여 봉행(奉行)하였으나 세상이 변천(變遷)된 뒤로는 보수(保守)하는 책임이 모두 후손의 부담으로 돌아왔으니 관(官)의 도움을 받는것이 옛날 일이 되었다. 생각컨대 옛날 견씨(甄氏)의 사정기(思亭記) 진대(晉代)의 신정루(新亭淚)와 천고(千古)의 동감(同感)이요 얼마 안되어 또 백호(白虎:서쪽)의 변난(變難)이 있었으므로 각자 도망가고 숨고하여 수호를 하지 못하였음은 형편때문이었다. 누가 오래되어 바람과 비의 피해도 있었고 새와 쥐의 파손도 있었다. 이에 정미년 가을 제사를 지내고 나서 중수(重修)할 것을 발론(發論)하여 경향(京鄕)의 각파에 통고하니 찬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자금(資金)을 모으고 부족한 금액은 각파에서 분담(分擔)하여 무신년 봄에 기공(起工)하고 이듬해 여름에 준공(竣工)하니 마룻대와 기둥은 옛것대로 고치고 단청(丹靑)을 하여 새롭게 하였으며 모자란 것은 보충하고 썩은 것은 고치니 모양이 한결같이 새로워져 아름답고 장대(壯大)하였다. 이내 누에 올라가 바라보니 산은 더욱 수려(秀麗)하고 물은 더욱 맑으며 경관(景觀)이 새롭게 바뀌고 초목(草木)이 채색(彩色)을 더하니 이것이 어찌 오래되면 새롭게 고치는 것이 아니리오 아아 이조오백년에 임금의 외척(外戚)의 무덤제도가 이따금 참월(僭越)하여 거의 능침(陵寢)과 같았는데 그 쇠퇴(衰頹)하게 되면 두어이랑의 밭두둑도 지키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제각이 넘어짐을 생각함이리오 지금 공의 후손이 전국에 퍼져 그 수가 많으니 효도를 충성으로 옮기고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어 조상의 업을 이어받아 떨어뜨리지 말고 지킬 뿐만 아니라 또 새롭게 한다면 지금은 오래되었으나 예전에는 새로웠고 지금은 새로우나 뒤에는 오래된 것이 되리라 시전(詩傳)에 말하기를 주나라가 비록 오래되었으나 그 명(命)은 오직 새롭다 하였으니 지금 새롭게 하는 마음을 후손에게 전하여 자자손손(子子孫孫)이 쇠퇴하지 않으면 간판에 만세루라 써서 건 것이 명실상부(名實相符)할 것이니 어찌 다만 오늘만 새롭게할 뿐이겠는가 이에 기(記)를 쓴다.

신해년 9월에 전 경능참봉 이만좌가 지음


萬歲樓重修記後叙
夫物本乎天人本乎祖物之本天自有隨時生成之理則人之本祖安得無原始追報之道乎今我鼻祖文林郞公祭閣之創始不知在幾何年而閣五架各二間合十五間額其楣曰萬歲樓以爲四節供享之所而曁寓子孫景仰之意矣歲月深遠樓宇頹圮棟朽而傾瓦敗而漏顚覆之患迫在朝暮而永無擔夯修葺之人此實子孫風宵慨嘆于心者也于斯時也吾宗丈遠悅氏適莅于蔚府煥永氏亦按梱是郡不肖基一與族人敬周徃謁兩宗丈詳言墓閣之頹圮則府使宗丈惻然而答曰吾則奉承天見閱歷郡邑休歇無暇省掃未易不審先墓所在之鄕而又未知墓閣之依舊無恙與否也今聞子之言則豈無悽愴怵惕之感懷也哉乃與梱任宗丈拔例啇確各出五十緍銅實百緍以是爲重修主創物力而一遵府使宗丈指揮大辦重修措劃及其朽敗處則革易之痕鑿處則磨礱之補而葺之於焉改觀繼又府使宗丈繡柱與篆額幷以扁楣軆勢偉赫樓宇更新嗚呼吾諸宗中從前按梱作牧者何根而擧皆因循退託終無一言以及於墓閣之興廢也今何幸得梱任府使兩宗丈以新久廢之樓追述鼻祖之德一以寓先隴敬止之義一以誠後來追慕之誠揭之于樓上凡我雲仍登斯樓讀是記者自不禁油然之孝思而可知其墓閣之廢亦有時興亦有時也至若環山之檜栢滿谷之蒲葦鬱乎蒼蒼永保我鼻祖裕後之遺址而其釜斤之不相侵牛羊之不從牧惟在子孫守護之勤不勤賢不肖之如何耳嗚呼諸宗可不勉哉可不欽哉與之同事者憲周体鎭弘周述文永謨諸員幷列于叙以示贊助志慶之不忘云歲在丙辰秋八月下澣十八代孫基一謹叙

만세루중수기후서(번역문)
대저 물건은 하늘에 근본하고 사람은 조상에 근본하나니 물건의 근본인 하늘이 때에 따라 스스로 생성(生成)하는 이치가 있으니 사람의 근본인 조상에게 어찌 처음부터 보본(報本)하는 길이 없겠는가 지금 우리 시조 문림랑공 제각(祭閣)의 창시(創始)가 어느 해였는지는 알지 못하나 종(縱) 오가(五架) 횡(橫) 삼가(三架) 15칸 구조로 만세루(萬歲樓)라 이름지어 네 계절에 제사지내고 자손들의 경앙심(景仰心)을 붙인 곳이다. 세월이 오래되고 누의 서까래가 썩고 개와가 깨져서 넘어질 염려가 조석(朝夕)에 있으나 담당하여 수리할 사람이 없으니 진실로 자손으로서 개탄(慨歎)하여 마지 않는 바이다. 이 때에 우리 종장(宗丈) 원열(遠悅)씨가 마침 울산부사(蔚山府使)로 부임하고 환영(煥永)씨가 또한 이 고을을 검찰(檢察)하게 되자 불초(不肖) 기일(基一)이 족인(族人) 경주(敬周)와 더불어 두 종장을 찾아뵙고 묘각이 무너진 이야기를 자세히 말한즉 부사종장께서 슬퍼하며 대답하기를 나는 임금의 은전(恩典)을 입어 각 고을살이를 하므로 공무에 바빠 성묘하는 일도 오래동안 궐하였고 묘각의 의구여부(依舊如否)도 몰랐으나 지금 자네의 말을 들으니 처량하고 슬프며 두려움을 금할 수 없다하고 곧 감사종장과 상의하여 은동(銀銅) 꾸러미 50씩 백꾸러미를 수보(修補)하는 자금(資金)으로 부사종장의 총지휘에 따라 부패한 곳은 바꾸고 오손(汚損)된 곳은 고쳐서 몇일 안되어 웅위(雄偉)한 장관(壯觀)을 보게 되었다. 이어서 부사종장이 중수기문(重修記文)을 쓰고 전자(篆字)로 쓴 간판을 달으니 누의 면목이 일신(一新)되었다. 아아! 우리 종중에서 종전에 감사와 군수를 지낸 분들은 거개가 이러한 일을 하지 못하였고 머뭇거리다가 물러나서 끝내 묘각의 흥폐(興廢)에 대해서는 한만디의 언급(言及)이 없었는데 지금 다행히 감사 부사 두 종장이 오래된 누를 새롭게 만들고 시조의 덕을 사모하고 선조(先祖)를 공경하는 의(義)를 붙여 한결같이 후손들에게 정성을 다하게 하여 기문(記文)을 누에 걸어 놓으면 우리 자손들로서 이 누에 올라 이 기문을 읽으면 효도하는 생각이 구름일듯 일어날 것이며 그 묘각이 폐(廢)하는 것도 때가 있고 흥(興)하는 것도 때가 있음을 알겠도다. 온 산을 두른 잣나무와 골짜기에 가득한 갈대와 부들이 울창하여 우리 시조의 후손에게 전한 유지(遺址)를 길이 보존하고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고 소와 염소를 산에 놓아 먹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직 자손들이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과 어질고 어리석은 것에 달려 있다. 아아 여러 일가들은 가히 힘쓰지 않을 것이며 가히 공경하지 않은손가 같이 일한 사람은 헌주(憲周) 체진(쯜鎭) 홍주(弘周) 술문(述文) 영모(永謨) 여러분을 아울러 같이 써서 경하하는 뜻을 표한다.

병진8월 하순에 18대손 기일 삼가 씀


萬歲樓揭板詩
家君作宰本府二載贍護先塋今將辭歸不勝追遠之懷口占短律以寓微悰盖我昭憲仁順兩聖母遣中使植栢使本官守護四時香火則本府戶長傳授祭田而奉使故下聯及之
普光奇氣尙煌煌 祥叶關睢重任姒 兩朝雨露山多栢 盛德至今因何識
吾祖文林此地藏 連綿雲裔半巖廊 長吏蘋藻歲薦香 邑人遺慕已千霜

丁未季冬下澣 十六代孫 通訓大夫行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 聖希 拜稿


만세루게판시(번역문)
아버지께서 청송부사로 부임하시어 二년동안 근무하시면서 선영(先塋)을 수호(守護)하고 지금 그만두고 돌아가게 되니 사모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짧은 율시(律詩)을 짓고 미성(微誠)을 표(表)하였다. 대개 우리 소헌 인순 두 왕비께서 궁중 내시를 보내어 잣나무를 심고 청송부사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고 四시의 제사는 본부(本府) 호장(戶長)이 제전(祭田)을 경작(耕作)하여 제수(祭需)를 차리게 하였고 율시는 아래와 같다.
보광산의 기이(奇異)한 기운은 항상 빛나니 우리 시조 문림랑공의 산소가 여기일세
상서로움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와 왕비같은 덕있는 왕비 나셨고 자손들의 높은 벼슬 끊이지 않았네
두 조정의 은전으로 산에는 잣나무가 많고 호장이 정성드려 제수를 장만하였네
성덕(盛德)은 지금까지 무엇으로 인하여 알게 되었던가 고을사람들의 사모함이 천년에 이르겠네.

정미년12월 하순에 16대손 통훈대부행예문관검열겸춘추관기사관 성희가 공손히 씀


境內寺刹守護兩墓事蹟(小流亭文集中)
山之謂周房古而沈之系靑松遠矣夫周房周王之窟房之房是靑松之山也靑松靑華之陵松而松是沈氏之鄕也沈之先曰文林郞公公之後曰安孝公載誕聖母一曰昭憲是生大君八公主二玉葉金枝衍我朝鮮億萬年無疆之休猗歟盛哉京室之初追感報本之孝乃命禮官誌石植栢以廣守護之典以山下普光寺屬之齋僧又以山東周房寺屬之中臺守護且遣屯田使打量得本府餘結別成二冊子付之該府司以奉四時禮享之着又劃付一結八十卜以贍供奉之備其於孝思永言矣繼以二出國母曰仁順曰端懿尤增守護之節以境內普賢山雙溪寺兜率菴屬普光大遯山內院菴雲水菴屬周房凡靑松之名山勝地古刹諸寺莫非兩墓之護內而一草木一水石合是沈氏之精采則周房山水之衣被文林聲光若是其明且詳矣是以識之如右

丙申九月 日 誠之 謹稿


경내사찰수호양묘사적(소류정문집중)(번역문)
산이름을 주방(周房)이라 함과 심씨의 관향이 청송인 것은 오래전 옛일이고 주방이라 함은 주나라 왕이 피하여 숨은 굴방(窟房)을 모방하여 일컬은 것이다. 청송에서는 이름난 산이요 청송이라는 고을이름도 청화(靑華)한 능송(陵松)을 표현한 것이니 심씨의 본래 관향이다. 심씨의 선세에 문림공이 있었고 그 후손 안효공이 왕비를 탄생하였으니 즉 소헌왕후로 팔대군(8代君)과 이공주(二公主)를 탄생하여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조선 억만년의 무궁한 기틀이 되었으니 거룩하도다. 경실초(京室初)에 보본(報本)의 효성을 추감(追感)하여 예관(禮官)을 파견하고 묘소에는 석물(石物)을 갖추고 산에는 잣나무를 심어 수호하였고 산 아래에 있는 보광사(普光寺)는 재실(齋室) 수호하는데 예속시키고 산동쪽에 있는 주방사(周房寺)는 중대산(中臺山)을 수호하게 하고 또한 둔전사(屯田使)를 보내어 측량(測量)하고 책자를 만들어 그 부사(府司)에 주고 네 계절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또 일결팔십복(一結八十卜)을 별도로 넉넉하게 주었으니 그 효도하는 생각이 길었도다. 이어서 인순 단의 두 왕비가 탄생하시어 수호하는 절차를 더하였으며 경내(境內) 보현산(普賢山) 쌍계사(雙溪寺) 두솔암(兜率菴)을 보광사(普光寺)에 속하게 하고 대둔산(大遯山) 내원암(內院菴) 운수암(雲水菴)은 주방사(周房寺)에 속하게 하니 청송의 명산(名山) 승지(勝地) 고찰(古刹)등은 두 묘의 수호안에 들지 않음이 없고 하나의 초목(草木)과 하나의 수석(水石)도 모두 심씨의 정채(精采)이니 주방산에 있는 산수(山水)가 문림공의 성광(聲光)임이 이와같이 밝고 자상하므로 위와같이 기록한다.
      

병신년9월 성지가 삼가 지음


讚慶萬歲兩祭閣重修有感 - 孫 星澤
吾祖英靈陟降樓巍然相望幾春秋明月淸風來照處浮雲綠水會朝頭頹傾多日憐誠薄修復有時感淚流光先振後無竆業正氣山南未盡收

宿載合謀復此樓扶持惟祝億千秋紛華巧盡羣工手突兀誠深後裔頭罔極君恩楣上碧無疆士筆板中流世世登臨嘗礿日悅親情誼正難收
又 - 後孫 相乙
多賀賃員各遵期依然屹立古江湄千秋楣篆前王感兩節蘋藻古禮思鷰賀語流春暮日翬飛詩唱月明時於噫萬歲無竆祝將使孱孫永慕知
又 - 後孫 相餕
修戢斯樓好會期巍然依舊立江湄京鄕均是輸誠意繩墨亦同盡孝思雨露風霜如見地蒸嘗礿祀妥安時才微忱薄叨叅任事不稱情自愧知
又 - 後孫 相八
合謀修補自昨秋蕫工不日是各樓普光松栢千年色幕洞風煙百代州畵閣飛甍城堵口盤龍踞虎水廻頭登樓幻作仙家子入目祥禎總攬牧
又 - 後孫 相縉
肯構有榮此二樓滄桑浩劫閱幾秋甍瓦剝落千丸跡風雨灑磨四壁頭孱孫合力成功易大祖英靈蔭澤流舊制維新輪奐處山川增色興難收

찬경만세 두제각 중수에 느낌이 있어서 - 후손 성택
우리 조상의 영령(英靈)이 내려왔다 올라갔다하는 누가 높이 솟아 마주 바라본지 몇해이던가 명월(明月) 청풍(淸風)이 와서 비치는 곳이요 뜬 구름과 푸른 물이 모이는 머리일세 무너진지 오래되니 가엾은 적도 있었고 수복(修復)을 제때에 하니 감격하여 눈물 흘렸네 조상을 빛내고 후손이 떨치는 것은 무궁한 일이나 정기(正氣)를 산남(山南)에서 거두지 못하였네.
또 읊음
여러해동안 계획하여 이 누를 수복(修復)하였으니 오래도록 부지(扶持)할 것을 빌었네 화려하고 공교로운 것은 여러 공인(工人)들의 솜씨요 우뚝하게 세운 것은 후손들의 정성일세 끝없는 임금의 은혜는 하해와 같았고 무궁한 선비들의 글씨가 판에 쓰여 걸렸네 대대로 높은 곳에 올라가 호소하니 부모를 잘 섬기는 정의는 정히 거두기 어렵네.
또 읊음 - 후손 상을
하례하는 임원(賃員)이 각각 기일을 지켜 의연(依然)히 우뚝 옛 강가에 섰네 천추(千秋)의 간판글씨에 임금의 은혜 느꼈고 양 명절 제사 때에는 옛 예절을 생각하였네 제비는 저무는 봄날에 하례하고 화려한 누에서 달밝은 밤에 시조를 불렀네 아아 만세루를 영원히 축하하니 장차 후손들로 하여금 영구히 사모하게 함일세.
또 읊음 - 후손 상준
이 누를 좋은 시절에 보수하니 높다랗게 예대로 강가에 서있네 경향(京鄕)이 고루 정성을 다하였고 먹줄 치는 것도 또한 효도생각을 다하였네 우로(雨露)와 풍상(風霜)에도 보는것 같고 계절따라 제사지내니 마음이 편안하네 재주가 없고 정성이 박하여 맡은 바에 힘썼으나 일이 정도에 맞지 아니하여 스스로 부끄럽기만 하네.
또 읊음 - 후손 상팔
수보(修補)하기로 합의한 것은 작년 가을이었고 얼마안되어 준공하였으니 이 명루(名樓)일세 보광산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천년의 빛이요 월막동의 바람과 연기는 백대(百代)가 되었네 그림같은 누각은 성루(城樓)와 같이 웅장(雄壯)하고 용이 서린것 같고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은 것같은 곳으로 물이 돌아 흐르네 누에 올라 선가(仙家)의 아들이 된것처럼 환상(幻想)하니 눈에 들어오는 상서로움이 모두 잡히네.
또 읊음 - 후손 상진
빛나는 이 두 누를 짓고 변천하는 세상이 얼마나 지났던가 개와가 부서졌으니 천개의 탄환(彈丸)을 맞은것 같고 비와 바람으로 갈린 것은 사방의 벽일세 후손이 힘을 합하여 공사를 끝냈고 조상의 영령(英靈) 음택(蔭澤)이 흘렀네 옛것을 새롭게 하여 크고 아름답게 하니 산천(山川) 빛을 더하여 흥겨움을 거둘 수 없네.

普光追慕齋開基祝文
維歲次己酉七月戊申朔二十八日乙亥幼學沈能沂敢昭告于后土之神伏以中黃正位八柱分支羅列崗巒上應星箕茫堪下土徃徃置碁以至大東普有光夷鬱彼松栢文林積蕤尸祝玆麓樓高萬斯齋庖未成禮享無儀降季慈仍慨歎先時廼營經紀僉同詢諮是斷是度于謀匠師玆涓吉日徂何宜沙門顚廢重拓新基仍貫舊制收拾桷榱擧事靡懈不日營之地靈人謀叶筮從龜風棟雨宇抛樑歌兒於千萬年靈庶祐其謹以酒果用伸虔告謹告

보광추모재개기축문(번역문)
유세차 기유 7월 무신삭 28일 을해에 유학(幼學) 심능기(沈能沂)는 후토(后土)의 신에게 고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중앙 토성(土星)이 정위치(正位置)에 있고 팔주(八柱:大地를 떠받치고 있다는 여덟개의 기둥 崑崙山 아래에 있다함)의 가지가 갈라져 구산(丘山)에 나열(羅列)되어 위로는 별이 되고 아래로는 흙이 되어 이따금 바둑알처럼 흩어져서 우리나라의 보광산에 이르렀으니 저 울창한 송백(松栢)이여 문림공의 산소로다. 이 묘 앞에서 제사지내고 누에서 산소바라보고 행사(行祀)도 하였도다. 재실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예향(禮享) 의식(儀式)이 없도다. 후손들이 선시(先時)를 개탄(慨歎)하여 곧 재실을 지려하니 여러 일가들의 의견이 일치되었도다. 이에 결단하여 설계하고 장인(匠人) 좋은 날 택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도다. 집은 어떻게 짓는 것이 마땅할까 절이 무너졌도다. 다시 새 터를 잡아 옛 제도 적용하였도다. 서까래를 갈고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니 얼마 안되어 일이 끝났도다. 땅이 신령하니 사람도 꾀를 내어 신묘(神妙)한 점 쳐보았도다. 비 바람에도 기둥과 서까래 온전하며 들보를 올리고 노래부르니 천만년이 되도록 영(靈)이여 도와주소서 삼가 주과(酒果)를 갖추어 공손히 고하고 삼가 고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