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학공(휘 세정)행장

부제학공 휘 세정 묘소
소재지: 김포시 대곶면 오니산리(도장골)

묘 비 석


公諱世鼎字重叔姓沈氏籍靑松以高麗文林郞衛尉寺丞諱洪孚爲鼻祖四傳而有諱德符入 本朝錄 開國元勳封靑城伯左政丞諡定安生諱溫領議政 世宗國舅靑川府院君諡安孝生諱澮領議政策翊戴佐理二勳靑松府院君諡恭肅生諱瀚左尹策佐理勳靑川君諡夷敬繼諱順徑左尹 中宗丙寅策靖國勳靑城君諡胡襄生諱興源進士繼諱鐩郡守 贈戶曹判書生諱友信僉正 宣廟壬辰起復倡義晉州殉節錄宣武原從勳 贈兵曹參判寔公之祖考生諱詡壬辰禍後杜門自修身廢科朝廷有調用之 命因不仕再上疏斥國家與倭通和 贈吏曹參判以公之貴也妣 贈貞夫人羅州丁氏監司胤佑之女也公 皇明萬曆庚戌八月二十五日生 仁祖癸酉增廣中生員試辛巳庭試文科薦入承政院注書癸未拜禮文館奉敎甲申參寧國原從勳是年十二月丁內憂丁亥復闋再入堂後時政講義記注常敏 上顧視奬許復拜奉敎例陞成均典籍戊子移禮曹佐郞己丑移兵曹佐郞拜司諫院正言移拜世子侍講院司書又移正言別差接慰官赴東萊庚寅腹命移兵佐又移正言拜兵曹正郞移正言以病陳疏遞辛卯陞司憲府掌令以避嬚遞付護軍壬辰移弼善 命海西繡衣陞司諫院司諫轉執義以 恩譴侍 命金吾叙拜輔德因講陳勉誠悃懇至 上嘉納之癸巳除平安都事甲午入弘文館副修撰副校理每因召對屢陳節財用袪奢侈養士氣立紀綱爲邦本 上亦溫喩特差瀋陽問安書狀官又以冬至陳賀書狀官赴燕乙未除直講司禮司僕寺正丙申陞應敎丁酉兼中學敎授 顯宗初年己亥除副應敎庚子西叙副司直尋移修撰兼 孝宗大王實錄都監都廳拜應敎移副應敎辛丑陞通政階以修實錄勞也西叙副護軍兼五衛將移僉中樞壬寅除同副承旨尋陞右副左副出牧海州癸卯遞歸轉僉知差延慰使赴定州甲辰移兵曹參知尋轉本曹參議移掌隸院判決事出尹慶州乙巳還朝丙午參議刑禮兩曹移左承旨除曹司五衛將尋除驪州牧使旋遞成均館大司成吏曹參議弘文館副提學堂晶慶尙監司皆公淸顯之職也公以 顯宗戊申八月二十三日卒享年五十九歲窆于通津府大坡面五尼山亥坐之原公自髫齕文藝夙就平居好讀書不喜著述性且儉約家無妾媵屢典州牧庫無私財孝友敦睦一門和悅公釋褐前丁外憂與伯氏翰林公相依不離及翰林公未展所蘊而早卒公殆至滅性久而回甦配羅州朴氏縣監垓之女封貞夫人庚戌生乙丑二月一日卒壽七十六墓쯊公之墓左有二男一女長男思泓應敎次男思澂蔭奉事女適縣監李喜夏思泓男漢紀 贈吏曹參判漢緯監役思澂男漢維女韓禹相洪叙禹姜世溥韓聖時李喜夏繼子善恒女兪命舜徐宗大朴弼鼎內外曾玄衆不可記嗚呼公之沒今二百有餘年矣公歷事三朝際遇特重寔出於講筵陳勉而盖其盛德懿行可以爲法於後人者必不止此年代旣遠文獻難考生卒官職謹 撰如右以俟後之立言君子云爾

歲丙辰十二月 日
九代傍孫 嘉善大夫 前行秘書院丞 啓澤 謹撰


13세조 부제학공 휘 세정행장
公의 휘는 세정(世鼎) 字는 중숙(重叔)이시며 姓은 沈氏요 본관(本貫)은 靑松이다. 高麗朝에서 문림랑위위시승(文林郞衛尉寺丞)이신 휘 홍부(洪孚)께서 始祖로 되시고 四代를 지나 휘 덕부(德符)가 李朝에서 개국원훈(開國元勳)으로 좌정승청성백(左政丞靑城伯)에 봉군(封君)되시고 시호(諡號)를 정안(定安)으로 받으셨으며 그 子이신 휘 온(諱 溫)은 領議政에 이르시고 世宗大王의 국구(國舅)가 되시므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諡號를 안효(安孝)로 받으셨으며 그 子이신 휘 회(澮)는 영의정 익대좌리훈이등(領議政翊戴佐理勳二等)으로 策定되시고 靑松府院君에 諡號는 공숙(恭肅)으로 받으셨으며 그 子이신 휘 한(瀚)은 좌윤 좌리공신(左尹佐理功臣)으로 策定되시고 靑川君에 시호를 이경(夷敬)으로 받으셨으며 그 繼子이신 휘 순경(順徑)은 좌윤(左尹)으로 계시다가 中宗大王丙寅年에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策定되시고 靑城君에 시호를 호양(胡襄)으로 받으셨으며 그 子이신 휘 흥원(興源)은 進士이시고 그 繼子이신 휘 수(鐩)는 郡守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이시며 그 子이신 휘 우신(友信)은 첨정(僉正)으로 계시는바 宣祖大王때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그 모친상중(母親喪中)임에도 除服하시고 義兵을 모집하여 진주성(晉州城)을 수비(守備)하시다가 순국(殉國)하시어서 선무원종훈공신(宣武原從勳功臣)으로 주녹(奏錄)되시고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贈職되시었으니 이 분이 바로 公의 祖考이시며 그 子이신 諱 후(詡)는 壬辰倭亂後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시고 學問과 德行만을 自修하시며 과거(科擧)에는 不應할 뿐 아니라 朝廷에서 관직에 나오라고 命함에도 이내 不仕하시고 도리어 재차상소(再次上疏)하시기를 國家에서 倭와 通和를 배척(排斥)하시었으나 後日에 吏曹參判으로 贈職된 것은 公(副提學公을 말함)의 高貴한 職品에 의하여 追贈됨이다.
비증정부인나주정씨(妣贈貞夫人羅州丁氏)는 監司인 윤우(胤佑)씨의 女이시다. 公은 明나라 萬曆(神宗帝의 年號) 庚戌(1610:朝鮮朝光海君2年) 8月25日生이시니 仁祖癸酉(1633)年에 增廣(나라에서 慶事가 있을 때 施行하던 科擧) 生員試에 及第하시고 辛巳(1641)年에 庭試(增廣의 別試로 대궐 안에서 行하던 科擧) 文科에 及第하시어 승정원주서(承政院主書)에 遷任되셨으며 癸未(1643)年에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로 甲申(1644)年에는 寧國原從勳(仁祖 22年事件)에 參與하셨다. 이해 12月에 母親喪을 當하셨다가 丁亥(1647)年에 탈상후(脫喪後) 다시 復職하시고 時政을 講義하는 자리에서 紀錄하는 것이 매우 민첩(敏捷)함으로 上이 돌아다 보시고 칭찬하시며 奉敎의 職을 제수하시고 規例에 따라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올려 주셨으며 戊子(1648)年에는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移職 己丑(1649)年에는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移職하셨고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拜命한 후 世子侍講院司書로 이직하였다가 다시 正言으로 이직하셨으며 별차(別差:日本語 통역관) 접위관(接慰官)으로 동래(東萊)에 부임하셨다. 庚寅(1650)年에 다시 兵曹佐郞으로 또 正言으로 옮기셨다가 병조정랑을 拜命하고 다시 正言으로 移任中에 身病으로 인하여 上疏하고 체임(遞任)하셨다. 辛卯(1651)年에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昇進되시었으나 혐의받을까를 피하여 호군(護軍)으로 직무를 바꾸었다가 壬辰(1652)年에 필선(弼善)으로 이직하셨고 黃海道御使로 拜命한 후 司諫으로 昇進하셨다가 執義로 轉任中에 王의 견책(譴責)으로 의금부(義禁府)에서 대명(待命)하였으나 의외로 輔德에 선임되셨으니 이는 강논(講論)과 진술(陳述)이 지극히 誠實하고 간곡(懇曲)함으로 因하여 上이 가상(嘉尙)하시고 용납(容納)하심에 이른 것이다. 癸巳(1653)年에는 평안도사(平安都事)를 제수하시고 甲午(1654)年에는 弘文館에 들어 가시어 부수찬부교리(副修撰副校理)로 일하시던 중 어전(御前)에 입시(入侍)할 때마다 여러번 아뢰기를 모든 財政을 節約하고 사치(奢侈)를 禁戒하고 兵士의 勇氣를 배양하며 政事의 기강(紀綱)을 세움으로 나라의 根本이 됩니다 하고 주달(奏達)하니 上이 또한 온화(溫和)한 안색으로 동조(同調)하시는 말씀을 하시다. 그 후 만주심양(滿洲 瀋陽)에 문안(問安:丙子胡亂에 의하여 소현세자(昭顯世子)가 人質로 잡혀 있을 때)하는 書狀官으로 特採되어 가셨고 또 冬至에 陳賀書狀官으로 北京에 가셨다.
乙未(1655)年에는 직강(直講) 사예사복시정(司藝司僕寺正)을 除授되시고 丙申(1656)年에는 應敎로 昇進하시고 丁酉(1657)年에는 中學敎授를 兼하시다.
顯宗初年己亥(1659)年에 副應敎로 除授되시었고 庚子(1660)年에는 西班(武班) 벼슬인 副司直에 任命되었다가 推薦에 依하여 수찬겸 효종대왕실록도감 도청(修撰兼 孝宗大王實錄都監 都廳)에 옮기셨으며 다시 應敎를 拜受하고 副應敎로 옮기시다가 辛丑(1661)年에는 通政大夫로 陞階하셨으니 이는 實錄을 修撰하신 功勞 때문이시다. 다시 西班職인 부호군겸 오위장(副護軍兼 五衛將)으로 拜命하시다가 첨중추(僉中樞)에 移任하셨고 壬寅(1662)年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로 除授되신 후 추천에 依하여 右副左副承旨로 昇進하셨으며 海州牧使로 나가시었다가 癸卯(1663)年에 갈려 돌아오시어 僉知로 轉任되시고 연위사(延慰使)로 파견되어 定州로 부임 甲辰(1664)年에는 兵曹參知로 移任하셨다가 推薦에 依하여 兵曹參議 轉任하시고 다시 장례원(掌隸院)에 판결사(判決事)로 移任하셨으며 慶州府尹으로 나가셨다가 乙巳(1665)年에 조정(朝廷)으로 돌아오셨다. 丙午(1666)年에 參議로 刑曹와 禮曹에 奉職하시고 左承旨로 옮기신 후 曹司(文官으로서 參知五衛將을 하면 曹司라 함) 五衛將에 除授되셨다가 추천에 의하여 驪州牧使로 제수되신 후 成均館大司成 吏曹參議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과 認正品階로 慶尙監司等을 역임하셨으니 이는 다 公의 청현직(淸顯職)이 되시다. 公이 顯宗戊申(1668)年 8月23日에 서세(逝世)하시니 享年 59歲이시고 墓所는 通津府大坡面五尼山里(今金浦郡大串面五尼山里)의 亥坐原에 壬坐로 安葬되시다. 公의 幼年時節부터 文藝에 早達하시어 平素에도 讀書를 즐기셨으나 著述에는 그다지 즐기지를 않으셨으며 성정(性情) 또한 검소(儉素)와 절약하시며 가정에는 婢妾하나 없고 여러 고을에 守令方伯을 지내셨건만 곳간(庫間)에는 한푼의 私財도 없었으나 父母님께 孝하시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친척간(親戚間)에 돈목(敦睦)하시니 門中이 平和스럽고 단란하였다. 公이 처음 官職에 나가기 前에 父親喪을 當하고 伯氏이신 翰林公과 서로 의지해 떨어질 수 없이 지내던 중 翰林公이 아직 그 품은 實力을 發하지도 못하신 채 일찍이 서거하시니 公은 애통하시던 끝에 실성상태(失性狀態)에 빠지시었다가 오래간만에야 점차 회생(回甦)되시었다. 配位夫人羅州朴氏는 縣監인 해씨(垓氏)의 女로서 貞夫人으로 책봉되셨다. 庚戌(1610)生이시고 乙丑(1685)年 2月1日에 逝去하시니 享年 76歲이시고 墓는 公墓에 祔坐로 모시다. 2男1女를 두셨으니 長男인 思泓은 應敎를 지내셨고 次男인 思澂은 蔭職의 奉事이시며 女는 현감인 이희하(李喜夏)에게 출가하다. 思泓은 2男을 두었으니 1男인 漢紀는 贈吏曹參判이시고 2男인 漢緯는 監役이시며 思澂은 1男4女를 두었으니 男은 漢維이며 女는 한우상(韓禹相) 홍서우(洪픊禹) 강세부(姜世溥) 한성시(韓聖時) 等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公의 壻郞인 李喜夏의 系子 善恒과 그의 女壻인 유명순(兪命舜) 서종대(徐宗大) 박필정(朴弼鼎) 等이 있으며 以外에도 內外曾玄孫이 衆多하므로 이루 다 기록하지 못하고 이에 그치겠노라.
嗚呼라 公이 逝世하신지 어언 2百餘年이 지나갔도다. 公이 三朝(仁祖 孝宗 顯宗)를 섬기는 동안에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셨던 것은 모두가 경연(經筵)에서 강논(講論)과 陳述하기를 誠實하고 간곡(懇曲)히 함에서 起因됨이오 그 분의 美德과 善行이 가히 後人들의 法度가 될만한 것은 반드시 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워낙 年代가 요원(遼遠)하여서 문헌(文獻)을 詳考하기 어려움으로 生卒과 官職만을 右와 如히 삼가 撰하여 後世君子(學識과 德望이 있는 사람)의 참조(參照)를 企待할 따름이로다.

檀紀4249年 丙辰12月 日
9代傍孫 嘉善大夫 前行秘書院丞 啓澤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