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풍덕도호부사공 휘 익선 묘소 묘 표 석 |
十五世祖 通訓大夫 豊德都護府使公 諱 益善 墓表
公諱益善字仲兼沈之系靑松自高麗文林郞洪孚始有左議政德符佐我 太祖封靑城伯傳至宗忱府使 贈贊成寔生偰監役 贈領議政寔生領議政之源相 孝顯兩廟爲賢輔元配安東權氏佐郞得己之女賢而不育以公爲嗣公曾祖郡守 贈判書宗敏卽贊成公之弟也祖郡守 ![]() 女婿崇祿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趙泰采撰 女婿通訓大夫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洪禹瑞書 崇禎甲申後六十七年庚寅夏立 15세조 통훈대부 풍덕도호부사공 휘 익선(益善) 묘표 공의 휘는 익선(益善)이요 자는 중겸(仲兼)이며 청송심씨이다. 고려조 때 문림랑 홍부(洪孚)가 시조이고 좌의정 덕부(德符)는 우리 태조를 도와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고 여러 번 전하여 종침(宗忱)은 부사(府使)요 찬성에 추증(追贈)되었다. 이 분이 설(偰)을 낳으니 감역(監役)이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이 분이 영의정 지원(之源)을 낳으니 孝宗과 顯宗 두 임금을 도와 어진 정승이 되었다. 원배(元配)는 안동권씨 좌랑(佐郞) 득기(得己)의 따님으로 현숙(賢淑)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공을 양자 삼았다. 증조는 군수로 판서에 추증된 종민(宗敏)이니 즉 찬성공의 아우이다. 할아버지는 군수 혁( ![]() 공은 천계(天啓) 丁卯(1627) 9월 25일에 낳았고 丁酉(1657)년에 빙고(氷庫) 별검(別檢)에 임명되었다. 내직으로는 상의원(尙衣院) 직장 예빈시(禮賓寺) 별제 사헌부(司憲府) 감찰 내자시(內資寺) 주부 금부도사(禁府都事)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어 선혜청(宣惠廳) 낭관 한성부 판관 庶尹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平澤 順安 낭천(狼川) 재령(載寧) 순창(淳昌) 利川 豊德의 수령을 지냈다. 사헌부 감찰로 있을 때 사헌부에 잘못된 전례가 있어 新進이라고 능멸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 암행어사가 非禮를 하고도 도리어 사람을 탄핵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 다시 사헌부에 들어가서는 그 폐습을 모두 고쳤으며 한성부에 있을 때는 윤휴(尹鑴)의 세력이 켜져서 함부로 금지된 벌목을 자행(恣行)하므로 공이 사실을 조사하여 조정에 알림으로서 드디어 그의 무리가 탄핵을 받아 제거되니 선비들이 모두 잘한 일이라고 하였다. 고을을 다스릴 적에는 반드시 재정을 절약하고 번거로운 부역(賦役)을 줄이며 세력이 있는 사람을 눌러 미천한 백성을 안심시켜 혜택을 보게 하였다. 흉년에는 봉급을 덜어 백성을 구제하여 굶주리지 않게 하니 이웃 고을 백성들도 또한 힘입었다. 관청의 청사를 고치고 군비(軍備)를 충족하게 하여 모든 폐단을 없애니 암행어사가 임금에게 아뢰어 임금이 물품을 하사하였다. 뒤에 공이 별세하여 그 상여가 고을을 지나갈 때 고을의 선비들이 나와서 제상을 차려놓고 제사지내며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다스리는 것을 더욱 엄정하게 하여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마구 거두어 드린 곡식 천여석과 많은 돈을 압수하여 그 폐단을 없애고 그것을 모두 가져다 관청의 창고에 보관하고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취한다면 어떻게 조상들을 지하에서 뵙겠는가 하였다. 부세(賦稅)로 거두어 드린 면포(綿布) 수천필이 모두 횡령한 것이어서 모두 그 사람들을 파면시켰다. 순창은 부자가 많아서 바로잡기 어려웠는데 마침내 모함을 당하여 귀양갔다가 바로 풀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은 먼저 은혜를 베풀고 뒤에는 위엄을 보였다. 풍덕에서는 관무(官務)를 정리하였고 평택에서는 부자가 날뛰는 것을 꺾었으며 순창에서는 마침내 귀양갔었고 귀양간 뒤에 임금이 이 고을을 지날 때 고을사람들이 모두 나와 공의 은혜를 칭송하며 억울하게 귀양간 것을 호소하자 임금이 귀양에서 풀어주니 특이한 은혜였으며 바로 벼슬을 그만두고 丙子년 9월 9일에 돌아가시니 수(壽)가 70이었다. 이듬해 三월에 배위 숙인(淑人) 홍씨와 분수원 미향(未向)의 언덕에 합폄하니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공은 얼굴모습이 풍석(豊碩)하고 기우(氣宇)가 엄중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스럽고 삼가하여 병자호란에 할머니 李 부인과 계모 尹 부인을 모시고 해도(海島)로 피난하는데 길을 갈 때는 마부노릇을 하고 머물게 되면 양식을 빌어오고 하는데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뒤에 윤부인의 병환에 의원에게 달려가서 치료해줄 것을 청하고 거절당하자 문 앞에서 새벽까지 밤새도록 울고 있으니 의원이 그 정성에 감동되어 그가 가지고 있는 의술을 다하여 치료를 해서 나았는데 이것이 어렸을 때의 일이며 만사상공이 늘 이 말을 하며 칭찬하였다. 공은 부모의 상을 당하면 너무 슬퍼하여 心情과 예의를 다하였다. 다섯 번 큰 일을 맞았고 어려서 세 번의 상을 당하였으나 그때 상제노릇 못한 것을 슬피 여겨 종신토록 애모(哀慕)하였다. 처음 만사상공이 공으로 적자(嫡子)를 삼고 늦게 네 아들을 낳았는데 만사상공께서 돌아가시자 宗人이 말하기를 아모는 마땅히 次子가 되어야 하나 만사상공의 생전 뜻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니 공이 내려가서 차자가 되었다. 뒤에 유신(儒臣)이 임금에게 그 잘못을 아뢰어 임금이 바로 잡으라고 명하자 공이 놀라서 都城 밖으로 달아나니 그 외숙(外叔) 탄옹(炭翁) 권시(權諰)가 말하기를 백이(伯夷)가 비록 아버지의 명으로 周나라에 벼슬하지 않았으나 만약 天子의 명령이 있었으면 그렇게 못하였을 것이라 하니 공이 사양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통곡하며 명령을 받았다. 평소에 아침 일찍 사당에 배알(拜謁)하는 것을 늙도록 폐하지 않고 제사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지내며 예절에 혹 어긋남이 있나 염려하여 상고하고 바로 잡아 기록한 것을 이름하여 가령(家令)이라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면 입으로 불러 편지를 써서 얼마 안 되는 친구와 동기간에 보냈다. 어려운 일가를 지성으로 도와준 것은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벼슬한 이래로 한마음으로 봉사하여 일찍이 게을리한 일이 없었고 저속한 세상이었지만 뜻은 높아 고을을 다스리는데 반드시 법칙을 지키고 조금도 방자하고 소홀함이 없었다. 몸을 다스리되 간결하여 백성이 혜택을 받았고 법을 적용하되 공평하여 사람들의 원망이 없었다. 이러므로 가는 곳마다 정치를 잘 한다고 칭찬을 받았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간 뒤에 추모(追慕)하여 비석을 세우고 덕을 칭송하였고 깨끗한 지조(志操)가 끝내 변하지 아니 하였다. 벼슬한지 四十년에 일곱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나 조그만 영리(營利)도 취한 것이 없어 집안이 아무것도 없어 쓸쓸하였다. 풍덕으로 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내가 늙었구나 두 아들이 벼슬길에 있으니 어찌 내가 다시 벼슬할 뜻을 갖겠는가 하였다. 태채(泰采)가 일찍이 공의 대략을 논하면서 공은 孝友의 행실이 있고 고을을 잘 다스린 공적이 있으며 그 적통(嫡統)을 지켜 차례를 定한 것은 위현성(韋玄成)①에게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하였다. 부인 홍씨는 충정공(忠正公) 화포(花浦) 홍익한(洪翼漢)의 따님으로 丙寅 4월 17일에 출생하여 壬戌 11월 23일에 졸하였다. 장사지낼 때 우암 송시열이 묘지문을 지었다. 3남5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군수 정기(廷耆)요 2남은 좌랑 정로(廷老)이고 3남은 정랑 정구(廷耉)이며 사위는 현령 이영(李泳)과 황하민(黃夏民)과 판서 조태채(趙泰采)와 교리 홍우서(洪禹瑞)와 이한장(李漢章)이다. 군수 정기가 1남을 두었으니 사성(師聖)이요 좌랑 정로가 1남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사철(師哲)이요 사위는 박성근(朴性根)과 이경엽(李慶燁)이다. 정랑 정구가 2남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사덕(師德)이요 2남은 사득(師得)이고 사위는 최명상(崔命相)과 정관하(鄭觀河)이다. 현령 이영이 2남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판관 명희(命熙)요 2남은 명신(命新)이고 사위는 현감 정혁선(鄭赫先)과 송수동(宋秀東)이다. 황하민이 2남을 두었으니 상중(尙中)과 상경(尙敬)이요. 조태채가 3남2녀를 두었으니 진사 정빈(鼎彬)과 진사 관빈(觀彬)이요 사위는 이정환(李廷煥)과 박서한(朴舒漢)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홍우서가 2남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계흠(啓欽)이요 사위는 참봉 김태연(金泰衍)과 조영증(趙榮曾)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이한장이 1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계(棨)요 사위는 김확(金確)이고 증손 현손이 모두 70여인이다. 사위 숭록대부행이조판서겸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조태채 찬 사위 통훈대부행홍문관부교리지제교겸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 홍우서 서 숭정갑신 후 67년 경인 여름에 세움 주(註) ① 위현성(韋玄成):한(漢)나라 때 추(鄒)의 사람 정승 현(賢)의 작은 아들, 젊어서부터 경서(經書)에 박통(博通)하였고 장성하여 벼슬이 내리자 형에게 양보하니 그 고결(高潔)함을 가상히 여겨 하남태수(河南太守)에 임명하였으며 원제(元帝) 때 아버지의 정승자리를 계승하여 7년 동안 정승자리에 있었는데 바른 것을 지키고 엄중한 것은 아버지만 못하였으나 문장은 아버지보다 나았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