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학공(휘 유)묘비명

부제학공 휘 유 묘소
소재지: 인천 서구 공촌동 산 8 선영하

부제학공 신도비


十四世祖 吏曹參議 大司成 副提學公 諱 攸 墓碑銘
盖當我 顯肅之世有淸恬敦素之士曰梧灘沈公其諱攸其字仲美其先出靑松府靑松之沈爲吾東望族 本朝定安公德符安孝公溫恭肅公澮三世俱陟上相門戶赫舃恭肅孫順門議政府舍人舍人子達源名重士林與靜菴冲菴諸賢友善選入玉堂遘己卯禍挫揠以終二世而諱友正擢魁科官至驪州牧使公之曾祖也祖諱諿禮曹判書考諱東龜弘文館應敎妣慶州金氏僉知守廉女左議政命元孫也公幼穎秀出語驚人游場屋聲名藹鬱曹偶莫敢抗年二十三成進士三十一登第選槐院轉注書公視榮途若薦翰苑固辭不就會判書應敎二公以非罪削爵公痛迫益無心進取由典籍兵郞出監龍安縣  顯宗初服拜持平卽疏白判書公寃報聞已丁外艱制盡以正言申前言未徹復丏外得金堤中忌者編配久之歷踐掌令獻納司諫執義間爲直講司成司正又出爲沃川郡守公前所更郡邑俱有治譽至是値歲侵單心賙賑尤菴宋文正公爲文而著其美還復入臺閣選三字銜掌試湖南爲司僕正弼善輔德出莅安邊府錄玉堂選公在言地遇事直前雖重咈 聖意而不顧相積奉使歸過於 上致虜喝諸臺論劾被竄公力請收還又論竄積黨之假儒名醜正者論黃瀗權堣貪墨李溫殺人李元禎科場用奸李台瑞邢慝李三錫不合臺憲又言不當營建別殿官竪驕橫宜懲文谷金公因注擬被嚴責臺臣趙世煥言事獲譴俱匡救甚至又陳箚勉君德請開言路論主家廣占田土語極切直至它封奏亦多朴公長遠以爲可入史編甲寅 肅宗幼冲嗣位羣小用事駕論禮誣掜尤菴火色熾發公適亞諫省引避曰宋時烈荷 孝廟不世之遇待以賓師之禮時烈爲 孝廟之誠神明可質議禮之際見解雖不同固非創意而定制決不可罪之而必欲因此構陷儒賢搖蕩朝著抑獨何心時 天怒方震衆疑惧不敢言公獨奮筆剖破姦臟中外聳服 上旣命削黜而奸黨復鉤摘前日在邑時事編管廣州庚申遭母夫人憂旣吉卽拜弘文修撰轉校理應敎爲舍人司諫執義擢同副承旨序陞至右遞拜兵曹參知禮曹參議出爲黃海道觀察使化理方新微文坐罷婁爲大司諫大司成吏禮戶刑曹參議公素不事黨比嘗論虱附當路人情狀斥諫官營救尹拯者文谷因枚卜忤旨去朝畏齋李公亦被  上厭薄以副提學入對力言兩臣赤心亡他反覆陳列懇款終夕  上意雖不甚契亦亮其眷眷之忠事機得以稍緩公力也是時宮闈不嚴一種不靖之徒表裏交煽以致家髦遜荒憂端方大公灼知國家興喪之判在是乃造膝納約罄其愊臆其言至己巳而悉驗盖公雅以名義自持不隨世軒輊甲寅事與此一著最爲大節可傳於後世云公生於萬曆庚申至六十九歲戊辰以七月六日卒葬于通津文殊山先兆下與夫人李氏合祔夫人系出國姓司議命說女判書誠中之曾孫仁惠好施與一門稱爲賢助育四男三女男漢柱郡守生子鳳輝牧使漢章生子鳳儀正郞漢瑞漢規直長生子鳳威鳳逸鳳仁鳳觀女適僉正李弘廷士人丁道晉都正李世禎而李載泌丁五愼李明佐明會明晉明協明翼其出也監司聖希賢希士希道希泰希顯希元希公獻公猷公彦公亮公之曾玄而幼稚外派繁不盡錄公內行淳篤以先寃未暴血泣如不欲生至  肅廟更化大老筵白諸公協贊得伸久鬱之幽枉此公誠孝孚感上下之效也事大夫人晨夕服勞至老艾弗懈友于昆季有肱海之風伯氏蚤喪得遺什於故篋執之流涕當析箸舍饒取薄曰我有祿食何患貧匱推之宗婣睦亡間秉心眞率樂豈而絶利害權機之習立朝正直忠厚而惡刻核激訐之論然當大是非毅然如一刀斷截禍福無所動庚申以後群陰掃盡賢路大闢凡遇遴東必推轂公居前  上亦亟稱其謹愼又敎以文名可合胄監公顧逡巡退讓一以澹雅自勅居室服御屛絶華忲終其身亡易先輩諸公每賞其襟度曠遠風韻高爽人自不可及論者以爲知言云喜與騷人勝士嘯詠江湖之上超然無累幾乎形骸俱忘而聞時事擾攘輒停杯浩歎泣數行下其愛君憂世之心有如此者斯其爲平生所樹大節之本也歟爲文詞尤長於詩以盛李爲準淸逸不俗如其爲人溢而爲騈語亦得徐庾格法有集若干卷行于世銘曰
孝格穹蒼雪兩世之幽鬱心持布素如一節乎終始當國勢抗隉又進佑賢扶世之昌言凜然如撗流方盛砥柱獨峙苟使公無本地之篤修曷以見樹立之若此我瑑貞石永詔遐祀後來讀欺文者尙識其爲吾黨之魁彦明廷之吉士
領議政 陶谷 李宜顯 撰
吏曹參判 尹得和 書
領議政 兪拓基 篆

14세조 이조참의 대사성 부제학공 휘 유(攸) 묘비명
현종(顯宗)과 숙종(肅宗)대에 걸쳐 청념(淸恬)하고 돈소(敦素)한 선비가 있었으니 오탄(梧灘) 심공으로 그의 이름은 유(攸)요 字는 仲美이다. 그의 선조는 靑松府로부터 나왔으니 靑松의 沈씨가 우리 동방의 명망높은 집안이 되었다. 본조의 정안공 덕부(定安公:德符)와 안효공 온(安孝公:溫)과 공숙공 회(恭肅公:澮)는3代가 모두 지위 높고 相臣이어서 문호가 크게 빛났다. 공숙공의 손자인 順門은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이고 사인의 아들 達源은 명망이 士林에서 높았으니 정암(靜菴)과 충암(沖菴)같은 어진 이들과 더불어 잘 사귀었다.
玉堂으로 뽑혀 들어갔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1519)에 휘말려 죽음을 당했다. 2代를 지나서 이름 友正은 괴과(魁科)①에서 及第하여 관작이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이르렀으니 公의 증조부이고 祖父의 이름은 즙(諿)인데 예조판서(禮曹判書)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동구(東龜)인데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이고 어머니는 慶州金氏이니 첨지 수겸(僉知 守兼)의 딸이며 좌의정 명원(左議政 命元)의 손녀이다.
公이 어릴 적부터 영특하게 뛰어나서 말을 하면 사람들이 놀랐고 과장에 드나들 때 명성이 무성하여 친구들이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 나이 23歲때 進士가 되고 31歲때에 及第하여 홍문관에 뽑혀 들어갔다가 注書로 전직되었다. 公은 영달의 길을 더럽게 보아 한원(翰苑)으로 추천되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니 마침 조부인 판서공과 부친인 응교공이 죄없이 벼슬이 삭탈됨을 통박하게 여겨 더욱 요직으로 갈 생각을 끊었다. 전적(典籍)과 병랑(兵郞)을 거쳐 용안현감(龍安縣監)으로 나갔다. 현종 초에 다시 지평(持平)으로 돌아오자 곧바로 소(疎)를 올려 판서공의 죄없음을 아뢰었다는 소문이 있을 때 이미 부친상을 당하여 복제(服制)를 마친 뒤에 正言으로 옮겨서 거듭 먼저와 같이 소를 올렸으나 관철하지 못하고 다시 외직을 빌어 김제(金堤)로 나갔는데 시기하는 자들에게 찍혀 오랫동안 편배(編配)②당했다.
장령 헌납 사간 집의(掌令 獻納 司諫 執義)등을 고루 거치고 중간에 직강 사성 사도 정(直講 司成 司導 正)등을 맡았다가 다시 옥천(沃川)군수로 나갔는데 공이 전에 지내온 군 읍이고 모두 치적을 갖춘 곳이다. 이때 흉년이 들어 한결같이 기민(飢民) 먹일 걱정만 하니 우암 송문정공 시열(尤菴 宋文正公 時烈)이 글을 써서 그의 미덕을 나타내어 주었다.
지방으로부터 돌아와서 다시 대각(臺閣)으로 들어갔는데 삼자함(三字銜)③ 시험관으로 호남에 다녀오고 사복시(司僕寺)의 正과 필선(弼善)과 보덕(輔德)을 지내고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갔으나 옥당에 등록이 되어 있어 공이 언관으로 뽑혔다. 사건을 맡았을 때는 비록 어전일지라도 왕의 비위만을 맞추지 않고 소신을 굽히지 아니했다. 재상인 허적(許積)이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상감을 지나치게 두둔하였다 하여 청나라로부터 트집을 잡혀서 대론(臺論)으로 탄핵 당해 귀양가게 되었는데 공이 힘써 청원하여 되돌려 놓았으나 또다시 귀양에 관한 논란이 일고 허적의 당류로 유림의 명분을 빌렸다 하여 이름을 따져 예를 들며 말하였다.
『황헌(黃瀗)과 권우(權췖)는 욕심이 많고 마음이 검으며 李溫은 살인을 했으며 이원정(李元禎)은 科場에서 용간을 부렸고 이태서(李台瑞)는 사악하고 李三錫은 태헌(臺憲)에 합당하지 않다. 또한 별전(別殿)을 세우는 것은 부당하며 관리들이 제멋대로 굴며 교만함은 징계가 마땅하다고 하여 金文谷이 추측에 걸려 문책을 당하고 대신(臺臣) 조세환(趙世煥)이 말로 인해 견책을 받으니 모두들 언행을 바로잡고 조심하는데 또 차자(箚子)④를 올려 임금은 성덕에 힘쓰시고 言路를 열어 주어야 하며 논박을 당한 이들은 토지도 많이 소유하였다는 등 말들이 과격하고 강직하게 맺어지고 나머지 봉주(封奏)⑤도 많았음에 朴長遠이 실록에 기록하여 둘만하다고 했다.』
甲寅(1674)년에 숙종께서 유충한 나이로 즉위하니 많은 소인들이 일을 꾸미고 예론(禮論)을 끌고 나와서 우암에게 무설(誣說)을 날조하니 큰 일이 일어날 조짐이었다. 공이 마침 간관의 부책임자로서 분위기를 살피고 몸을 움직이며 말하였다.
『송시열은 효종대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고 빈사(賓師)의 예로 대접했으며 時烈이 효종을 위한 정성은 천지신명이 증명하였으니 예의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견해가 비록 같지 않더라도 결코 별다른 뜻으로 제도를 정하고자 함이 아니니 결단코 죄를 주어서는 아니 되며 반드시 이로 인해 어진 신하에게 죄를 씌워 조정을 시끄럽게 하는 것은 정말 어떤 마음입니까.』
이때 왕이 성이 나서 표정이 굳어지니 모두들 두려워서 감히 말 한마디 못하였으나 공은 홀로 붓을 가다듬고 간사한 무리들의 장부(臟腑)를 파기하니 안팎이 수그러졌다. 왕이 삭출(削黜) 하라는 명을 내리니 간당(奸黨)들이 다시 전일 지방관으로 재직시의 일들을 긁어내어 廣州로 귀양갔다.
庚申(1680)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고 거상(居喪)이 끝나자 곧바로 홍문관의 수찬이 되었다가 이어 교리 응교(校理 應敎)로 승진하고 舍人으로 옮겼다. 사간 집의(司諫 執義)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오르고 서열대로 우승지를 거쳐 병조참지 예조참의(兵曹參知 禮曹參議)를 지낸 다음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 교화로 다스려 혁신시키고자 했으나 자그마한 문서건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여러번 대사간(大司諫)과 大司成과 吏 禮 戶 刑曹 4曹의 參議를 지냈다. 공은 평소 당배(黨輩)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당배들은 당국자에게 이(虱)가 붙어있는 형상으로서 간관을 배척하고도 겉으로는 죄인을 구제하고 성실하게 돕는 척했으니 文谷⑥은 하나 하나 들추어 내는데 걸려 왕에게 밉보여 조정을 떠나고 외재(畏齋)⑦ 역시 왕으로부터 푸대접을 받게 되었다. 공이 부제학으로서 왕에게 입대(入對)⑧하여 이 두 신하는 착한 마음으로 다른 뜻이 전혀 없다고 힘써 말씀드리고 반복하여 밤이 늦도록 간곡하게 설명하였다. 왕의 뜻이 비록 합당하다고는 여기지 않았으나 또한 그의 권근(眷勤)한 충성을 믿고 차츰 일이 누그러졌으니 공의 힘이다. 이 당시 궁궐 안이 엄하지 못하여 일종의 고약한 무리들이 안팎으로 선동하여 버릇없는 어린이 같으니 우환거리가 커져 갔다. 공이 확연하게 국가 흥망의 판단이 여기 있음을 알고 이에 무릎을 모으고 大要를 아뢰어 그 가슴 답답함을 다했더니 그의 말이 己巳(1689)년에 이르러서 다 드러났다. 대개 공이 우아한 명분과 의리로써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남들에게 따라가지 않고 스스로 꽉 잡았으므로 甲寅(1674)년의 일은 이로써 일단락되었고 으뜸가는 大節을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공이 庚申(1620)년에 태어나서 69歲인 戊辰(1688)년 7月 6日에 죽어서 통진(通津)에 있는 문수산(文殊山) 선영계하에 장사 지냈으니 부인 이씨와 합장했다. 부인은 국성(國姓)⑨으로서 사의(司議)인 명열(命說)의 딸이며 판서 誠中의 증손이다. 어진 은혜로써 베풀기를 좋아하여 온 문중에서 내조를 잘한다고 칭선하였다.
4男3女를 길렀으니 맏아들 한주(漢柱)는 군수인데 목사로 있는 아들 봉휘(鳳輝)를 낳았고 둘째 아들 한장(漢章)은 정랑으로 있는 아들 봉의(鳳儀)를 낳았고 셋째 아들은 한서(漢瑞)요 넷째 아들 한규(漢規)는 直長으로서 아들 鳳威와 鳳逸 鳳仁 鳳觀을 낳았다. 딸들은 첨정 李弘廷과, 선비 丁道晋과, 도정 李世禎에게 각기 출가했는데 李載泌과 丁五愼과 李明佐 明會 明晋 明協 明翼 등은 공의 외손들이고 監司인 聖希와 賢希 士希 道希 泰希 顯希 元希와 公獻 公猷 公彦 公亮 등은 공의 증손과 玄孫들인데 아직 어리며 그외 외손들은 여기에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이 안으로 행실이 순박하고 독실하며 선대의 죄 없음을 밝혀내지 못하여 피눈물로 세상 살 맛을 잃었고 숙종이 고쳐 새롭게 함에 원로제공(元老諸公)이 협찬하여 오래도록 답답하던 한을 풀고 바로 세웠으니 이는 공의 정성스런 효도를 상하가 감화한 효험이었다. 어머니를 섬기는데 밤낮 없이 부지런하여 늙도록 게으르지 않았으며 형제간에 우애하여 특유의 풍습을 이루었다. 큰형께서 일찍 죽으니 그의 유품을 광주리에 담아 두고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고 음식상을 받고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조금씩 취하며 말하였다.
『나는 먹을 것이 있으니 어찌 빈곤한 것을 걱정하리오』
이처럼 친척으로부터 인척까지도 고루 화목하였다. 진솔한 마음으로 즐기며 이해를 앞세워 기회를 엿보는 버릇은 전혀 없었다. 벼슬할 때는 충후하고 정직하며 남을 헐뜯고 재간부리는 논쟁을 미워하나 그러나 큰 시비가 일어나면 의연하게 한칼로 갈라 치듯 하니 화와 복이 변동할 수 없었다. 庚申(1680)년 이후 뭇 음모가 사라지고 좋은 길이 크게 열리니 무릇 東班⑩에 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공을 제일 먼저 천거하게 되고 임금 역시 공의 근심함을 자주 칭찬하시고 문명으로도 관리능력이 있다고 하였으나 공은 더욱 조심하고 사양하며 앞에 나서지 않았다. 한결같이 의젓하고 경계하여 집에 있을 때도 똑같이 하였다. 사치라고는 있을 수 없고 몸을 마치도록 안이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니 선배 여러분께서 늘 공의 품위가 광원하고 풍도가 고상하다고 칭선하였고 사람들이 가히 따르지 못할 것이며 공론 또한 지각이 있다고들 하였다.
시인과 멋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저 강호의 뒤에서 읊으고 노래하기를 즐기며 초연하게 구김살 한 점 없었으니 거의 심신을 함께 잊고 놀다가도 나라 안에 잘못되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홀연히 술잔 기울이기를 멈추고 크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이 공의 평생에 大節을 세운 근본일 것이리라. 문사(文詞)를 좋아했으나 시가 더욱 능했으니 그 솜씨가 이태백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맑고 준일하면서도 속되지 않고 그의 사람됨이 넘치는 것 같으면서도 꽉 차고 말솜씨 또한 서유(徐庾)의 격법을 갖추었으며 문집 몇 권이 있어서 세상에 보인다.
명(銘)에 가로되,
효행이 하늘에 닿았으니 兩代의 유울⑪을 씻었고 마음가짐이 소박한 베옷같이 한 절개로 시종하였네. 국세가 불안에 빠졌을 때는 나아가서 어질게 도와 세상을 구원했고 활달한 언변은 늠연(凜然)하여 거침없이 성대하였네. 곧은 기둥같이 홀로 우뚝하니 진실로 공으로 하여금 본래부터 독실하지 않았던들 어찌 이 같은 공을 세웠으리오. 비석을 깎아 세워 먼 세월에 교화하도록 했으니 뒷사람들이 와서 이 글을 읽어보면 이 분이 우리 당의 큰 인물이며 밝은 조정의 훌륭한 선비였음을 익히 알 것이다.

주(註)
① 괴과(魁科):조선 때 과거에서 가장 어려운 문과의 갑과를 일컫던 말.
② 편배(編配):장차 귀양보낼 대상자로 지목하여 기록해 두는 것.
③ 삼자함(三字銜):시험제도로서 初 中 終 3장으로 나누어서 치르던 제도.
④ 차자(箚子):간단한 서식의 상소문
⑤ 봉주(封奏):남이 모르게 밀봉하여 올리는 상소문
⑥ 문곡(文谷):김수항(金壽恒)의 호
⑦ 외재(畏齋):李端夏의 호
⑧ 입대(入對):신하가 직접 왕에게 면대하여 아뢰는 것.
⑨ 국성(國姓):임금과 같은 성씨
⑩ 동반(東班):문관직이니 문반이라고도 함.
⑪ 유울:마음이 답답하고 개운하지 않은 것.
 
梧灘公 諱 攸 遺詩
『新 晴』
殘暑鏖風急 늦더위에 허틀 바람 몰아치고
高雲滿壑凉 높이 뜬구름 산골짜기에 가득하다
捲簾江色裏 푸른 강 위에 발(주렴)을 걷어치우고
閒却讀書床 한가히 독서하는 책상 물리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