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부승지(휘 지한)묘갈명

좌부승지공 휘 지한 묘소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포곡면 가실리

묘 비 석


十四世祖 翰林東壁擬 副提學 左副承旨公 諱 之漢 墓碣銘
萬曆癸丑姦臣起誣獄夷 國舅家延及 母后威勢所驅和附者肩相摩也時靑松沈氏諱倬嚴毅守正人或以後時勉之則笑謝曰有命焉賊臣纘男聞其有才子請以女妻之又謝不請其子又與趙慶起等八人者上請斬首倡廢 母者李偉卿鄭造尹訒等伏闕六日纘男已以前事御之乃毁撤屋舍使不得留京師遂父子出居江上已而父卒其子轉入橫城深谷中其子名之漢字子章母曰陰城朴氏學生有寧女判承樞淳之後也承樞事在 國乘公少從守夢鄭公曄學鄭公栗谷先生門人也敎公有法度 天啓癸亥 仁祖反正盖公文藝早成十八歲幷中三場解是時非權貴家子弟則不取故卒以無成及是公道始行公中甲子生員己巳闡大科分隸成均館爲學諭物論甚讙劾罷主論人遂薦爲注書說書竟入史局爲翰林公議始允焉以事屢被奪職旣陞典籍由監登拜正言自是數年常居三司姜鶴年言事觸諱擧朝請罪公爲言擬律太重因去職爲兵曹佐郞移修撰同諸僚箚論弭灾省躬之道丙子虜僭號遣使來又變變益甚公請絶虜自强罪已改圖且以上告 太廟要以孚民心作士氣又言擇將帥嚴軍律是今日急務除泰仁縣監上官未幾邊遽至巡察率兵入衛辟爲從事使督餽輸難定以人言對吏削官叙爲 宗廟令出守平昌郡坐事罷時 國家新與虜和事多蒼黃公慨然草疏極言正義刷恥之策不果上爲平安都事方伯委以賑政又請水得霔事聞 命錫馬善山在嶺南最爲雄府且有關防之設朝廷擇遣公旣至疏陳金烏城形便乞行變通以爲長久計罷叙爲玉堂官歷三官復以玉堂兼 世孫書院官旣開 筵有 嘉賜又歷四官爲司諫而 仁祖賓天先時襲襲時大臣禮官皆不入視公與長官言其不可從之 孝廟初服中外風動公冀有所裨益新化遂上箚請立志取善振紀綱正朝廷 上皆嘉納焉然公以大夫人年老求便養遂以副應敎爲錦山縣監旣至條陳宿弊最以漕水二軍遠調於山邑爲失宜又請勿太露辭氣摧折諫官已而坐事罷叙拜執義兪公棨嘗以非罪被竄公以爲言海西癘氣熾盛公以副應敎承 命往祭山川以執義復命條陳沿路民瘼有尉寵焉復移應敎兼三字御俄而陞通政歷拜承旨戶兵工三曹參議大夫人沒喪除除延安府使公自居憂人已憂其不勝喪至是病遂促裝還家遂卒丁酉五月初四日也其八月葬于廣州先塋年六十二二夫人皆不祔公和厚沈靜不言人過至其大義所關則奮發直前無所回互親癠禱輒有應撫育二弟孤幼極其恩愛析著特厚其少妹曰親意所念也愛君一念至老彌篤上自 上躬闕失下及民生疾苦無不極言竭論嘗取詩書大學周禮要語爲四圖以進 孝廟極賜嘉奬常張諸壁上省覽不置曰此足以爲治矣 特賜一虎皮以賞之公將作亭於驪江上扁以一虎嗚呼此亦可以觀君臣矣其爲郡邑不務聲名去後民必追思常不以一毫爲子孫計子孫至於飢寒失所人或有言則公笑曰自料才短念不及此也公最好周易嘗爲月卦圖說又爲後天方圓圖皆出自得不蹈襲前人嘗値疾雷震擊公凝然不動收視坐人之迷倒者眞所謂百里匕鬯者公可謂深於易矣祖宗範監察曾祖鉉參奉左參贊光彦其高祖也前妣朴氏縣監垓之女樂善安貧人以爲女中君子生子材奉事女適持平李伯麟進士李喜相後夫人權氏其考別坐偀孝慈柔順生子枅梯楷樶女適林宏儒李公華林澈朴氏先公二十八年沒權氏後公十四年側室李生機欐檥二女爲柳精李斗三妻余於公晩荷知奬 孝廟初服商論時事軒輊人物已服公之所存矣其後錦山時盃酒從容傾倒心懷則公已無復當世意矣又其後受知 聖主將有所爲而公則逝矣千里承凶徒切悲慨今公諸子以玄石朴和叔狀來謁余文俯仰今昔爲之愴涕而爲之銘曰 大易之蘊孰究孰度維公寔闡有圖有說受用于身進矢于廷盖莫不宜後人之程嗟爾後人毋墜厥成
原任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致仕奉朝賀 宋時烈 撰
安東 權尙夏 書

14세조 한림동벽의 부제학 좌부승지공 휘 지한(之漢) 묘갈명
만력(萬曆) 癸丑年(1613)에 간신(奸臣)이 무옥(誣獄)을 일으켜 국구(國舅)의 집안과 모후(母后)를 죽이니, 위세(威勢)를 좇아서 부화뇌동하는 자가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많았다. 이때에 靑松沈氏 휘(諱) 탁(倬)이 엄정하고 강직하게 正道를 지켰다. 사람들이 간혹 뒷날에 그렇게 하시라고 권면하니 웃으면서 사례하고는 『天命에 달려 있지요』 라고 하였다. 적신(賊臣) 찬남(纘南)이 공에게 재주있는 아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고자 청하였으나 역시 사양하고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공의 아들 또한 조경기(趙慶起) 등 8인과 함께 상소(上疏)하여 모후(母后)를 폐위(廢位)하자는 논의를 주창한 이위경(李偉卿), 정조(鄭造), 윤인(尹認) 등을 참수(斬首)할 것을 청하고 엿새 동안 대궐 앞에 나아가 엎드려 있었다. 찬남(纘南)이 이에 앞의 일로 인해 원망을 품고서 이에 옥사(屋舍)를 부수고 철거해 버리고는 경사(京師)에 머무를 수 없게 하였으니 드디어 父子가 강가에 나와 살았다. 얼마 있다가 부친이 돌아가시고 그 아들은 횡성(橫城)의 깊은 골짜기로 옮겨 갔다. 그 아들의 이름은 지한(之漢)으로 字는 자장(子章), 모친(母親)은 음성박씨(陰城朴氏)로 學生 유영(有寧)의 따님이며 판승추(判承樞)를 지낸 순(淳)의 後孫이다. 승추(承樞)의 일은 나라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公은 어려서 수몽(守夢) 정엽(鄭曄)을 따라서 학문을 배웠다. 정공(鄭公)은 율곡(栗谷) 先生의 門人으로, 公을 가르치는데 법도(法度)있게 하셨다. 천계(天啓) 癸亥에 仁祖께서 反正을 일으켰다. 대개 公의 문예(文藝)가 어린 나이에 이루어져 18세에 향시(鄕試) 삼장(三場)에 아울러 합격하였으나 이 때 권귀가(權貴家)의 子弟가 아닌 까닭에 뽑히지 못하였고 그런 이유로 끝내 성취할 수 없었다. 仁祖反正이 일어나 公道가 비로소 행해지게 되자, 공은 甲子年에 시행된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己巳에 大科에 합격하게 되었다.
성균관(成均館)에 분속(分屬)되어 학유(學諭)를 맡아보았는데 물론(物論)이 매우 시끄럽게 일어나 논의를 주도한 사람을 탄핵하여 파직시키자, 드디어 천거되어 주서(注書)와 설서(說書)를 지내고 마침내 사국(史局)의 한림(翰林)이 되니 공의(公議)가 비로소 동의하였다. 여러 사건으로 자주 관직을 빼앗겼으나 이윽고 전적(典籍)에 승서(陞敍)되어 감찰(監察)를 거쳐 正言에 배수되고 이로부터 몇년 동안 三司에 있었다. 강학년(姜鶴年)이 상소(上疏)하여 촉휘(觸諱)하자 조정에서 죄를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소 때문에 형률을 정하면서 지나치게 무겁게 한다고 하여 이로 인해 관직을 그만두었다.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가 수찬(修撰)으로 이배되었다. 여러 동료와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재앙을 그치고 몸을 성찰하는 도리에 대해 논하였다.
丙子에 오랑캐가 참칭(僭稱)하면서 사신을 보내고 또한 변괴(變怪)가 더욱 심하자 공이 오랑캐와 절교하여 스스로 힘을 기르고 자신을 벌하여 개도(改圖)하고 이에 태묘(太廟)에 고하여 민심을 미덥게 하고 士氣를 진작시키며, 또한 장수를 뽑고 軍法을 엄하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가장 급한 일이라고 청하였다.
公은 태인 현감(泰仁縣監)에 제수 되어서는 上官이 얼마 있다가 변두(邊頭)에서 갑자기 일이 생겨 순찰사(巡察使)가 되어 병사(兵史)를 거느리고 입위(入衛)하였고 종사관(從事官)을 뽑아서 군량(軍糧)을 나르도록 독촉하니, 일을 처리하기가 어려웠으나 사람들의 말과 대리(對吏)하는 일로 삭관(削官)되었다. 종묘 령(宗廟令)으로 서용되고, 평창 군수(平昌郡守)로 나갔으나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 때에 나라에서 새로 오랑캐와 더불어 화친하여 일마다 창황(蒼黃)한 것이 많았는데, 공이 개연히 초소(草疏)를 지어 義를 바르게 하고 수치를 씻어버릴 계책(計策)을 극언(極言)하는 상소를 기초하였으나 끝내 올리지는 못하였다. 평안 도사(平安都事)가 되어 방백(方伯)이 치정(治政)을 위임하였고, 또한 비가 내리도록 빌어서 비를 얻게 되었는데, 일이 알려지자 임금이 말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善山은 영남(嶺南)에서 가장 큰 고을이므로 방어의 시설이 필요하였는데 조정(朝廷)에서 공을 가려내어서 파견하였다. 이윽고 소를 진달(陳達)하여 금오산성(金烏山城)의 형세(形勢)로 변통(變通)을 행하여 장구한 계책으로 삼을 것을 구하였으나 파직되었다.
옥당(玉堂)에 서용되어 삼관(三官)을 역임하고, 다시 옥당(玉堂)에 제수되어 세손서원관(世孫書院官)을 겸대(兼帶)하였다. 강연(講筵)을 열었을 때 世孫이 아름답게 여겨 하사(下賜)하는 일이 있었다. 또한 四官을 역임하여 사간(司諫)이 되어 仁祖가 돌아가시자 선대에는 염습할 때에 大臣과 예관(禮官)이 모두 들어가 보지 않았으나 공과 長官이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하자 孝宗께서 이에 따랐다. 효종 임금께서 처음으로 정권을 잡고 교화(敎化)를 베풀 때에 中外가 바람에 휩쓸리듯 따랐는데, 공이 새로운 정치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드디어 차자(箚子)를 올려 뜻을 세우고 착한 것을 취하여 기강(紀綱)을 바로잡고 조정을 바로 잡는 것을 말하니 상(上)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그러나 公이 大夫人의 나이가 늙어 봉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니, 부응교(副應敎)에 있다가 금산 현감(錦山縣監)을 맡게 되었다. 이윽고 묵은 폐단을 조목조목 아뢰어 우선 『조수(漕水) 이군(二軍)이 멀어서 山邑에다 적용하는 데 적당함을 잃었으며, 또한 대간(臺諫)의 기를 꺾는 말투를 지나치게 들어내지 마소서』라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 당하였다. 집의(執義)로 서용 되어 배수(拜受)되었다. 일찍이 유계(兪棨)가 죄가 없는데도 유배를 당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공이 이를 거론하였다 .해서(海西) 지방에 역병이 창궐(猖獗)하자 공이 부응교(副應敎)의 직임으로 명을 받들고 가서 山川에 제사를 지내고 집의(執義)로 복명(復命)하여 연로(沿路)에 백성에게 폐가 되는 일을 조목조목 진달하니 위로하시며 총애를 보이셨다. 다시 응교(應敎) 겸(兼) 삼자함(三字啣:知製敎)에 이배되었다가 갑자기 통정(通政)에 승서(陞敍)되고 승지(承旨)와 공조(工曹), 병조(兵曹), 호조(戶曹) 삼조(三曹)의 참의(參議)를 두루 역임하였다.
大夫人이 돌아가시자 상을 마치고 연안 부사(延安府使)에 제수되었다. 公이 부모의 상을 당하자 사람들이 그 상(喪)을 이겨내지 못할까 걱정하더니 병(病)을 얻어 드디어 행장(行裝)을 재촉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丁酉 5월 4일에 돌아가셨다. 그 해 8월에 廣州 선영(先塋)에 장사지냈으니 향년은 62세였다. 두 夫人 모두 합장하지 않았다.
공은 온화하고 두터우며 침착하고 조용하셨으며,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으셨다. 일이 大義에 관련된 경우는 격렬하게 발분하고 용감하게 직접 앞으로 갔으며 남의 잘못을 덮어주는 일이 없었다. 부모가 병을 앓아 기도하면 문득 감응(感應)이 있었다. 고아가 된 두 동생의 어린 자식을 어루만지며 길러내면서 그들에게 은애(恩愛)를 다했으며, 재산을 나누는데 특별히 작은 누이에게 후하게 주면서 말하기를 『부친의 뜻을 생각한 것이다』 하였다.
임금 사랑하기를 한결같이 하여 늙을 때까지 더욱 돈독히 하였고, 위로는 임금의 잘못과 아래로는 백성의 고통을 극언(極言)하여 말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대학(大學)』과 『주례(周禮)』에서 핵심이 되는 말들을 취하여 사도(四圖)를 만들어 효종에게 올렸는데, 매우 칭찬하였고 항상 벽상(壁上)에 펼쳐놓고는 버려두지 않고 살펴보시며 『이것으로 족히 다스림을 삼을 수 있겠다.』 하고 특별히 호피(虎皮) 한 장을 내리시며 칭찬하였다. 公이 여강(驪江) 가에다 정자를 지으려 하며 「일호(一虎)」라는 편액을 쓰고자 하였으니, 아아! 이 또한 君臣의 관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郡邑을 다스릴 때에 명성(名聲)을 내는 데 힘쓰지 않았으나 공이 떠난 후에 백성들이 반드시 추모하고 그리워하였으며 항상 한 터럭만큼도 자손을 위한 계책으로 쓰지 않았다. 子孫들이 배고픔과 추위에 떨며 몸둘 바를 찾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사람이 때로 그 사정을 사정하면 공이 웃으면서 『내가 재주가 짧은 것은 헤아리고 있으나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도 못했소.』라 하였다.
公은 『주역(周易)』을 가장 좋아하였는데, 예전에 「월괘도설(月卦圖說)」을 만들고 또 「후천방도(後天方圖)」를 만들었으니 모두 자득(自得)한 데서 나왔으며 앞사람을 도습(蹈襲)하지 않았다. 일찍이 빠른 우레가 진동하며 격발(擊發)하자 공은 꼼짝 않고 동요하지 않으면서 앉아 있는 사람들이 혼미하여 꼬꾸라지는 것을 보았으니 진실로 「진동(震動)이 백리(百里)를 놀라게 함에 숟가락과 울창주(鬱鬯酒)를 잃지 않은 사람〔震驚百里, 不喪匕鬯 『周易』 「震卦」〕」이다. 공은 『주역(周易)』을 깊이 이해한다고 할 만하다.
祖父는 종범(宗範)이며 감찰(監察)을 지냈다. 증조(曾祖)는 현(鉉)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광언(光彦)은 고조(高祖)가 된다. 전비(前妣)는 朴氏로 현감(縣監) 해(垓)의 따님이다. 선을 즐기고 가난을 편하게 여겼으니, 사람들이 女子 君子로 여겼다. 아들 재(材)를 낳았는데 봉사(奉事)를 지냈다. 딸은 지평(持平) 이백린(李伯麟)과 進士 이희상(李喜相)에게 시집갔다.
후부인(後夫人)은 권씨(權氏)로 선친은 별좌(別坐)를 지낸 영(偀)이다. 효성스럽고 자애로우며 유순(柔順)하였다. 아들 계(툧), 제(梯), 해(楷), 최(樶)를 낳았고, 딸은 임굉유(林宏儒), 이공화(李公華), 임철(林澈)에게 시집갔다.
朴氏는 공보다 28년 먼저 돌아가셨으며, 권씨(權氏)는 공보다 14년 뒤에 돌아가셨다. 측실(側室) 李氏가 아들 기(機), 려(欐), 의(檥)를 낳았다. 두 딸은 유정(柳精), 이두삼(李斗三)에게 시집갔다.
나는 공에게 느지막에 장려함을 입었다. 효종이 처음 즉위하시어 당시의 일을 상론(商論)하고 인물(人物)의 우열(優劣)을 매길 때 이미 공이 생각하고 있는 것에 굴복하였다. 그 뒤로 금산(錦山)에서 때때로 술을 조용히 나누며 심회(心懷)에 경도(傾倒)되었는데, 공은 이미 다시는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으셨다. 또한 그 뒤로 성주(聖主)에 지우(知遇)를 받고 앞으로 일을 하려던 차에 공이 돌아가셨다. 천리(千里)에서 흉보(凶報)를 받고는 다만 슬퍼하고 개탄함이 절절할 뿐이다. 지금 공의 여러 아들이 현석(玄石) 박화숙(朴和叔:朴世采)이 쓴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의 글을 구하였다. 이에 지난 일과 오늘 일을 생각해보니 슬퍼져서 눈물이 흐른다.
 명(銘)을 짓는다.
 크나 큰 주역의 깊은 뜻을,
 그 누가 연구하며 누가 헤아릴 수 있으리오.
 오직 공이 진실로 밝히시어 도설(圖說)을 만들어 놓았네,
 자신이 먼저 실천해 보고 난 뒤 조정에 올려 펼쳐 놓았네.
 마땅치 않은 것이 없으니 뒤 사람의 바른 길이 되리라,
 아아 뒤 사람들이여, 이 성취를 잃어버리지 말지어다.
원임(原任)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치사 봉조하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안동(安東) 권상하(權尙夏)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