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양위부호군(휘 유적)묘갈

부호군공 휘 유적 묘소
소재지: 충북 괴산군 불정면 추산리

묘 비


十三世祖 嘉善大夫 行 龍驤衛 副護軍 沈公 諱 儒績 墓碣銘
公諱儒績字翼龍靑松人始祖文林郞衛尉寺丞諱洪孚閤門祗侯諱淵吏曹正郞追封靑華府院君諱龍三世顯于勝國入 李朝靑城伯諱德符左議政 諡安孝公諱溫領議政 諡恭肅公諱澮領議政 內資寺判官諱湲贈左贊成 舍人諱順門贈領議政 同敦寧府使諱逢源 贈左贊成號曉窓 承文院正字諱鍵贈領議政 軍器寺僉正諱昌壽贈吏曹參判 司憲府監察諱暾卽公之考也 妣延安李氏縣監諱瑞麟之女生三男長儒宗次儒弘次儒宏妣平海黃氏同中樞諱輔仁之女生二男二女長儒達次公在序二女長適朴廷亨次適趙以起公生于戊寅卒于甲寅享年九十七墓忠州南水山里戌坐之原 肅宗朝己亥用優老典陞嘉義夫人原州元氏學生諱延祥女生于丙戌卒于甲午享年六十九墓祔窆公生三歲孤煢煢母子相爲命及長性篤孝克色養母甚安之推其餘毁於喪敬於祭與人交忠直尤急於恤窮也有三男長蔭別提次柲內外孫幷二十餘人不匱者其昌後乎
朝奉大夫行成均館典籍 姜 栢 撰
崔宅履 書

13세조 가선대부 행 용양위 부호군 심공 휘 유적(儒績) 묘갈명
공의 휘는 유적(儒績)이요 자는 익용(翼龍)이니 靑松사람이다.
시조 문림랑 위위시승 휘 홍부(洪孚)와 합문지후 휘 연(淵)과 이조정랑으로 청화부원군을 추봉한 휘 용(龍) 3世가 고려에서 현달(顯達) 하였으며 이씨조에 들어와서 청성백 휘 덕부(德符)는 좌의정이요 시 안효공 휘 온(溫)은 영의정이요 시 공숙공 휘 회(澮)는 영의정이요 내자시판관 휘 원(湲)은 증 좌찬성이요 사인 휘 순문(順門)은 증 영의정이요 동돈녕부사 휘 봉원(逢源)은 증 좌찬성이고 호가 효창(曉窓)이요 승문원정자로 휘 건(鍵)은 증 영의정이요 군기시첨정 휘 昌壽는 증 이조참판이요 사헌부감찰 휘 돈(暾)은 즉 考位(아버지)가 되신다. 어머니는 延安李氏이니 현감 휘 서린(瑞麟)의 따님이다. 3男을 두었으니 맏이는 유종(儒宗)이요 다음은 유홍(儒弘)이요 다음은 유굉(儒宏)이며 계비는 平海黃씨니 동중추(同中樞) 휘 보인(輔仁)의 따님으로 2男 2女를 두었으니 맏이는 유달(儒達)이요 다음은 公이니 차례로 둘째이다. 2女에서 맏이는 박정형(朴廷亨)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조이기(趙以起)에게 시집갔다.
公이 戊寅(1638)년에 나서 甲寅(1734)년에 돌아갔으니 향년이 97세이다. 묘소는 충주 남쪽 水山里 戌坐의 언덕이다. 숙종조 기해(肅宗朝 己亥:1719)년에 노인을 우대하는 특전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으며 부인 原州元씨는 학생 휘 연상(延祥)의 따님이며 丙戌(1646)년에 나서 甲午(1714)년에 돌아갔으니 향년이 69세이다. 묘소는 합폄했다.
公이 출생한지 삼세에 고아가 되어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으매 母子분이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장성하매 천성적으로 효에 독실하여 화한 빛으로 봉양하니 어머니께서 심히 편안하게 여기었다. 그 효를 미루어 상사에 애통하고 제사에 공경하며 사람과 교제하되 충직하고 더욱 빈궁한 자를 구제하는데에 급급했다. 3男을 두었으니 장남은 학()이요 음직으로 별제(別提)이고 다음은 필(秘), 집()이요 內外孫이 아울러 20여명이 되니 다하지 않은 복록이 그 후손이 번창한데에 있다고 하겠다.
조봉대부 행 성균관전적 강 백(姜 栢) 지음
최택리(崔宅履)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