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관공(휘 경)묘갈명

교관공 휘 경 묘소
소재지: 경기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묘 비 석


敎官沈公 沒七十二年 曾孫來徵 具狀而請余曰先祖 初葬于靑城伯遠祖之墓側 今移諸高陽舊居之地 欲樹短碣 表公遺事 子乃沈之自出 其無辭焉 余嘉來徵之篤孝 按其狀則又敬公之氣節也 公以卿相世曺 早捐擧業 惟取溓洛諸書 潛心綜貫 嘗登栗谷先生之門 先生 亟詈之 以爲儒生 精於經學 無如此人 議欲以白衣 薦入 經筵 未幾 國家治鄭汝立獄 李潑兄弟 坐死 公素與其兄弟善 哀其無收骸者 爲棺歛而葬之 當路者 搆以爲罪 竄諸富寧 壬辰寇興而淂釋 歸於沔川 惟以經史自娛 當光海乙卯始仕 爲童蒙敎官 時廢母論 垂發矣 奸徒 方推隆鄭仁弘 以傾一世 欲假其手 以濟其論 其機甚秘 人莫敢言者 公偶見大司憲韓纘男 發其陰計 訟言責之 纘男 怒其言之功而情淂也 欲鉤得言根 逮繫數月 安置鏡城 居一年 卒于謫所 享年六十一 嗚呼公之瘞李潑 義也 斥纘男 節也 一折而不悔 再折而至死 無惧無怍 獨立一世 可謂守死善道者也 平生 以近思錄一部 自警爲釋義 以傳 事親孝 與友信 仁厚恭謹 守正不阿 觀其所就之高 則足以知其學之有淂也 公諱憬 字仲悟 靑松人也 靑城伯德符 國初左政丞 子溫領議政 子澮領議政 子湲判官 子順門舍人 子連源 領議政 子 國舅府院君 子智謙 贈戶曹正郞 卽公之考也 妣咸安李氏經歷霽之女也 公 早丁內艱季父判書忠謙 憐而育之 娶錦城朴氏 忠義衛世光之女 有四子 廷寅進士官引儀 廷亮官義禁府都事 廷弘進士官察訪 廷熙宣敎郞 內外諸孫 不盡錄 銘曰
公挺世胄服膺儒家 篤之硏鑽其獲孔嘉 有友僇死公獨埋之
有奸舞譎公獨排之 維義維節與身終始 于以表之庶其無愧
崇禎甲申後六十四年戊子三月二十日立
吏曹參判藝文館提學 任相元 撰
玄孫 澈 書

12세조 교관공 휘 경(憬) 묘갈명
동몽교관 沈公이 별세한지 72年이 되는 해에 公의 증손(諱來徵)이 행장을 갖추고 와서 나에게 청하기를 선조를 처음에는 청성백 선조님의 묘소 옆에 장례 지냈다가 지금 고양 땅에 이장하고 묘갈을 세워 公의 유적을 기록하고자 하는데 그대는 沈氏의 외손이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나는 諱來徵의 돈독한 효심을 가상히 여기는 한편 행장을 읽고 公의 고매한 절개에 경복하였다.
公은 명문에 태어났으나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宋나라 유교철학공부에 힘써 도학자로써 전진하였다. 公이 일찍이 율곡선생(諱李珥)의 문하에 들었는데 선생은 누차 칭찬하면서 유생으로서 經學에 정통한 자는 이와 같은 이가 없다 하며 관직이 없는 대로 經筵(王에게 經書를 강의하는 자리)에 천거하고자 논의하던 중에 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나 조정에서 이를 다스릴 때 李潑형제가 연루되어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公은 일찍부터 李潑형제와 친근하였으므로 그의 시체를 거두어 줄 사람이 없음을 슬프게 여기고 관을 마련하여 염을 하고 장사까지 지내주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당국자들이 公을 죄인으로 몰아 함경북도 富寧땅으로 귀양 보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석방되어 충남 沔川땅으로 낙향하여 오로지 經史연구로써 세월을 보내셨다.
光海君七年(1615년)에 비로소 관직에 올라 성균관동몽교관에 취임하였는데 당시 광해군의 폐모론이 일어나 간악한 무리들이 鄭仁弘을 추대하여 한 세대를 전복하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는데 그러한 기밀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公이 이를 알고 우연히 대사헌 한찬남(韓纘男)을 만나보고 그들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바른말로 힐책하니 韓은 公의 진언이 너무나도 절실함에 오히려 유감을 품고 公의 입을 막으려고 수개월동안 옥에 가두었다가 咸鏡北道 鏡城땅에 안치하였다. 안치 된지 1年후에 귀양지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1세였다. 슬프다. 公이 李潑을 장사지내준 것은 의리이고 韓纘男을 배척한 것은 절개이다. 한번 꺾인 것을 후회하지 않고 두 번째 꺾여서는 죽음에 이르러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 마침내 흔들리지 않고 한 세대에 홀로 섰으니 죽음을 지키되 정도를 걸었다 할 수 있다.
公께서는 평생동안 宋나라 朱子의 性理學을 풀이하여 스스로를 경계하는 명언으로 삼고 또한 후세에 남기셨다. 公은 효도로써 어버이를 봉양하고 친구들과는 신의를 지키며 어질고 후하며 공손하게 올바른 도리를 지키며 집권자들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니 그의 높은 절개를 보면 그의 학문의 깊이를 알 수 있다.
公의 諱는 憬이요 字는 仲悟이며 靑松人이다. 청성백(諱 德符)은 조선조 초기의 좌정승이고 아들(諱 溫)은 영의정이며 그의 아들(諱 澮)도 영의정이었으며 그 분의 아들(諱 湲)은 내자시 판관이고 그의 아들(諱 順門)은 의정부 사인이며 그 분의 아들(諱 連源)도 영의정이고 그 분의 아들(諱 鋼)은 국구 부원군이며 그 분의 아들(諱 智謙)은 증호조정랑으로 즉 公의 아버지이다.
어머니 咸安李氏는 경력 李霽의 따님이다. 公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후에는 숙부인 판서(諱 忠謙)께서 가련하게 여기고 양육하셨다. 錦城朴氏 즉 忠義衛 朴世光의 따님과 혼인하여 4子를 두었는데 諱 廷寅은 진사로 官職이 引儀이고 諱 廷亮은 의금부도사이며 諱 廷弘은 진사로서 찰방을 지내고 諱 廷熙는 선교랑이다. 그 밖의 제자손들은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명에 이르기를
公은 세도 있는 가문에 태어나 유교를 지켰네,
학문탐구와 수행을 돈독히 하니 그 얻음이 매우 크도다.
친구가 죽으매 홀로 묻어주었고,
간당들이 난무하니 홀로 배격하였네.
의리와 절개로서 일생을 마쳤으니,
여기에 그 분의 실적을 기록하는 것이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戊子1708年 3月20日 立.
이조참판 겸 예문관 제학 任相元 지음.
현손 澈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