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과현감공(휘 엄)묘비명

옥과공 휘 엄 묘소
소재지: 김포시 통진면 가현리


十二世祖 贈領議政 靑川府院君 行玉果縣監公 諱 墓碑銘竝書
余齠齕時有一嚴毅大官過先君子見余穉弱甚憐之呼使前置膝前曰而誤缺與我子遊命僕從負二小兒來其季卽公與余同甲生因與之驩甚相往來迄四十年所而公先歿其後有二十又亦六年而公之子長世持公婿副提學李植狀請墓道文字於余以其舊也不得辭公諱字尙志靑松之沈其傳世也久高麗衛尉丞洪孚之後也入我朝有曰德符左侍中靑城伯於公爲八代祖曰溫領議政靑川府院君恭肅公曰湲內資寺判官贈左贊成曰順門議政府舍人贈領議政是爲公之高祖曾祖諱連源領議政忠惠公祖諱鋼領敦寧靑陵府院君贈領議政翼孝公靑陵靑川俱以國舅封考諱義謙大司憲靑陽卽余兒時所見大官也近臣稱賢相名卿多歸之忠惠靑陽云妣淸州韓氏忠勳府經歷興緖之女公生于嘉靖癸亥五歲出後於伯父溫陽郡守贈左承旨諱仁謙奉靑陵之祀妣全州李氏刑曹佐郞拔之女時仁順王后在世以公爲元舅宗孫尤寵異之恩數不比他侄年十三后薨公食素過卒哭庚辰丁溫陽公憂丁亥丁靑陽公憂辛卯中司馬試甲午丁李夫人憂前後三表執禮不少懈戚易咸得其節自壬辰兵亂以後絶意就擧以蔭累授官不肯就癸卯始赴水運判官秩滿遷司贍寺主簿丙午除交河縣監未幾辭遞旋拜玉果縣監翌歲御史以善治狀聞賜書褒美己酉罷歸是年卒得年四十七葬于通津盤夷村乾坐之原公生長綺紈無一点芬華氣能若陋若固有之雖弊衣惡食人所不堪者殆如也軆質洪重度量宏深平居或終日不言至臨事應物和敞幷行當官莅位不屑屑於文簿鞭扑而科條不紊吏畏民懷居玉果三年邑里安諡謠訟懽洽去官之日珉庶涕泣遮擁馬不得行公佯從他經去民相與立石至今追慕之家居孝友尤篤事兄遇妹人無間言忠惠以下三世皆有便房無子而依於公公待之如禮不私其有家世世傳勳戚富冠一時而自以出後大宗於本家遺産若無所預又以所後家財本非應有亦不經紀婢僕土田隨兮取用不問其逋滿人或認爲己有亦不與加詰晩歲舊業漸落又不以介意非有倫理大事未嘗造人門通書尺人或以高簡目之余作宰相早門無揖揖客而公獨與之抗禮每一相遇懽然如少年日雖稠人廣坐中亦然入亦不以爲異盖其氣槩磊落如此今旣九原安可復見也夫人綾城具氏左贊成贈領議政文懿公思孟之女育七男四女長光世文科應敎次挺世縣監次命世靑雲君次長世佐郞次安世弼世幷夭次熙世進士女長適柳儁次成汝容次李植次李亨光世娶判書黃愼女生四男二女男長檼進士次檍察訪次櫶參奉次棇女長適縣監林墰次李楫側室子懋櫖挺世娶領敦寧金悌男女生一男一女男榗參奉女適監察白弘一後娶庶尹金虎秀女命世娶正郞李幼淸女生一男榶幷女幷夭以熙世子樞爲後長世娶生員成達善女生二女長適李正英次幼安世娶生員尹興坡女熙世娶縣監兪大佑女生二女長適申晸次幼後娶縣監朴安鼎女生二男一女幼柳儁生一男一女男斗卿女適李軸成汝容生一男一女男雲翰女適都事元振溟李植生三男三女男冕夏紳夏端夏女適鄭銓次進士安光郁次趙備曾孫若海若溟若湖若漢若河若濟若沂若洙若泗曾孫女內外及曾玄孫男女五十人餘不記公卒後十五年命世翊贊中興叅 靖社元勳 贈公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觀象監事靑川府院君墓道恩榮煥然改觀庸非植德之驗也夫銘曰
何德之碩而位之嗇而奪之速種而不食厥裔之獲其理不忒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海昌君 尹昉 撰
綏錄大夫東陽尉申翊聖幷篆
崇禎七年甲戌十月 日 立

12세조 증영의정 청천부원군 행옥과현감공 휘 엄() 묘비명병서
내 초츤(齠齕)① 때에 엄의(嚴毅)②한 大官이 있어 先君子③께 왔다가 나의 치약(穉弱)④함을 보고 매우 가련히 생각하여 불러서 무릎 앞에 앉히고 말하셨다. 『너(잘못되었구나 빠진 글자가 있음) 내 아들과 함께 놀아라.』
종을 시켜서 두 어린아이를 업어 오게 하니 그 중 아우가 곧 공으로 나와는 동갑생(同甲生)이었으며 그로 인해 더불어 즐긴 일이 많았다.
서로 왕래한 지 40年이 되어서는 公이 먼저 죽었고, 그 뒤 20年 하고도 또 6年이 지난 오늘 공의 아들 장세(長世)가 公의 사위 부제학(副提學) 이식(李植)과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墓道의 문자를 청하니 이것은 그 옛정 때문이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공의 휘는 엄()이요. 자는 상지(尙志)로 靑松의 沈氏니 전해 내려온지 오래 되었으며 고려 때 위위승(衛尉丞) 홍부(洪孚)의 후손이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휘를 덕부(德符)라 하는 분이 있는데 벼슬이 좌시중(左侍中) 청성백(靑城伯)으로 공에게는 8代祖가 된다. 온(溫)은 영의정 청천부원군 안효공(安孝公)이며, 그의 아들 회(澮)도 영의정으로 공숙공(恭肅公)이다. 원(湲)은 내자시판관(內資寺判官)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순문(順門)은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영의정에 증직을 받았는데 이 분이 공의 고조다.
증조(曾祖)의 휘는 연원(連源)이니 영의정 충혜공(忠惠公)이요, 할아버지의 휘는 강(鋼)이니 영돈녕 청릉부원군으로 영의정에 증직을 받았다. 청릉부원군과 청천부원군은 모두 국구(國舅)로 봉함을 받은 것이다. 아버지의 휘는 의겸(義謙)으로 대사헌 청양군(靑陽君)인데 즉, 내가 어릴 때 본 대관이 바로 이 분이다. 근신들이 현상(賢相)이라 칭하면서 명경(明卿)들이 많이 귀의하여서는 충혜(忠惠)한 청양(靑陽)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 韓氏)로 충훈부 경력(忠勳府 經歷) 흥서(興緖)의 따님이다.
公은 가정(嘉靖) 癸亥(1563)에 태어나서 다섯 살에 백부(伯父)인 온양군수(溫陽郡守)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휘 인겸(仁謙)에게 출후(出後)⑤해서 청릉부원군의 제사를 받들었다. 양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형조좌랑(刑曹佐郞) 발(拔)의 따님이다. 그 당시는 인순왕후(仁順王后)께서 살아 있을 때이므로 공을 원구(元舅)⑥의 종손이라 하여 더욱 사랑하고 다르게 여겨서 은혜를 내리는 횟수가 다른 조카들과는 비길 수 없이 많았다. 나이 13세에 인순왕후가 죽자 공은 나물밥을 먹으면서 졸곡(卒哭)⑦을 지냈다고 한다. 庚辰(1530)년에 양아버지 온양공(溫陽公)의 상고를 당했고, 정해년(1587)에 친아버지인 청양군(靑陽君)의 상고를 당했다.
辛卯年(159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갑오년(1594)에 양어머니인 이씨(李氏)의 상고를 당했다. 앞뒤로 세 번이나 상고를 당했으며 집례(執禮)에 게으르지 아니했고 슬퍼하며 그 얼굴빛이 바뀌는 것도 모두 「적절함을 얻었다.」고 칭찬했다.
임진병란(壬辰兵亂)⑧ 이후로는 과거에 나갈 뜻을 끊고 음덕(蔭德)으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지만 즐겁게 취직하지 아니했다. 癸卯(1603)년에 처음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부임하여 질만(秩滿)⑨에 사섬시(司贍寺) 주부로 옮기고 丙午(1606)에 교하현감(交河縣監)으로 부임했으나 오래지 아니하여 사임(辭任)하여 교체되었다가 곧 옥과현감(玉果縣監)에 배명됐다.
다음해에 어사(御史)가 잘 다스렸다는 치적(治績)을 보고하였으므로 글을 내려서 아름다움을 포상했다. 己酉(1609)에 사직하고 돌아왔으나 이 해에 졸하니 나이 47세였다. 통진(通津)의 반이촌(盤夷村)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公은 기환(綺紈)⑩ 가에서 생장했으나 한 점의 분화기(芬華氣)⑪ 없이 고루(固陋)⑫에 능했다. 그것을 고유(固有)한 것인 양 알아서 비록 폐의악식(敝衣惡食)⑬을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체질(體質)이 홍중(洪重)⑭하고 도량(度量)이 넓고 깊어서 평상시 집에 있을 때도 혹 종일 말이 없다가 일이 생기면 사물을 대하는 데 있어서 화목함과 공경함을 아울러 행하였다. 벼슬에 나가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문부에만 힘써서 채찍이나 매질을 하지 아니하고도 과조(科條)⑮에 틀리지 아니하니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모하였다.
옥과(玉果)에 있은 3년은 고을이나 마을이 모두 편안하여 노래하고 칭송하여 기쁨이 흡족하였다. 거관(去官)⑯하는 날 군민(郡民)들이 울면서 길을 막아 말이 지나갈 수가 없었으므로 공은 거짓 다른 길을 따라서 갔다고 하며 백성들이 상의하여 돌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추모한다고 한다.
집에 거할 때는 효도하고 우애하였는데 특히 형을 섬기고 여동생을 대우하는데 두터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간언(間言)⑰할 수 없었다. 충혜(忠惠) 이하의 3世가 모두 편방(偏旁)⑱이 있었으나 모두 자식이 없어 공에게 의지하니 공은 예로써 대접하고 사사롭게 대하지 아니했다.
집이 대대로 전해 온 훈척(勳戚)으로 부(富)함이 한세상에 높았지만 대종(大宗)에 출후(出後)한 본가(本家)의 유산은 예축(豫蓄)됨이 없는 것과 같이 했고 또한 양가의 가재(家財)도 보니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고 해서 경기(經紀)⑲하지 아니했으며 비복(婢僕)이나 토지 전장은 분수에 따라 취해서 쓸 뿐 그 포루(逋漏)⑳되는 것은 묻지 아니했다. 사람들이 혹 자기의 소유라고 인식을 하더라도 또한 그 글을 힐난하거나 추문하지 아니했다. 만년(晩年)에 구업(舊業)이 점점 줄어들었으나 또한 개의(介意)하지 아니했다. 윤리(倫理)에 대한 큰 일이 아니라면 남에게 통지는 글이나 편지를 쓰는 일이 없으니 어떤 이는 고간(高簡)(21)으로 지목하였다. 내가 재상(宰相)이 되었으나 일찍이 문전에 읍객(揖客)(22)이 없었는데 공만이 홀로 더불어 항례(抗禮)(23)하여 항상 한번 만나면 서로 기뻐하여 소년 때와 같아서 비록 조인광좌(稠人廣座)(24) 중이라도 또한 그러한 모습으로 들어가지만 또한 다르게 여기지 아니하니 대개 그 기개(氣槪)가 뇌락(磊落)(25)함이 이와 같았다.
지금 이미 구원(九原)(26)에 가 있는데 어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부인은 능성 구씨(綾城 具氏)로 좌찬성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중된 문의공(文懿公) 사맹(思孟)의 따님이다. 7男4女를 낳으니 맏은 광세(光世)로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應敎)가 됐고, 다음은 정세(挺世)로 현감이며, 다음은 명세(命世)로 청운군(靑雲君)에 봉해졌다. 다음은 장세(長世)로 좌랑이며, 다음은 안세(安世) 필세(弼世)인데 모두 요절(夭折)했고, 다음은 희세(凞世)로 진사다. 맏딸은 유준(柳儁)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성여용(成汝容)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이식(李植)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이형(李亨)에게 시집갔다. 광세(光世)는 판서 황신(黃愼)의 딸에게 장가들어 4男2女를 낳으니 맏이는 은(檼)이니 진사요, 다음은 억(檍)이니 찰방(察訪)이요, 다음은 헌(櫶)이니 참봉이요, 다음은 총(棇)이다. 맏딸은 현감 임담(林쩕)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이집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의 아들에는 무(懋)와 덕과 여가 있다.
정세는 영돈녕인 김제남(金悌男)의 딸에게 장가들어 1男1女를 낳으니 아들은 진으로 참봉이요, 딸은 감찰 백홍일(白弘一)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서윤(庶尹) 김호수(金虎秀)의 딸을 재취(再娶)로 삼았다. 명세(命世)는 정랑 이유청(李幼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당(榶)을 낳았으나 딸과 함께 요절하여 희세(熙世)의 아들 추(樞)를 입양(入養)했다. 장세(長世)는 생원(生員) 성달선(成達善)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둘을 낳으니 맏은 이정영(李正英)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안세(安世)는 생원 윤흥파(尹興坡)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희세(熙世)는 현감 유대우(兪大佑)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둘을 낳았는데 맏은 신정(申晸)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며 현감 박안정(朴安鼎)의 딸을 재취하여 2男1女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유준(柳儁)은 1男1女를 낳았는데 아들은 두경(斗卿)이고 딸은 이축(李軸)에게 시집갔다. 성여용(成汝容)은 1男1女를 낳았는데 아들은 운한(雲翰)이고 딸은 도사 원진명(元振溟)에게 시집갔으며, 이식(李植)은 3男3女를 낳았다. 아들은 면하(冕夏)와 신하(紳夏)와 단하(端夏)요, 맏딸은 정전(鄭銓)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진사 안광욱(安光郁)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조비(趙備)에게 시집갔다. 증손에는 약해(若海)와 약명(若溟)과 약호(若湖)와 약한(若漢)과 약하(若河)와 약제(若濟)와 약기(若沂)와 약수(若洙)와 약사(若泗)가 있고 증손녀 내외와 현손(玄孫)인 남녀는 50여 인이 되지만 다 기록하지 못하다.
공께서 졸(卒)한지 15年만에 명세(命世)가 중흥을 익찬(翊贊)(27)하여 정사원훈(靖社元勳)(28)에 참례하여 공에게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겸 영경연관상감사청천부원군(領經筵觀象監事靑川府院君)이 추중됐다. 묘도(墓道)에 은혜로운 영작(榮爵)이 환연히 보기를 바꾸게 되었으니 어찌 적적한 결과라 아니하겠는가.
명하여 이르기를.
『어찌하여 큰 덕을 벼슬에 인색하고 명을 뺏어 감히 그렇게 빨랐는가? 심어 놓고 먹지 아니하면 그 자손이 거둔다는 그 이치만은 거짓이 아닐세.』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해창군 윤방은 글 짓고
수록대부 동양위 신익성은 전과 서를 아울르다.
숭정 7年 갑술 10月에 세우다.

주(註)
 ① 초츤(齠齕):이를 가는 나이, 즉 7·8歲 무렵. 또는 7·8세의 어린이.
 ② 엄의(嚴毅):엄숙(嚴肅)하고 굳셈.
 ③ 선군자(先君子):자기의 죽은 아버지 선인(先人) 또는 선친(先親).
 ④ 치약(穉弱):생육(生育)이 완전하지 못해서 여리고 나약함.
 ⑤ 출후(出後):입후(立後) 또는 출계(出系). 남의 집으로 입양(入養)되는 일. 즉 양자로 들어감.
 ⑥ 원구(元舅):국구(國舅)는 왕비(王妃)의 아버지로 임금의 장인. 원구(元舅)는 왕대비의 아버지 또는 전왕(前王)의 장인.
 ⑦ 졸곡(卒哭):상례절차(喪禮節次)의 하나. 장사 후 삼우(三虞) 다음의 제례(祭禮). 상주가 졸곡을 맞추어야 바깥출입을 할 수 있음.
 ⑧ 임진병란(壬辰兵亂):선조 25年(1592)에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대륙정복의 야망을 품고 우리 나라에 길을 줄 것을 요구하면서 침략한 난.
 ⑨ 질만(秩滿):지방수령(地方守令)의 임기(任期)가 3年으로 되어 있는데 그 임기를 채움. 즉, 과만(瓜滿).
 ⑩ 기환(綺紈):무늬 놓은 비단과 흰 비단. 전(轉)하여 화려한 옷감이나 의복 부귀가의 별칭.
 ⑪ 분화기(芬華氣):화려한 기운, 화미(華美) 스러운 분위기.
 ⑫ 고루(固陋):누추한 곳에서 당하는 고통(苦痛).
 ⑬ 폐의악식(敝衣惡食):헤어진 옷과 험한 밥,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나쁜 의식.
 ⑭ 홍중(洪重):넓고 무거움.
 ⑮ 과조(科條):과목(科目) 큰 사안(事案)과 적은 사안.
 ⑯ 거관(去官):벼슬자리에서 물러나서 집으로 돌아감.
 ⑰ 간언(間言):부자 또는 형제, 친척사이에 이간질하는 말. 즉 사이가 벌어지게 하는 말.
 ⑱ 편방(偏旁):작은 부인, 또는 측실(側室) 부실(副室), 또는 첩(妾).
 ⑲ 경기(經紀):순리대로 다스림. 또는 강기(綱紀), 기률(紀律).
 ⑳ 포루(逋漏):포흠(逋欠)과 누손(漏損). 포흠은 횡령(橫領)하는 것이고 누손은 경리 잘못으로 입은 손실. 부당한 방법에 의해 재물이 손실되는 일.
 (21)고간(高簡):성품이 고귀하면서도 간략(簡略)함.
 (22)읍객(揖客):예를 차리면서 찾아오는 손님. 청탁을 하지 않는 손님.
 (23)항례(抗禮):대등(對等)한 례, 또는 대(對)와 아(我)가 대등하게 교제하는 일.
 (24)조인광좌(稠人廣坐):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 계급이나 신분을 막론하고 사안을 매듭짓기 위해 모인 자리.
 (25)뇌락(磊落):씩씩하고 쾌활함.
 (26)구원(九原):구천(九泉) 저승, 사람이 죽어서 돌아가는 곳이 멀어 아홉 개의 언덕을 넘는 것과 같음에 비유한 말.
 (27)익찬(翊贊):정치를 도움. 또는 혁명을 도와서 반정(反正)을 성취함.
 (28)정사원훈(靖社元勳):정사는 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함. 원훈(元勳)은 그 일을 성취하는데 있어 가장 큰 공을 세운 으뜸가는 공신. 즉 나라가 잘못되어 내우외환(內憂外患)을 진정시켜서 나라를 바로잡은 공신들에게 주어지는 칭호. 즉 인조반정공신(仁祖反正功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