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시서령공(휘 서)묘갈명

평시서령공 휘 서 묘소
소재지: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능말)

묘 비 석


故平市令 贈吏曹參議沈公歿五十有五年公之孫原任大司憲檀卜吉於安城郡東嘉美屯負壬之原移葬公以媲 贈淑夫人綾城具氏合焉卽公之七代祖領議政諡安孝公諱溫之夫人安氏之墓側也越四年丁丑都憲公樹碣于墓狀公德行 瑞雨文之瑞雨贅于公家竊嘗耳濡於其家庭之傳者今觀都憲公之狀符而信矣遂不辭而敍之曰公諱諝字子賢系靑松靑城伯德符之後左通禮 贈吏曹參判諱達源京畿觀察使 贈領議政諱銓進士 贈司僕正諱友俊是爲公三世妣宋氏學生球之女恩津望族也以萬曆乙酉生公公天資篤厚事父母愉婉養志友愛兄弟日相對怡怡慈于子孫而敎育方呵責不及僕隸而畏不敢欺平生恭謹自飭不言人過惡量能鎭物雖在急遽之際辭色如常有綜理之才凡所規爲區畵皆燭照而契合不屑屑備儲而家用自給觴賓客哺困乏無惜也一時知公者咸以德器許公孤山先生尹公善道遇公熲旅一見知公爲長者遂結潘楊之好都憲公卽其外孫也始公以孼叔株累編管北塞又移南邑流離十載至長陵改玉宥還然廢擧歛跡晩就蔭仕初授繕工監監役陞司僕寺主簿司憲府監察南平縣監平市署令所歷皆稱職有聲崇禎十三年庚辰七月考終于公州村舍享年五十六嗚呼公之才如是德如是而官與壽止於是是豈非命也歟具夫人 贈吏曹參判諱光源之女柔惠奉舅姑事夫子無違癸卯卒壽至七十九四男三女長男光謂都事次光濟儒士次光沔贈參判次光涑監役女適宋之弼進士次適李廷機文科牧使次適李 儒士光渭二男二女男長橒士人次欞武科通政府使女適李瑞雨文科參判次適崔柱華光濟二女朴昇韓益望光沔二男長柱生員次檀文科大司憲光涑一男四女男杓僉使女林泰元柳必昌柳春元李晟參奉李廷機繼子重潁四女崔慶涵洪叙揆崔慶中文科掌令兪任重郡守李二女沈渙金文郁橒三子得昌得鼎得圭進士欞一子得哲一女柳摠李瑞雨三男三女男正觀參奉次碩觀弘觀皆進士女尹彙昌姜碩勛申命濟皆進士崔柱華二男三女男煊女金啓煥金聖甲皆進士李台躋朴昇四男一女男希尹進士希顔希參希益女宋儒碩韓益望二男二女持憲守憲女沈泂李思敬檀四男三女男得天文科正字次得經生員得行得成女李相琦柳泰章進士朴興新杓一男二女男得中女李雲開愼光勳銘曰
是惟沈公之墳公有賢孫大公之門積德以昌後來者徵于斯文
孫婿嘉善大夫前工曹參判兼藝文館提學 李瑞雨 撰
孫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 檀 敬書
崇禎紀元後 七十八年 乙酉 四月  日立

12세조 증이조참의 평시서령공 휘 서(諝) 묘갈명
옛 평시령 증이조참의 심공이 돌아가신지 55年만에 公의 孫 원임(原任 前官) 대사헌 단(大司憲 檀)이 吉한 날을 가려서 받아 안성군 동가미둔 임좌원(安城郡 東嘉美屯 壬坐原)에 공을 이장하고 배위 증숙부인 능성구씨(贈淑夫人 綾城具氏)를 합장하였으니 곧 공의 7代祖 영의정이요 시호가 安孝公인 휘 溫의 부인 안씨의 산소 곁이다. 4年을 지나 정축년에 도헌(都憲 大司憲)공이 묘소에 비석을 세우려고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서우(瑞雨)에게 와서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하니 서우는 공의 집의 사위로 그 가정에서 전해 내려오는 일을 일찍이 귀에 젖어 알았는데 지금 도헌공이 가지고온 행장과 꼭 들어맞았다. 드디어 사양하지 않고 서술하니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서(諝)요 字는 자현(子賢)이며 관향은 靑松이고 청성백 덕부(靑城伯 德符)의 후손이요 좌통례 증이조참판 휘 달원(左通禮 贈吏曹參判 諱 達源)과 경기도관찰사 증영의정 휘 전(京畿道觀察使 贈領議政 諱 銓)과 진사 증사복시정 휘 우준(進士 贈司僕寺正 諱 友俊)은 공에게 상 3世가 된다. 어머니는 宋씨니 학생 구(球)의 따님으로 恩津의 명망있는 종족이다.
萬曆 乙酉年에 공을 낳으니 공이 천성이 후덕하고 부모를 섬기되 평화롭고 즐거운 얼굴빛으로 뜻을 받들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날마다 즐겁게 서로 대하고 자손을 사랑하되 엄하게 교육하여 두려워서 감히 속이지 못하도록 하였다. 평생동안 공손하고 스스로 삼가하며 사람의 잘못을 말하지 않고 도량이 커서 비록 급히 서두를 일이 있어도 말과 얼굴빛이 평상시와 같아 전체를 모두 잘 다스리는 재주가 있었다. 모두 꾀하는 바를 구별하여 획정(劃定)하는 것이 확실하게 들어맞았고 자질구레하게 비축하지 않아도 가용은 넉넉하여 빈객을 접대하는데 아쉬움이 없었다. 그래서 한때 공을 아는 사람은 모두 덕과 재능이 있다고 하였다. 고산(孤山)선생 尹公 선도(善道)가 공을 여관에서 만나 한번보고 공의 덕망이 높은 것을 알고 인척관계를 맺었으니 도헌공이 그 외손이다. 처음에 공이 서숙 주(庶叔株)의 일로 여러 번 북쪽 변방으로 귀양갔다가 또 남쪽 고을로 옮기는 등 10年동안을 이리저리 헤매이다가 仁祖가 反正하자 귀양에서 풀려 돌아왔으나 과거보는 일을 그만두고 자취를 감추었다가 만년에 음사(蔭仕)로 처음 선공감 감역에 임명되었고 사복시 주부에 승진되었으며 사헌부 감찰과 南平현감과 평시서령을 지냈으니 역임한 바가 벼슬에 알맞아 명성이 있었다. 숭정(崇禎)13年 庚辰7月에 公州의 村舍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56이었다. 아! 공의 재주가 이와 같았고 덕이 이와 같았으나 벼슬과 수(壽)는 여기에서 그쳤으니 이것이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 具夫人은 증이조참판 휘 光源의 따님으로 유순하고 인자하여 시부모를 잘 섬기고 남편의 뜻을 잘 받았다. 계묘년에 돌아가시니 수가 79요 4男3女를 두었으니 장남은 광위(光渭)니 都事요 2男은 광제(光濟)니 유사(儒士)며 3男은 광면(光沔)이니 참판에 증직 되었고 四男은 광속(光涑)이니 감역이었다. 장녀는 진사 송지필(宋之弼)에게 출가하고 2女는 文科에 급제하여 목사(牧使)인 이정기(李廷機)에게 출가하였으며 3女는 유사 이담(李)에게 출가하였다. 광위가 2男 2女를 두었으니 장남은 운(橒)이니 士人이요 2男은 영(欞)이니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부사(通政府使)며 장녀는 문과 급제하여 참판인 이서우(李瑞雨)에게 출가하고 2女는 최주화(崔柱華)에게 출가하였다. 광제가 2女를 두었으니 박승(朴昇)과 韓益望에게 출가했고 광면이 2男을 두었으니 장남은 주(柱)니 생원이요 2男은 단(檀)이니 문과 급제하여 대사헌이다. 광속이 1男 4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표(杓)니 첨사(僉使)요 사위는 임태원(林泰元) 유필창(柳必昌) 유춘원(柳春元) 이성(李晟)은 참봉이다. 이정기의 系子는 중경(重熲)이요 사위 네 사람은 최경함(崔慶涵) 홍서규(洪敍揆) 최경중(崔慶中)은 문과 급제하여 장령(掌令)이요 유임중(兪任重)은 군수이다. 담()은 사위 둘이 있으니 심환(沈渙) 김문욱(金文郁)이다. 운의 세 아들은 득창 득정 진사 득규(得昌 得鼎 進士 得圭)요 영의 한 아들은 득철(得哲)이요 한 사위는 유총(柳摠)이다. 이서우가 3男 3女를 두었으니 장남은 정관(正觀)이니 참봉이요 2男 석관(碩觀)과 3男 홍관(弘觀)은 모두 진사이고 사위는 윤휘창 강석훈 신명제(尹彙昌 姜碩勛 申命濟)니 모두 진사이다. 최주화가 2男 3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훤(煊) 헌()이요 사위 김계환(金啓煥)과 김성갑(金聖甲)은 진사이고 셋째 사위는 이태제(李台躋)이다. 박승이 4남 1女를 두었으니 장남은 진사 희윤(希尹)이요 2男은 희안(希顔)이고 3男은 희삼(希參)이며 4남은 희익(希益)이요 사위는 송유석(宋儒碩)이다. 한익망이 2男 2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지헌 수헌(持憲 守憲)이요 사위는 심형(沈炯)과 이사경(李思敬)이다. 단이 4남 3女를 두었으니 장남은 득천(得天)이니 문과급제하여 正字이고 2男은 득경(得經)이니 生員이며 3남은 득행(得行) 4남은 득성(得成)이며 사위는 이상기(李相琦) 진사 유태장 박흥신(柳泰章 朴興新)이다. 표(杓)가 1男 2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득중(得中)이요 사위는 이운개(李雲開)와 신광훈(愼光勳)이며 명(銘)은 다음과 같다.
여기는 심공의 무덤으로 공은 賢孫이 있고 큰 벼슬을 지낸 가문에서 덕을 쌓아 번창하였으니 뒤에 여기에 오는 자는 이 글을 증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손서(孫婿) 가선대부 전 공조참판겸 예문관 제학 李瑞雨가 짓고
孫 가선대부 전 사헌부 대사헌 檀이 삼가 씀.
崇禎紀元後 78年 을유4四月 日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