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감찰공(휘 돈)묘갈

감찰공 휘 돈 묘소
소재지: 충주 살미면 대화동

묘 표 석


十二世祖 通訓大夫 司憲府監察 沈公 諱 暾 墓碣
沈公暾字景賓靑松人靑城伯德符之後也有諱順門議政府舍人 贈領議政是生諱逢源同知敦寧府事 贈左贊成是生諱鍵承文院正字 贈領議政是生諱昌壽卽公之先考也行軍器寺僉正 贈吏曹叅判乃一松先生左議政喜壽之介弟也叅判公生公於萬曆乙亥十二月二十七日而丙子立春入於二十六日故以丙子生稱之妣 贈貞夫人茂松尹氏成均典籍之瑞之女也公年十八叅判公下世貞夫人遘癘染疾痛至於九而公終始不離側而終不染病世稱孝感所致也奉慈闈至誠待兄弟盡篤性又勤讀論孟皆至千遍遇世衰無公道遂廢業爲養拜 靖陵參奉己酉丁內艱服闋又 除齋郎轉司饔院奉事繕工監直長其在司饔也造御用磁器在繕工也監刈鴨島正薍此皆利窟而毫無入己聞者莫不稱歎戊午陞出六品拜司憲府監察其後余以妹婿忝居是職愍余應遞托以妻母歸葬仍以不仕盖爲其妹之貧窶而失祿故也門中尤爲歎服焉庚午除鎭岑縣監未及謝恩前官仍任以此作散知音少且無援引鏟彩埋光蟄伏山野庚辰二月二十日以疾考終于忠州之本第享年六十有六痛哉葬于本州東面大化洞艮坐坤向之原配淑夫人延安李氏義興縣監獜瑞之女配君子無違德訓諸子得母道甚公兆附窆配淑人平海黃氏同中樞輔仁女閨範懿德聞于鄕黨異窆於同面梅南里壬坐之原李氏生三男儒宗儒弘儒宏儒宗娶縣監趙希孟女生櫟儒弘娶主簿兪後曾女生三男長曰栻(延日公初諱)次次杓儒宏娶府使李命達女時無子女黃氏生二男二女男長儒達次儒績女長適朴廷亨次適趙以起儒達娶全州李長慶女後娶全義李仲元女生 儒績娶原州元延祥女生三男長次柲次當其葬也諸孤請銘幽竁余以不文辭未幾伯仲兩孤先逝儒宏又來泣告曰二兄不幸而夭姪亦久病墓道闕表今當立石而先君介跡無可紀錄敢再瀆云言甚懇惻噫公之志行非我其誰知之若能展布則所及豈淺淺哉而略無所試可慟矣第余之壯也述才猶不如人况年逾八十文通之錦夢還己久安敢援筆曾與公結爲兄弟三十餘年又辭則情所不忍氣血衰弱力難峻拒忘陋즤拙操末續顚銘則不敢敍以終焉

嘉善大夫前同知中樞府事 金孝建 撰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朴廷亨 謹書


12세조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심공 휘 돈(暾) 묘갈
沈公 돈(暾)의 자는 경빈(景賓)이니 靑松사람이요 靑城伯 덕부(德符)의 후손이다. 휘 순문(順門)이 있으니 議政府 舍人으로 증직이 領議政이요 이 분이 휘 봉원(逢源)을 낳으니 동지돈녕부사로 증직이 좌찬성이요 이 분이 휘 건(鍵)을 낳으니 承文院正字로 증직이 영의정이요 이 분이 휘 창수(昌壽)를 낳으니 즉 공의 선고이니 행직이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이요 증직이 이조참판이니 一松先生 좌의정 희수(喜壽)의 아우이다. 참판공께서 공을 만력 乙亥(1575)년 12月27일에 낳았는데 다음해 丙子(1576)년 立春이 26일에 들었으므로 병자생으로 칭했다. 어머니는 증정부인 무송(茂松)尹氏니 성균 전적 之瑞의 따님이다. 공의 나이 18세에 참판공이 下世하고 정부인께서 전염병에 걸리어 아홉 번에 이르렀는데 공이 시종여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시탕했으나 마침내 전염되지 않으니 세상에서 효에 감동한 소치라고 했다. 자친을 봉양하되 지성으로 하며 형제를 대함에도 돈독한 우애를 다하고 또 논어와 맹자를 부지런히 읽어서 다 천번에 이르렀다.
말세를 만나 公道가 없으매 과업을 폐기하고 봉양하기로 일을 삼았다. 정릉(靖陵:中宗의 능)참봉을 배수하고 己酉(1609)년에 어머니 상사를 당하고 복을 벗으매 또 참봉을 제수했으며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선공감직장(繕工監直長)으로 전직되었는데 그 사옹원에 있을 때에는 궁중에서 쓰는 자기(磁器)를 제조했으며 선공감에 있을 때에는 압도(鴨島)에서 갈대 베기를 감독했으니 이것이 다 영리의 소굴인데 터럭 끝 만치도 자기의 수입을 삼음이 없으니 듣는 자가 칭찬하지 않음이 없었다.
戊午(1618)년에 6品으로 승진되어 사헌부감찰을 배수했는데 그 후에 내가(작자의 자칭) 매서(妹婿)로써 이 관직에 있게 되면 나를 민망히 여기어 응당 체직할 것이라 하여 妻母 장사에 가본다 하고 인하여 벼슬을 그만 두었으니 대개 그 매서가 가난한데 관록을 잃을까 염려함이라 문중에서 더욱 탄복했다. 庚午(1630)년에 진잠현감(鎭岑縣監)에 제수함에 미쳐 謝恩하지 못하고 전관(前官)에 유임하게 되니 이로써 한산하여 알아주는 자가 적고 또 이끌어줄 자도 없으매 빛을 감추고 山野에 엎드려 살았다. 庚辰(1640)년 2月20日에 질병으로 충주자택에서 고종(考終:명으로 돌아감)했으니 향년이 66世이다. 본 고을 동면 대화동 간좌 곤향의 언덕에 안장했다.
배위는 淑人 延安李氏니 인서(獜瑞)의 따님이다. 군자(남편)를 배필하매 덕을 어김이 없고 여러 자식들(諸子)을 교훈하되 현모의 도리를 다했으며 공의 묘소에 합부하고 재취 배위는 平海黃氏니 동중추 보인(同中樞 輔仁)의 따님인데 규중범절이 향당에 알려졌다. 같은 면 매남리 임좌의 언덕에 각장했다. 이씨는 3男을 낳았으니 유종, 유홍, 유굉(儒宗, 儒弘, 儒宏)이다. 유종은 현감 조희맹(趙希孟)의 딸에게 장가들어 역(櫟)을 낳았고 유홍은 주부 유후증(兪後曾)의 딸에게 장가들어 3男을 낳으니 장남은 식(栻:연일공)이요 다음은 성()이요 다음은 표(杓)이며 유굉은 부사 李命達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때에 자녀가 없었다. 黃氏는 2男2女를 낳았으니 유달 유적(儒達 儒績)이요 두딸은 朴廷亨 趙以起에게 각각 시집갔다. 유달은 全州 李長慶의 딸에게 초취하고 全義 李仲元의 딸에게 후취하여 후()를 낳았으며 유적은 原州 元延祥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3男을 낳았으니 장남은 학()이요 다음은 필(柲) 집()이다. 장사지낼 때에 여러 자제들이 묘지명(墓誌銘)을 청하는데 내 글을 못하므로 사양했더니 얼마 안되어 伯·仲 두 자제가 먼저 세상을 버리었다. 유굉이 또 와서 울면서 이르기를 두 형이 불행히 요절하고 조카도 또한 오랜 병이 있는데 묘소에 표석이 궐하였으므로 이제에 입석하려 하매 先君의 사적을 기록함이 없으니 감히 두 번째 청합니다 하매 말이 간절하였다. 슬프다. 공의 뜻과 행실을 내가 아니면 그 누가 알겠는가? 만일 능히 펴게 되었은즉 미치는 바가 어찌 적다 하리오. 시험해 봄이 없으니 진실로 가히 통탄할 일이다.
내가 장성했을 적에도 글 짓는 재주가 남만 같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나이가 80이 지나니 글을 짓는 꿈도 꾸지 못한 제가 이미 오래인데 어찌 감히 붓을 대겠으랴 일찍이 공으로 더불어 형제를 맺은 지가 30여년이다. 또 사양한즉 정리에도 차마 못할 것이며 기혈이 쇠약하여 구지 거절하기도 어려우므로 고루함을 잊고 근근히 얽어서 두미를 가릴 뿐이요 명사(銘辭)인즉 감히 서술하지 못하고 마친다.

가선대부 전 동지중추부사 김효건(金孝建) 지음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박정형(朴廷亨)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