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천부사공(휘 종침)묘갈명

숙천부사공 휘 종침
소재지: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만사공 산소 상단)

묘 표 석


肅川府使沈公諱宗忱墓碣銘
少司徒沈君狀其王父母行請銘墓石辭老病歲中兩以書至曰前旣有成言矣幸母已諾於逝者余終不得辭按公諱宗忱字士誠靑城伯德符之後祖諱光彦左叅贊考諱錦司憲府監察妣驪興閔氏判官希說之女靑城之沈爲世甲族而殿中公娶於禁臠之門公之先夫人與尙憲先君子俱系宣陵外裔譜聯玉牒親爲再從敦睦之風仍世不替公遇我特厚開示悃愊不以少長爲間也公之兄弟七人倫序居次伯判決公喜交遊臧否人物弟利川君翩翩豪擧有丈夫氣竹西君詩才吏幹見長於時而至推謙愼自牧歛華就實蔚然稱完厚長者則咸歸之公公始從事藝業屢擧不遂以蔭補司贍寺叅奉坐事罷擧能爲天將接待都監卽廳久勞陞六品除掌隸院司評出爲恩津縣監會有潢池之警易武吏見代除安陰縣監屬疾棄歸叙爲翊衛司司禦陞翊衛歷軍器寺僉正出爲林川郡守前守仍任不赴拜礪山郡守罷歸任宮闕都監有能聲拜繕工監僉正陞爲肅川府使言路論驟躋枳之拜慈山郡守用前任都監勞加緋玉尋罷歸到黃州適竹西君方爲通判愍公暑行挽止待秋已遇疾卒于旅舍實萬曆甲寅七月十七日距其生嘉靖癸丑享年六十二用是年十二月某日歸葬坡州分水院北坤向之原公早喪父母又喪繼母廬墓盡禮少鞠於季父及其歿哀戚如親喪友愛同氣至老不衰撫恤宗黨雖賤不遺以此尤爲人所稱夫人丹陽禹氏高麗侍中玄寶之後名有婦德先公四年生後公十年歿祔葬公墓之左擧二男二女長曰偰四山監役次曰繕工監役偰娶宗室靑原都正侃女生二男三女男長之源文科戶曹叅議卽請銘者秀雅恬穆爲儕類所重前娶權氏生子女俱夭取同宗子權爲後再娶尹氏生二男一女枰柟女幼次之泓生三女皆幼女長適生員尹忠得次適叅奉姜恰生三男一女男鄗郈邵女幼次適元枯娶郡守柳楯女生六男二女男長之瀗次之淳之濯之泛之灌之渟之濯一男楫之泛一男三女男格之灌二男一女之渟一男皆幼女適李潗生三男材吉柱吉梯吉內外孫四十餘人判決名宗道利川名宗敏竹西宗直號也銘曰
名德之家循良之風嶷嶷其表恂恂其中秩二千石可不謂通壽六十强可不謂長子孫振振有賢有良宮于吉壤後福無疆

議政府左議政 金尙憲 撰
刑曹判書   吳 竣 書


숙천부사심공휘종침묘갈명(번역문)
소사도(少司徒) 심군이 그 조부모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묘석(墓石)의 명(銘)을 청했다.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했으나 한해에 두 번이나 글을 보냈다.
『전에 이미 말을 하였으니 바라건대 죽은 사람에게 허락한 것을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므로 끝내 사양할 수가 없었다.
상고해 보니, 공의 이름은 종침(宗忱)이요, 자는 사성(士誠)이니,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후손이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광언(光彦)으로 좌참찬을 지냈고 아버지의 이름은 금(錦)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판관 희설(希說)의 딸이다. 청송 심씨는 세상의 갑족(甲族)이 되었고 전중공(殿中公)①이 금연(禁臠)의 문중에 장가들었는데 공의 어머니와 상헌의 선군자(先君子)②는 모두 선릉(宣陵)③의 외손이 된다. 족보가 옥첩(玉牒)④에 관련되어 직접 재종간의 친척이 되니 두텁고 화목한 관계는 대를 이어도 변함이 없었다.
공은 특히 나를 후대하여 정성스러움을 다했으며 나이를 가지고 간격을 두지 아니했다. 공의 형제는 일곱인데 순서로 두번째에 해당된다. 백형인 판결공(判決公)은 교제를 좋아해서 인물을 가리지 아니했고, 아우 이천군은 훨훨 날듯 호쾌하여 대장부의 기상이 있었고, 죽서군(竹西君)은 시재(詩才)와 이간(吏幹)이 당시에 돋보였으나 지극히 겸손하고 조심하여 스스로 화려함을 거두고 참으로 울연(蔚然)함을 성취하여 완후장자(完厚長者)⑤라는 칭찬을 들었는데 모두 그것을 공에게 돌렸다.
공이 처음 예업(藝業)⑥에 종사하였으나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고 음직(蔭職)⑦으로 사섬시 참봉이 되었으나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뒤에 능력을 인정받아 천장접대도감(天將接待都監)의 낭청(郞廳)으로 추천되어 오래 종사한 공으로 육품에 승급하여 장예원 사평이 제수되었다. 은진(恩津)현감으로 나갔는데 황지(潢池)⑧의 경계가 있다고 해서 무인(武人)과 교대하고 안음(安陰)현감으로 옮겼다.
얼마 뒤 병이 들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가 병이 낳은 뒤에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로 서용(叙用)되고 이어서 익위로 승격했다. 군기시 첨정을 지내고 임천(林川)군수로 나갔으나 전군수가 재임명되었기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고 여산(礪山)군수로 나갔다가 파직되어 돌아왔다. 궁궐 도감이 되어 일을 잘 처리했다는 말 때문에 선공감 첨정이 되었다가 숙천(肅川)부사로 승진해서 나갔다. 간관들의 논란 때문에 진로에 지장이 생겨 자산(慈山)군수로 변경되었으나 전임의 도감 때 공로로 인해 비옥(緋玉)⑨이 추가되었다.
얼마 뒤 파직되어 돌아오다가 황주(黃州)에 도착하니 때마침 죽서군(竹西君)이 통판으로 있었는데 공이 더위에 가는 것을 민망하게 생각해서 만류하고 가을을 기다리게 했다. 그러나 병을 얻어 여사(旅舍)에서 죽으니 그 때가 갑인(甲寅:1614)년 7월 17일이었다. 그가 출생한 것은 계축(癸丑:1553)년이니 향년 62세이다. 이하 12월 어느날 파주의 분수원(分水院) 북쪽 건좌곤향의 언덕에 귀장(歸葬)⑩했다.
공이 일찍 부모를 여의고 또 계모마저 잃은 뒤 여묘(廬墓)에서 예를 다했다. 어려서 작은 아버지 손에 길러졌는데 그 계부(秀父)⑪가 죽자 슬퍼함이 친상(親喪)을 당한 것과 같았다. 동기간에 우애가 지극해서 늙을 때까지 쇠하지 아니했으며 친척을 구원해서 비록 천해도 빠드리지 아니했다. 이러한 일 때문에 더욱 사람들이 칭찬했다.
부인은 단양 우씨로 고려시중 현보(玄寶)의 자손이다. 부덕이 있었는데 공보다 4년 먼저 출생했고 공보다 10년 뒤에 죽어서 공의 묘 왼쪽에 부장(쯊葬)했다.
2남2녀가 있는데 맏아들을 설(偰)로 사산감역을 지냈고 둘째 아들은 석으로 선공감역을 지냈다.
설(偰)은 종실인 청원도정 간(侃)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3녀를 낳았다. 맏손자 지원(之源)은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의를 지냈는데 곧 나에게 명(銘)을 청한 사람이다. 수아(秀雅)하고 화목해서 재류들이 소중히 여겼다. 먼저 권씨에게 장가들어 자녀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했고 같은 일가의 아들 권(權)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다. 윤씨와 재혼해서 2남1녀를 낳았는데 아들들은 평(枰)과 남(柟)이며 딸은 어리다. 둘째 손자 지홍(之泓)은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맏딸은 생원 윤충득(尹忠得)에게 출가했고, 둘째 딸은 참봉 강흡(姜恰)에게 출가해서 3남1녀를 낳으니 아들은 호(鄗)와 후(郈)와 소(邵)요, 딸은 어리고, 셋째 딸은 원륜에게 출가했다.
둘째 아들 석은 군수 유순(柳楯)의 딸에게 장가들어 6남2녀를 낳으니 맏손자는 지헌(之瀗)이요, 둘째 손자는 지순(之淳)이요, 셋째 손자는 지탁(之濯)이요, 넷째 손자는 지옥(之沃)이요, 다섯째 손자는 지관(之灌)이요, 여섯째 손자는 지현(之灦)이다. 지탁의 한 아들은 즙(楫)이다. 지폄은 1남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격(格)이다. 지관은 2남1녀를 낳았다. 지정은 1남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딸은 이집(李潗)에게 출가해서 3남을 낳으니 재길(材吉)과 주길(柱吉)과 제길(梯吉)이며 내외손을 합하면 40여 명이나 된다. 판결의 이름은 종도(宗道)요. 이천(利川)의 이름은 종민(宗敏)이며, 죽서(竹西)는 종직(宗直)의 호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이름과 덕이 있는 집에는 순량(循良)⑫한 가풍이 있다.
그 밖에서 보기에는 높기만 하고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진실하구나.
이천 석(2千石)의 자리를 가지고도 통할 수가 없다고 한다.
수는 60세가 조금 넘었으니 오래 살았다고 할 수가 없다.
자손들이 번성하여 어진 이도 있고 착한 이도 있다.
좋은 터에 묘를 쓰니 후복이 끝이 없다.

의정부좌의정 김상헌 찬
형조판서   오 준 서


註① 전중공(殿中公):종침의 아버지 감찰공.
② 선군자(先君子):죽은 아버지의 별칭.
③ 선릉(宣陵):성종의 묘호. 비유하여 성종.
④ 옥첩(玉牒):왕가의 족보. 선원보.
⑤ 완후장자(完厚長者):인격이 완전한 덕이 두터운 어른.
⑥ 예업(藝業):과거 공부. 유학에서는 근본목적이 위기(爲己)에 있기 때문에 출세를 위한 공부는 예업이라 함. 즉 과거공부. 공거업
⑦ 음직(蔭職):공신의 자식이 받는 특채. 정상적인 채용시험을 거치지 아니함.
⑧ 황지(潢池):저수지. 협착한 토지. 황지의 경계는 저수지의 붕괴 우려.
⑨ 비옥(緋玉):비단과 구슬. 비유하여 붉은 관복을 입는 관원. 五품 이상.
⑩ 귀장(歸葬):객지에서 죽은 시신을 고향으로 모셔다가 장사지냄.
⑪ 계부(季父):작은 아버지. 옛날 형제의 순서를 백·중·숙·계(伯仲叔季)의 네 가지로 구분함.
⑫ 순량(循良):순수하고 어진 것. 속세의 때가 묻지 아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