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감사공(휘 연)묘갈명

감사공 휘 연 묘소
소재지: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선영하

묘 표 석


仁祖二十四年三月三日咸鏡道觀察使沈公卒于臬司訃聞大夫士齎咨涕洟相吊而曰鼎軸之哭亡矣朝野之望虛矣國無善人將若之何至今九載猶慕說如一日也公胤瑞肩泣謂 曰縣綷之銘旣託于吾先執趙太史絅惟是墓前之石之陰不可無辭子與吾先君年輩雖有間而同立朝周旋備知行治且吾先君嘗稱子文故屬之子 禮辭不獲遂受狀狀出沈學士大孚手學士於公爲從祖叔父而齒德則齊生平許以知己其言核而無溢是惇史也何加焉謹剟其槩而爲之叙公諱演字潤甫靑松人鼻祖洪孚麗衛尉丞其後有曰德符爲左侍中封靑城伯其子曰溫領議政靑川府院君是爲公曾祖王考諱嶐折衝護軍贈左承旨考諱大亨進士贈兵曹叅判妣淸州韓氏贈貞夫人進士贈參判重謙之女以萬曆丁亥十月十八日癸酉擧公公生而岐嶷旣學而文理夙成年未勝冠連喪考妣依於其外氏篤行力學其伯叔祖久菴百謙柳川俊謙咸器重之壬子中進士甲子之變與儒冠數輩從駕公州朝廷錄之除內侍敎官駕還不仕丙寅除獻陵參奉秋廷對第一公名籍甚而以榜中人多考官子弟論罷其榜丁卯之難又從駕江都除造紙別提禁府都事駕還又不仕是歲九月登明經第第二例授司贍直長冬陞六品自是以後歷敭華顯出入內外外則爲慶尙道都事又爲試才御史爲全羅道敬差官內則於成均再爲典籍一爲直講於秋官三爲佐郞於春官再爲佐郞四爲正郞諫院則爲正言者二獻納者一憲府則六爲持平春坊則於司書四實二兼一爲文學玉堂則由副修撰副校理四爲校理癸酉夏昌德宮有修繕之役公爲都廳摠其務者悉以委之秋七月工告訖上懋其能特加通政階九月出補光山縣監光故湖南大州降爲縣號難治盖試公以吏事也至之日立辨三大訟於是遠近疑獄畢集剖斷如神民情畏服其爲情務在寬仁而濟之以嚴單赤大蘇豪武皆伏詔使至而人不知量田行而境不騷甲戌州復公仍爲牧使旣去而立石追思論官之廉德善政必曰沈爺沈爺乙亥冬擢拜慶尙道觀察使丙子十二月西難猝發兵徵諸道公聞命憤涕卽傳令左右道各以所部赴難節度使許完閔栐皆聞命卽至公以牙兵千餘屬中軍崔彦與之俱行踰嶺疾趨公先己身至尙州將繼兵轉糧俄有報南漢圍急卽以道內諸事屬都事且令二從事分管左右通南北命脉自領參佐守令察訪願從者及褊裨餘兵厪百數踰嶺至利川督戰益嚴二節度兵三萬有餘丁丑正月二日至雙嶺期以朝日薄城晨敵大至兩陣繼衄將死軍殲公欲進無兵退次聞慶招集再擧前軍已踰嶺而平城圍解言者追論諸道方伯濫及公卒以譴謫臨陂戊寅命宥未幾起廢爲濟州牧使州在絶海距京師窵遠又産良馬明珠皮革及他珍異物百工技巧無不有而用武弁爲倅率多暴征虐使民苦侵漁工老於官公至則一皆反之唯上供是正珠藏在淵馬群不空工柝緣畝虞不卽鹿逐條積弊請於朝而蠲之又記良法俾爲永式島中父老相告語曰自有吾州以來未聞有如我公者前此賢倅或有惠政而直以歲月計耳今公之德及我子孫何可忘也公去而一州號呼以泣遂樹銅碑于官道里坊各立石頌德及聞其歿哭之甚哀涉海歸賻庚辰受代以備邊堂上還朝特拜漢城府右尹實嘉耽羅之績而用增秩之典焉辛巳三爲承政院都承旨復爲右尹再受命爲兩西都巡察使爲兵曹參判司諫院行大司諫壬午三月拜平安道觀察使九月以西喝逮旋與諸宰入鳳凰城坐對事己東歸朝廷因使者言黜于門外期而乃敍拜京畿觀察使甲申移拜咸鏡道觀察使公慨然以固邦本壯北門爲急卽備銀千五百兩免民鉅役又發營穀以賑飢民治行升聞有賜馬之命凡所以修城繕甲興學育才之道靡不講究張弛未半而疾作至丙成春益 乞解甚力不許竟不起北民哭送歸櫬立石于道界之安邊以其年五月二十二日葬于龍仁先兆山義谷坐坤之原公前配海州吳氏都正允諧之女賢有婦德載其墓表贈貞夫人是生瑞肩進士今官司宰監直長後配宗姓李氏佐郞師閔之女封貞夫人淑愼儀範曉暢義理始歸而直長尙孩懷而子之人不知其不出於己二十四年克敬克相遵志率事存沒靡間法宜附書直長贅于吾家吾先考牧使公與公同年生相知最深故以其女爲公子婦有三男四女皆幼男曰得元胤元三元公天資俊偉器度淵深凝嚴之象望之有畏和昜之色卽之可愛誠心忠孝砥礪名節當事而行不慕其外不惕於威不疚於利在臺閣不苟徇時好以求合不爲過情之行刻核之論以要名沽直惟振綱維持風采是務經幄善講說論思與贊聖化春坊以至誠輔道冲儲至於鳳凰之畏不以死生易其辭領南之王勤雖成敗有數忠憤未效而六十七城千里之廣間變七日卷甲赴難又能敢義氣而再奮斯其偉矣公素侍參判公疾一年夙夜不少懈參判公稱其至孝旣貴常以祿不及養爲終身痛事外王母誠敬俱至與弟今觀察使澤友愛出倫敎導有方卒至立揚有一妹早歿視甥如子王考承旨公愛之甚特優以僮指公竟柝與弟妹公之於內行亦可謂備矣學士之狀如右此非學士之言卽輿誦同辭而抑余不佞窃嘗論公以爲公之厚德則渾然如方春和氣雅量則汪汪若千頃波其才遇盤錯而愈利其忠不擇夷險而能盡職求之古人鮮有其匹况于眇然斯世唶今己矣際會明時自結知遇十四年中身致宰列此可以見君臣矣天故生之而迺奪之遽者何也嗚呼惜哉遂爲銘銘曰
斯之爲蜚英文苑斯之爲褒然首選斯之爲獻納論思之彦斯之爲良二千石斯之爲古之方伯斯之爲通材鉅德六褎而止亞卿而止有不止者令名永斯之爲全歸之君子藏于是
大司成 黃   撰

12세조 경기감사공 휘 연(演) 묘갈명
인조 24年(1646) 3月3日 함경도 관찰사 沈公이 현청(縣廳)에서 죽었는데 부음이 조정과 선비모임에 들리자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다.
『재상감이 죽었으니 朝野의 희망이 헛되었도다. 나라에 훌륭한 사람이 없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을고.』
그로부터 9年이 지난 지금까지 끈덕지게 사모하는 말들이 한결같았다. 공의 아들 서견(瑞肩)이 찾아와 울먹이면서 나에게 말하였다.
『아버지의 명(銘)을 이미 선친(先親)의 친구이신 조태사(趙太史) 경(絅)에게 부탁하였으나 묘 앞에 세울 돌의 비음문(碑陰文)①은 없어서는 안됩니다. 황공(黃公)께서는 우리 선군(先君)②과 연배간이니 비록 간격은 있었으나 같이 조정 일을 보시고 모든 이력을 고루 아실 것이고 또 先君께서 황공의 문장을 말씀하신 까닭에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예의상 사양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어 가장(家狀)을 받아보니 글이 심학사 대부(大孚)의 손에서 나왔는데 심대부는 바로 공의 종숙이나 연령과 덕행은 같았다. 평생을 지기(知己)③로서 마음을 나누었으나 그 말씀이 핵실(核實)하고 넘침이 없었으니 이것이 진실한 역사인데 무엇을 더 보태리오. 삼가 그 대범한 것으로써 적어나가겠다.
공의 이름은 연(演)이요, 자는 윤보(潤甫)요, 청송인이니 시조이신 홍부(洪孚)는 고려의 위위승(衛尉丞)이다. 그 뒤에 덕부(德符)라는 분이 있었는데 좌시중(左侍中)으로 청성백(靑城伯)이었다. 그의 아들은 온(溫)인데 영의정으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이니 이 분이 공의 오대조부이고 조부의 이름은 융(嶐)인데 절충호군(折衝護軍)으로 증직이 좌승지(左承旨)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대형(大亨)인데 진사로서 증직이 병조참판이고 어머니는 청주 한씨로서 정부인에 추증되었는데 진사인 증참판 중겸(重謙)의 딸이다.
丁亥(1587)年 10月18日 계유일에 公을 낳으니 어릴 적부터 재능이 뛰어나서 공부를 하면서 문리가 숙성하였으나 나이 20歲가 못되어 부모를 연달아 잃고 외가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독실한 행동으로 힘써 배웠다. 그의 외가 맏종조부와 둘째인 구암(久菴) 백겸(百謙)과 유천(柳川) 준겸(浚謙)께서 다들 그릇이 크다고 중하게 여겼다.
壬子(1612)년에 진사가 되었는데 甲子(1624)년의 변란 때 유관(儒冠)④ 두어 사람과 함께 어가(御駕)를 공주까지 호종하여 조정에서 기록을 하고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 임명하였는데 환도(還都)한 뒤 벼슬하지 않았다.
丙寅(1626)년에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고 가을에 정시(庭試)⑤에서 제일로 뽑혀 공의 이름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당시 합격권에 든 사람이 고시관의 자제가 많아서 논란이 일자 그 발표를 취소하였다.
이듬해인 丁卯(1627) 호란(胡亂) 때 또 어가를 강도(江都)⑥로 호종하고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가 환도하자 또 벼슬을 그만두고 이해 9月에 명경과(明經科)⑦에서 둘째로 급제하여 관례대로 사섬시(司贍寺)의 直長이 되고 겨울에 6품으로 올랐다. 이로부터 뒤에는 화려하고 좋은 직위로 옮기면서 내외직으로 드나들었으니 외직으로는 경상도 도사(都事)에 시재어사(試才御史)가 되고 전라도 경차관(敬差官)⑧을 지냈으며 내직으로는 성균관에서 두 번 전적(典籍)을 맡고, 한 번 직강(直講)을 맡았으며, 형조(刑曹)에서는 세 번 좌랑(佐郞)을 맡고, 이조(吏曹)에서는 두 번 좌랑이 되고, 네 번 정랑(正郞)이 되었고, 사간원(司諫院)에서는 正言을 두 번, 헌납(獻納)을 한 번 역임하고, 사헌부에서는 여섯 번 지평(持平)이 되고, 춘방(春坊)⑨에서는 사서(司書)를 네 번 맡았으니 실상 연임을 두 차례씩 한 것이고 文學을 한 차례 맡았다. 옥당(玉堂)⑩에서는 부수찬(副修撰)과 부교리(副校理)를 경유하고 교리(校理)를 네 차례 지냈다.
癸酉(1633)년 여름 창덕궁을 수선할 때 공이 도청(都廳)이 되어 그 책무를 총괄하니 실상 다 위임 맡은 것이다. 秋 7月에 공사가 끝나니 임금께서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특별히 通政大夫의 위계를 더하셨다. 9月에 광산현감으로 부임되었는데 광산(光山:지금의 광주)이 호남의 큰 고을인 까닭에 현으로 강하하니 다스리기가 난처하나 공으로 하여금 지방 행정을 시험하고자 함이다. 부임하자 곧바로 삼대송사(三大訟事)를 분별 정리하는데 이 때 원근의 사건들을 함께 모아 처리함에 그 판단이 귀신 같으니 민정이 탄복하고 두려워하였다. 공이 정무를 관대하고 어질게 다루나 몹시 엄하여 귀 천민이 다 복종하고 조사(詔使)⑪가 완벽하게 하여 사람들이 다들 신임하니 경내가 소란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주(州)로 복귀되고 공이 목사(牧使)가 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니 지방민이 비석을 세우고 송덕을 하니 공의 겸덕과 선정을 칭송하며 모두들 심야(沈爺)⑫라고 불렀다.
乙亥(1635)년 겨울에 경상도 관찰사(觀察使)로 선발되었는데 이듬해인 丙子(1636)년에 급작스럽게 호란(胡亂)이 일어나서 각도에 징병령이 내려졌다. 공이 명을 듣자 통분하여 눈물을 흘리며 곧바로 左右道(지금의 남북도)로 전령을 보내어 각기 부처별로 국란을 구하도록 절도사(節度使) 허완(許完)과 민영(閔栐)이 다들 명령을 듣고 곧바로 도착했다. 공이 정예병 천여 명을 중군의 최언(崔彦)에게 배속시켜 함께 행진하여 재를 넘어서 빨리 나아갔다. 공이 몸소 먼저 상주에 이르니 이어 장병과 군량이 오고 얼마 안 되어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위급하다는 기별이 와서 곧바로 도내의 일은 도사(都事)에게 맡기고 두 종사관으로 하여금 좌우로 분리하여 남북의 명맥을 통하도록 한 다음 스스로 수령(守令)과 찰방(察訪)등의 보좌관을 이끌고 종군하고자하는 자와 비장(裨將)⑬ 등 나머지 병사 百여명으로 재를 넘어 利川에 이르러서 더욱 엄하게 독전하니 두 절도사와 병정이 三萬여 명이 되었다. 이듬해 정월 초이틀 쌍령에 도착하여 다음날 아침에 성 아래에 집결하도록 했는데 새벽에 적군에게 습격 당하여 두 진영이 모두 패배하여 장수가 죽고 군병이 섬멸 당하였다. 공이 싸워보고 싶으나 병졸이 없어서 다시 문경으로 퇴각하여 병정을 소집하고 군대를 편성하여 재를 넘어갔으나 성이 함락 당하고 말았다. 언론에서 각도의 책임관리에게 문책할 때 남형(濫刑)⑭이 공에게 미쳐 결국 임피(臨陂)로 귀양가게 되었다.
戊寅(1638)년에 풀려나서 얼마 후에 제주목사(濟州牧使)가 되었다. 제주가 먼바다 가운데에 있고 서울에서 거리가 먼데 좋은 말(馬)이 생산되고 진주와 피혁과 그 밖의 진기한 물건이 많이 나고 百工과 기교(技巧)가 없는 것이 없는데 목사가 문무를 장악하고 포악하게 거두어 들이니 백성들로 하여금 어업과 공업에 고통이 많아서 관리 때문에 늙을 지경인데 공이 부임하고는 한결같이 바로잡고 오직 상납제도를 시정하니 진주를 깊숙이 저장하게 되고 말들이 늘어나고 살림이 풍족해서 모두들 편안하게 되었는데 더욱 좋은 조항을 마련하고 조정에 청하여 부세를 감하게 하고 좋은 법을 제정하여 오랫동안 모범이 되게 하니 섬에 사는 늙은이들이 서로 말하였다.
『우리 고을이 생긴 이후 이러한 목사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어진 관리가 있어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면 좋은 세월이 될 것이고 이제 공의 덕망이 우리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어찌 가히 잊겠는가.』
공이 떠나게 되니 온 고을 사람들이 울부짖고 드디어 동비(銅碑)를 관도에 세우고 거리마다 돌을 깎아 세워 송덕을 하였으며 나중에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심히 슬피 울며 바다를 넘어와서 부조를 하고 건너갔다. 庚辰(1640)년에 당상관인 비변사(備邊使)가 되어 조정으로 돌아오게 되고 특별히 한성부 右尹이 되었으니 실로 탐라(耽羅-지금의 제주도)에서의 공적을 가상히 여긴 특별한 은전(恩典)이다.
辛巳(1641)년에 세 번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가 다시 우윤이 되고 또다시 서도(西都:평양) 순찰사를 지낸 다음 병조참판이 되고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壬午(1642)년 3月에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9月에 서갈(西喝)⑮로 체포되어 부하관리들과 봉황성(鳳凰城)⑯에 들어가서 일을 다 처리하고 귀환하니 조정에서 종사자의 말을 듣고 문외(門外)⑰에 내쳤다가 1年 뒤에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甲申(1644)년에 함경도 관찰사로 전근되었는데 공이 개탄(慨嘆)하면서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려고 북문을 막고 급한 일을 대비하고자 하였으며 은(銀) 1500百 냥으로 백성들의 부역을 면제하게 하고 관곡을 풀어서 주린 백성을 구휼하니 다스린 행적이 높이 소문 나서 조정으로부터 말 한 필을 하사 받았다. 평소에 성을 수축하고 병기를 수선하며 학업을 일으켜 영재를 육성하니 여러 방면으로 강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포부를 미쳐 반도 펴지 못하고 병에 걸렸는데 丙戌(1646)년 봄에 더욱 심해져서 퇴직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서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북방민들이 호곡(呼哭)하면서 서울로 운구(運柩)하고 도경계의 안변(安邊) 땅에 비석을 세웠다. 이해 5月22日 龍仁의 선영인 산의골(山義谷) 곤좌(坤坐:동북간향)의 무덤에 장사 지냈다.
공의 첫 부인은 海州 吳氏이니 도정 윤해(都正 允諧)의 딸이다. 어질고 부덕이 있어서 墓表에 실렸으며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서견(瑞肩)을 낳았으니 진사시에 합격하고 현재의 관작이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이다. 둘째 부인은 종실인 좌랑 사민(師閔)의 딸로서 정부인에 봉했고 예의범절이 현숙하고 삼가서 의리가 창달하여 본받을 만하였다. 처음 시집왔을 때 직장이 나이 아직 어려서 친자식처럼 품고 다니니 남들이 그 몸에서 낳지 않음을 알지 못하였다. 24年을 알뜰히 받들고 공경하며 뜻에 따라 처사하여 항상 간격이 없었으니 법도가 기록할 만하였다.
직장이 우리 집 데릴사위가 되었으니 우리 선친인 목사공(牧使公)께서 공과 동갑이고 서로 깊이 잘 아는 고로 그 딸로서 공의 자부를 삼았다. 3男4女를 두었으니 아직 다들 어리나 아들들은 득원(得元)·윤원(胤元)·삼원(三元)이다.
공은 자질이 크고 준수하며 도량이 퍽 깊어서 바위 같은 인상이어서 바라보면 두려운 면이 있었다. 화평한 안색이 경애할 만하고 정성을 기울여 충효하니 명분과 절개가 갈고 닦은 듯하며 일에 따라 행동하고 그 밖은 생각지 않았다. 위엄을 세우고자 아니하고 영리는 돌보지 않았다. 대각(臺閣)에 있을 때는 구태여 시간 따라 좋은 일에만 어울리지 않고 정상에 지나치는 행동은 하지 않으며 핵실할 만한 의논으로 명분을 삼고 오직 강상(綱常)을 지키며 풍채를 유지하고 경연(經筵)에 들어가서는 강론을 잘 하여 어질게 보필하고 세자궁의 교화에 지성껏 보도(輔導)하며 심지어 임금의 앞에서도 죽고 사는 것으로써 충언을 바꾸지 아니했다. 영남의 군병 때에도 비록 성패 운이 있어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나 67성 천리의 먼 곳에서 변란을 들은 7日만에 兵甲을 챙겨서 전장으로 달려오고 다시 의기를 북돋우며 두 번째 분투하니 이것이 공의 위대한 면모이다. 공은 평소 참판공을 모실 때 병이 1年을 끌었는데 밤낮으로 조금도 게으르지 않으니 참판공께서 지극한 효도라고 하였다. 몸이 귀하게 된 후에도 항상 작록(爵祿)으로 인하여 잘 봉양하지 못하였다고 종신토록 마음 아파했다. 외조모를 모시는데 동생과 함께 지극히 정성스럽고 공경하였다. 관찰사께서는 붕우 간에도 그 신의로써 사랑하고 백성을 교도(敎導)하는데도 마침내 명망을 드날렸다. 여동생이 하나 있었으나 일찍 죽어 그 생질들을 친자식 같이 보살피니 조부 승지공께서 몹시 사랑하시고 우대하였으나 공에게는 여동생과는 달리하셨고 공도 안으로는 이와 같은 구비함이 있었다. 학사의 가장(家狀)이 이와 같으나 이는 학사(學士)⑱의 말이 아니고 곧 여론으로 이어지는 여럿의 말이나 내가 오히려 시원하지 못하고 가만히 공을 돌이켜 볼 때 공께서 후덕을 베푼 것은 혼연하게 3春(춘삼월)의 화기 같고 아량인즉 철철 넘치는 만경창파이고 그의 능력은 고루 갖춰 더욱 유위(有爲)하고 그의 충성은 위험을 무릅쓰고 능히 그 직책을 다하니 고인 중에서 찾아보아도 그의 짝을 구하기 드물었으니 하물며 아득한 이 세상에서 감탄할 뿐이다. 밝은 세상에서 훌륭하신 임금을 만나 스스로 대우를 인정하며 14年 동안 몸소 중책을 치뤘으니 정말 진정한 군신(君臣)을 보았도다. 하늘이 짐짓 이런 분을 내시고 갑자기 명을 빼앗아감은 무슨 까닭일까. 아! 아깝도다.
 드디어 명을 지으니  명(銘)에 이르기를,
 이 분이 홍문관의 영준(英俊)이 되고,
 이 분이 화려하게 으뜸으로 뽑혔고,
 이 분이 헌납(獻納)으로서 논변의 어진 이고,
 이 분이 2千石의 재량이 넘고,
 이 분이 모범적인 지방관리가 되고,
 이 분이 드러난 큰 덕망가이다.
경신(卿臣)의 다음(종2품인 참판직)으로 그쳤으나 그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좋은 이름이 영원하도다. 여기에 온전하게 갖추었으니 군자 이곳에 장사를 지냈도다.
      대사성 황 호(黃) 지음.

주(註)
① 비음문(碑陰文):비석의 등에 쓰는 글. 즉 내용 문.
② 선군(先君):죽은 아버지의 높임말.
③ 지기(知己):자기를 알아준다는 뜻이니 즉 서로가 깊이 이해하는 사이.
④ 유관(儒冠):선비의 관. 벼슬하지 않은 사람.
⑤ 정시(庭試):궁정에서 왕이 친히 치르게 하는 시험.
⑥ 강도(江都):강화를 이르는 말. 난중에 수도를 강화도에 두었던 데서 유래함.
⑦ 명경과(明經科):조선 때 식년문과 초시의 한 분과.
⑧ 경차관(敬差官):조선 때 지방에 임시로 보내던 관리. 주로 전곡의 손실을 조사하고 민정을 살피는 일을 맡았음.
⑨ 춘방(春坊):세자시강원.
⑩ 옥당(玉堂):홍문관을 달리 이르던 말. 부제학 이하의 관작을 통틀어 이르던 말.
⑪ 조사(詔使):중국의 사신. 여기서는 공을 조사에 비유했음.
⑫ 심야(沈爺):심공을 아버지 또는 존귀한 데 비유했음.
⑬ 비장(裨將):조선 때 감사, 유수, 수사, 병사 및 견외사신을 수행하던 경호관.
⑭ 남형(濫刑):남용한 형벌.
⑮ 서갈(西喝):서쪽의 공갈이란 뜻으로 1642年 선천부사 이규가 밀무역을 하다가 청나라에 붙들려 공에게 화가 되었음.
⑯ 봉황성(鳳凰城):청나라의 궁성 이름.
⑰ 문외(門外):문 밖이란 뜻으로 관리가 범죄를 저지르면 사대문(四大門) 밖으로 내쫓았음.
⑱ 학사(學士):심대부 가장을 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