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참의공(휘 종직)묘지명

 

호조참의공 휘 종직 묘소
소재지: 남양주시 오남면 양지리


十二世祖 僉知中樞府事 戶曹參議公 諱 宗直 墓誌銘
公諱宗直字士敬竹西其號考諱錦果川縣監 贈判書配驪興閔氏郡守希說女以嘉靖丁巳十二月二十一日生幼而穎拔卽志于學鈍庵公鍾愛且敎曰學當以靜庵爲準則早己服膺不忘甫舞象從仲氏晴灣公諱宗敏請業牛栗兩先生門又從龜峯宋公翼弼學受性理諸書專心篤好講劘不怠諸先生期重之弱冠以詞藻華聞蔚一時先達名流咸屈年行求與爲友辛卯中進士第七名游泮宮言論慷慨志氣峻烈辨覈癙否無所回互於科甲衆詡以取高第若承蜩竟不利癸巳用薦焉金吾郞遷軍資參奉超拜直長皆不就乙未再除直長丁酉擢授水運判官己亥遷拜司饔奉事旋除直長辛丑遷內資直長卽陞主司導簿佐郞刑曹轉戶曹卽遆復佐戶曹乙巳出監泰川縣戊申移令江西縣遆歸又佐戶曹庚戌拜平壤庶尹俄守豊德卽遆甲寅復佐戶曹遷授黃州判官丁巳監聞慶縣秩滿換除鴻山癸亥拜松都經歷甲子守廣興倉乙丑陞軍器副正尋正濟用監丁卯胡寇報急 仁廟播遷江都公亦隨駕往還 上賞其勞特進通政階拜僉知中樞五衛將判決事戶曹參議公曾上萬言疏 上嘉納之然措辭多觸語坐此不克展布所蘊惜哉以崇禎辛未十一月二十五日考終于寢春秋七十有五葬于廣州某向原夫人陽川許氏鏛女全州崔氏應成女陽川許氏信女凡三娶公天資純粹外和內確德器充完行義齊備壹以忠信爲主歷典七邑禔身以廉理事以恪猝遇盤錯剸決若神雖以吏治名者闡公理道輒瞠焉推服每去官甿晦歌其惠而碑之當廢朝時事溷濁辱處西湖詩酒自娛雖屢屈州縣非其志也及伯氏參議公橫罹罪網事將不測賴公之力終獲免焉盖其誠愛感動于人者非偶然也公在黃州仲氏自西府解歸公迎人公廨視疾不離側其終不幸喪需一依文公家禮無少缺及龜峯爲仇家所陷身後尙未洗賤名公與守夢鄭公曄沙溪金公長生藥峯徐公渻抗章直之士論多之其在鴻山手評其遺稿刊行于世守夢序其集略曰當時樞衣於函丈者士敬曁余三四人在世而士敬淸操惠澤歌頌一境則其持身及物者可謂不負所學云縣有無量寺金東峯時習經於此留小像卽東峯自贊宜爾置之丘壑之中者也及公爲宰就寺傍構一室以安其像名之曰淸風閣令諸生春秋祀之此亦風化之一事也公少與守夢沙溪爲同門莫逆友早承師誨共劘道義其相與之情到老不渝東岳李公安訥쬊之曰廉淸爲世服澤堂李公植曰世稱竹西氷玉之操此可見公之爲人亦足信而有徵矣公於詩藻格律淸粹聲氣典雅驟卽之琅然瑩然徐而嚼之旨乎其味繹乎其音神與才溥天機自在雖選入盛唐諸作實未易辨也嘗與五峯李公好閔芝峯李公晬光五山車天輅石洲權蹕東岳澤堂諸公竝騖詞苑擧皆推奬曰沈公眞騷壇老將以爲不可及中朝人見公詩重之加批評且稱曰眞絶代希音當歸榟江南以誇貴邦文物之盛云公日事推敲篇什甚夥軼於兵燹今其存者雖無多大冶爐邊失二三點金何傷世之車精爲文歲磨月鍊不失隻字者較其富有不知孰與多也從孫議政公之源宰洪陽謀所以不朽澤堂有跋有評稱道公詩甚備功未就卽解歸尙未鋟榟詩合爲四帙藏乎家嗚呼公撞鍾於牛栗之門樹善於士林之中學識之超邁詩翰之典贍固爲當世人所重而凝靜自守絶意進取祿不稱其德用不究其才信乎詩之窮達人者洽非虛語也公之曾孫益泰氏以墓誌來托辭不獲略敍平日景仰於公者
傍孫 司諫院獻納 埈 撰

12세조 첨지중추부사 호조참의공 휘 종직(宗直) 묘지명
공의 휘는 종직(宗直), 자는 사경(士敬)이니 죽서(竹西)는 그의 호이다. 아버지의 휘는 금(錦)인데 과천현감(果川縣監)으로 증직이 판서(判書)이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니 군수 희설(希說)의 딸이다. 가정정사(嘉靖丁巳:1557)년 12월 21일 공이 태어났으니 어려서부터 총명하게 빼어났으며 곧바로 학문에 뜻을 두었다. 둔암공(鈍庵公:조부)께서 애정을 모아 가르치면서 말씀하기를 학문은 마땅히 정암(靜庵:조광조의 호)을 표준으로 삼으면 일찍이 깨우칠 것이니 가슴에 새겨 잊지 말라 하였다.
처음 15세 때 중형인 청만 심종민(晴灣 沈宗敏)에게 배웠고 우계(牛溪)와 율곡(栗谷) 양 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했으며 또한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에게서 성리학에 관한 여러 글을 배웠는데 전심으로 독실하게 강마하고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여러 선생들께서 중요하게 여겼다. 약관(弱冠)에 글 재주가 빛나게 들려 무성하니 한때 앞선 명사들이 모두 나이와 행실을 굽혀가며 벗하자고 했다. 신묘(辛卯:1591)년의 진사시험에서 7번째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여론이 강개하였다. 의지와 기질이 준렬하고 선악을 분명히 가려내어 어긋남이 없었으니 과거에서 높은 성적으로 뽑히리라고 모두들 떠들었으나 결국 이롭지 못했다.
계사(癸巳:593)년에 천거로써 금오랑(金五郞)이 되고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으로 옮겨 직장(直長)으로 뛰어 올랐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을미(乙未:1595)년에 다시 직장을 시켜서 정유(丁酉:1597)년에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뽑아 올리고 2년 뒤에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로 불러들여서 이어 직장으로 옮겼다.
신축(辛丑:1601)년에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으로 옮기고는 곧바로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로 올랐고,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호조(戶曹)로 전직되었다가 한 차례 교체되고 다시 좌랑이 되었다.
을사(乙巳:1605)년에 태천현감(泰川縣監)으로 나갔다가 무신(戊申:1608)년에 강서현령(江西縣令)으로 한 차례 옮기고는 다시 호조좌랑으로 교체되어 들어왔다.
경술(庚戌:1610)년에는 평양 서윤(平壤庶尹)으로 나갔다가 인해 풍덕 군수(豊德郡守)로 체직되었으나 4년만인 갑인(甲寅:1614)년에 또다시 호조좌랑으로 들어왔다가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옮겨 나갔다.
정사(丁巳:1617)년에는 문경현감(聞慶縣監)이 되고 만기가 되어 홍산(鴻山)으로 갔다가 계해(癸亥:1623)년에 송도경력(松都經歷)으로 옮겼다. 다음해에 광흥창 수(廣興倉守)가 되고 을축(乙丑:1625)년에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으로 오르고 제용감 정(濟用監正)이 되었는데 정묘(丁卯:1627)년에 호구(胡寇)가 급히 침범하는 보고로써 인조왕(仁祖王)께서 강화도(江華島)로 파천할 때 공이 어가를 뫼셔갔다가 환도한 뒤에 상감께서 그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통정계(通政階)에 특진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한 다음 오위장(五衛將), 판결사(判決事), 호조참의(戶曹參議)를 두루 거쳤다. 공이 일찍이 만언소(萬言疎)를 올렸는데 상감께서 가납하였다. 그러나 상소문 중에 거슬리는 대목이 많아서 좌절되었고 이로써 포부를 능히 펴보지 못했으니 아깝다.
숭정신미(崇禎辛未:1631)년 11월 25일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니 수가 75였고, 광주(廣州)의 선산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양천 허씨(陽川許氏) 상(鏛)의 딸과 전주 최씨(全州崔氏) 응성(應成)의 딸과 양천 허씨 신(信)의 딸로서 무릇 세 번 장가들었다. 공은 천성이 순수하여 밖으로는 온화하나 의지는 확실하며 덕성이 충만하고 행의가 완비하였으니 한결같이 충성과 신의로써 주장을 삼아서 7읍을 두루 다스렸는데 청렴을 몸에 쌓아서 정성으로 일을 처리하였으며 갑자기 뒤섞이고 복잡한 일을 당하더라도 귀신같이 처결했으니 비록 관리로써 이름이 있는 자라도 공이 다스리는 도리를 들으면 문득 눈이 휘둥그렇게 되어 드디어 감복하게 되고, 매양 임기가 끝나서 떠나게 되면 농민들이 그의 은혜를 노래하며 비석을 세웠다. 폐조(廢朝:광해군을 이름)을 당하여 정사가 혼탁함에 서호(西湖)에 피해 살며 시와 술로써 스스로 즐겼으며 비록 여러 차례 고을 살이를 했더라도 그의 뜻이 아니었다. 백형인 참의공(參議公)께서 엉뚱하게 죄망에 걸려 들어 일이 장차 불측하게 되었을 때 공의 성력에 힙입어 마침내 벗어나게 되었으니 대개 그 정성과 애정에 사람들이 감동케 되었으니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공이 황주에 재임할 때, 중씨(仲氏)께서 서부(西府)로부터 해임하고 돌아왔을 때 공이 공관으로 사람을 맞이하여 병을 보살피며 곁을 떠나지 않았으나 종말이 불행하게 되었는데 초상절차를 한결 같이 문공(文公:주희의 시호) 가례(家禮)에 의거하고 조금도 흠결이 없었다. 송구봉(宋龜峰)이 원수진 집으로부터 모함을 입어 죽은 뒤에까지 천한 이름을 씻어내지 못하여 공께서 수몽 정엽(守夢 鄭曄)과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과 약봉 서성(藥峯 徐픸)으로 더불어 항의한 글이 강직하여 선비들의 논의가 많았었다. 공이 홍산(鴻山)에 있을 때 손수 그의 남긴 글을 추려서 세상에 간행하였고 정수몽이 그 문집에 서문을 썼는데 요약해 이르기를,
『당시 선생님께 진학한 이는 사경(士敬)과 나, 3~4명이 세상에 남아 있는데 사경의 맑은 지조와 영향 받은 혜택을 한 지역에서 노래로 칭송하고 있으니 그의 몸가짐과 사물에 미침이 가히 배운 바를 망각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홍산현에 무량사(無量寺)라는 사찰이 있는데 동봉 김시습(東峰 金時習)이 이곳에서 지내면서 자그마한 초상화를 남겼는데 이는 동봉 스스로 참여한 것으로써 산구렁에 방치된 것을 공이 맡아서 절간 옆에 작은 방을 하나 꾸며서 그 초상을 안치하고 이름을 청풍각(淸風閣)이라 하고 유생으로 하여금 춘추로 제사토록 하였으니 이 또한 풍화사업의 한가닥 사례이다. 공이 젊었을 때 수몽, 사계와 더불어 동문의 막역한 벗이 되어 일찍이 스승의 훈회를 받들고 함께 도의를 연마하여 서로 함께한 정을 늙도록 퇴색시키지 아니했다. 동악 이안눌(東岳 李安訥)이 제문에서 이르기를 청렴한 지조는 세인이 감복했다 했고(廉淸爲世服), 택당 이식(澤堂 李植)은 이르기를 세상에서 죽서(竹西)를 빙옥(氷玉)같은 지조라 했으니(世稱竹西氷之操), 이는 공의 사람됨을 가히 엿볼 수 있고 또한 족히 믿을 만한 신빙을 두었도다. 공은 시와 문장의 격율에 있어서 청수하지 그지 없고 소리와 기운이 법칙에 맞고 아담하여 몰아 붙이면 구슬같이 청아하게 그 음정을 풀어보면 신선과 같은 넓은 재주를 담고 천지의 기밀이 그 속에 자재하니 비록 융성할 때의 당나라 문장가들로도 실로 쉽게 분변하지 못할 것이다. 일찍이 오봉 이호민(五峯 李好閔)과 지봉 이수광(芝峯 李첧光)과 오산 차천로(五山 車天輅)와 석주 권필(石洲 權蹕)과 동악(東岳), 택당(澤堂) 제공으로 더불어 함께 비원(秘苑)에서 문장을 겨뤘는데 거개가 주장하여 말하였다.
『심공은 진실로 문장가 중의 노장들로도 따라 잡을 수 없다.』
중국의 관원들이 공의 시를 보고서는 존중하고 논평을 더해 칭찬하기를 진정코 절대한 희귀문이니 마땅히 돌아가서 강남(江南)에 발표하고 귀국에 문물이 풍성함을 자랑하리라고 하였다. 공이 일상 정리해 놓은 시편 문사들이 무척 많았으나 전란중에 잃어버리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비록 많지 않으나 큰 풀무가에서 두세 점 잃었다하여 금이 세상에서 어찌 축나리오, 한수레의 정교한 글이 오랜 세월동안 연마중에도 필요한 외톨 글자를 잃지 않았다면 그 부유한 것과 비교할 때 많은 것과 더불어 어느 것을 택할 지 모르겠다. 공의 종손(從孫)인 의정공 지원(議政公 之源)이 홍주목사(洪州牧使)로 있을 때 공의 문집(文集)을 다듬고 택당(澤堂)이 발문(跋文)에서 도리에 맞는 인물이라고 평한 바 있으며 공의 시를 많이 찾아내었으나 완수하지 못한 채 교체되어 돌아오고 아직껏 출판되지 못했다. 시는 도합 4질인데 집에 소장되어 있다.
아! 공이 우계와 율곡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며 학행을 여러 유림 가운데 잘 수립하였으니 학식의 뛰어남과 시문의 넉넉함을 진실로 당세의 사람들이 소중히 여겼으나 종용하게 스스로 지키며 진취할 뜻을 두지 않았으니 관록도 그의 덕성에 맞지 않았고 쓰임도 그의 재주를 다하지 못했으니 시가 사람을 궁하게도 하고 창달하게도 함이 자못 허언이 아님을 믿겠도다. 공의 증손인 익태(益泰)가 묘지(墓誌)를 부탁하고자 찾아왔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평소 공을 경앙하던 바를 서술했다.
방손(傍孫)인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준(埈)이 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