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정공(휘 창수)묘갈명

 

첨정공 휘 창수 묘소
소재지: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원흥리 

묘 표 석


十一世祖 贈吏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副摠管 行 軍器寺僉正 沈公 諱 昌壽 墓碣銘
海東沈氏出於靑松胄於諱洪孚仕麗朝文林郞衛尉寺丞生諱淵閤門祗侯生諱龍吏曹正郞追封門下侍中靑華府院君生諱德符號虛江三重大匡左侍中靑城郡忠義伯入李朝特進左議政錄功靑城伯靑城府院君 贈諡定安辭勳不受生諱溫領議政靑川府院君 贈諡安孝誕生 昭憲王后生諱澮領議政靑松府院君 贈諡恭肅三世秉勻昭然偉德在於國乘生諱湲內資寺判官 贈左贊成純忠積德補祚功臣於公爲高祖也曾祖諱順門議政府舍人 贈領議政遭燕山朝被禍祖諱逢源號曉窓同知敦寧府事托疾不仕淡於勢利休官養靜 贈左贊成爲世名臣考諱鍵號警省軒少負衆望官至承文院正字出使湖南早夭客館 贈領議政妣 贈貞敬夫人廣州李氏弘文館校理諱延慶號灘叟先生之女祖諱守元 贈吏曹參判曾祖諱世佐判中樞廣陽君外祖姓諱李延源弘文館校理原州人也公居第二長諱喜壽號一松左議政靑城府院君 贈諡文貞公其弟也公諱昌壽字亨老號省菴 明宗五年庚戌九月十六日生是年四月議政公卒于公州之官衙公在腹彌月大夫人口絶粥飮屢致毁傷竟能得全人皆異焉公少與伯公怡愉於敦寧公膝下孝友出於天性事王考也事母也事伯兄也誠孝友愛兼至與宗族鄕黨和睦寬容早襲庭訓厥有成就人皆服其篤志甲戌遭敦寧公喪事伯公承重居憂執喪盡禮 宣祖朝丁丑以門蔭補官辛巳陞長興庫主簿仍授司憲府監察壬午出爲果川縣監公正淸白吏民敬服至甲申七月遭艱解任與伯公哀毁過禮幾至滅性己丑歷交河縣監如果川時闔境大治壬辰拜軍器寺判官仍陞僉正癸巳扈駕江都矣乃於八月二十三日卒于干戈搶攘之中壽僅四十四也嗚呼公生于世閥早出仕路未竟其用豈非天耶伯公不堪孔懷之痛宗族鄕黨莫不歎惜奉窆于高陽郡木稀里曉窓公兆下負壬之原配 贈貞夫人茂松尹氏父諱之瑞典籍祖諱瓘生員曾祖諱三樂外祖姓諱李緯廣州人也生于 明宗二年丁未卒于光海六年甲寅公墓左附窆享年六十八也有四男一女男長諱旭以武力顯官至都摠府副摠管例 贈公吏曹參判妣貤贈貞夫人之職也副摠管初娶平壤趙光琳女後娶奉事安東金昕之女生二男二女男長儒碩通德郞次儒俊僉中樞女長適郡守金江陵人次適郡守黃琠尙州人次男諱暾司憲府監察初娶縣監延安李瑞麟女後娶同中樞平海黃輔仁女生五男二女男長儒宗次儒弘軍資監正次儒宏副司果次儒達僉中樞次儒績副護軍女長適嘉善朴得亨次適折衝趙以起次男諱昶號霞谷出系伯父一松相公後郡守孝 贈吏曹判書初娶察訪豊山金命賢女後娶進士南陽洪昕之女生二男二女男長儒訓遺逸進善不就 贈戶曹判書次儒行文科執義 贈左贊成女長適師傅元振海原州人次適統制使柳廷益文化人次男諱暄縣監娶大護軍商山黃德潤女生一男三女男儒寬女長適參奉權塾安東人次適進士姜游晋州人次適進士鄭世胄東萊人一女適判決事金孝建安東人生一女適判官李慶霱餘不能盡記也謹按公之狀曾有碑文然未有撰述者之露啣切有疎略之嘆故畏沒世德補闕拾遺不避僣越敢擧以爲銘曰
翳我先祖世赫簪纓逮至省祖纂緖休明孝友根天不墜家聲出宰二郡治蹟蔚然扈駕江都忠義莫先未展蘊抱命何止殤在世仁德女一男四垂後裕福雲仍其示瞻彼斧堂衣履所藏百世淸風山高水長

公之卒後六丙子菊月上澣
十世孫 雨鉉 敬撰


11세조 증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 군기시첨정 심공 휘 창수(昌壽) 묘갈명
해동(海東:우리나라를 말함)에 沈氏는 청송(靑松)에서 나왔으니 휘 홍부(洪孚)가 시조가 된다.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문림랑 위위시승(文林郞衛尉寺丞)을 지냈으며 휘 연(淵)을 낳으니 합문지후(閣門祗侯)요 휘 용(龍)을 낳으니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문하시중 청화부원군(門下侍中靑華府院君)을 추봉되었고 휘 덕부(德符)를 낳으니 호는 허강(虛江)이며 삼중대광 좌시중(三重大匡左侍中)으로 청성군 충의백(靑城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左議政에 특진되었고 功으로 녹선(錄選)되어 청성백(靑城伯) 청성부원군이 되었으며 시호를 정안(定安)으로 내렸고 공훈은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였다. 휘 온(溫)을 낳으니 영의정 청천부원군(領議政靑川府院君)에 진급하고 안효(安孝)의 시호를 내리고 소헌왕후(昭憲王后:世宗王妃)를 탄생하였다. 휘 회(澮)를 낳으니 영의정(領議政)으로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을 봉하고 공숙(恭肅)의 시호를 내리었으니 3대가 국정을 잡으매 빛나는 위덕(偉德)이 나라 사기에 실려 있다. 휘 원(湲)을 낳으니 내자시판관(內資寺判官)으로 좌찬성(左贊成) 순충적덕 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을 증직하였으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순문(順門)이니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 영의정(領議政)을 증직했는데 연산조(燕山朝)를 만나 화를 입었고 할아버지의 휘는 봉원(逢源)이요 호는 효창(曉窓)인데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병을 의탁하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세리(勢利)에 담담하여 벼슬을 버리고 한정을 길었다. 찬성을 증직하여 세상에 명신이 되었으며 아버지의 휘는 건(鍵)이요 호는 경성헌(警省軒)이며 젊어서 중망(衆望)이 있고 벼슬이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로 호남(湖南)에 일을 보러 나갔다가 객관(客館)에서 요절했으며 증직이 영의정(領議政)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광주이씨(廣州李氏)니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휘 연경(延慶)·호 탄수(灘첤) 선생의 따님이요 할아버지의 휘는 수원(守元)이니 증직이 이조참판(吏曹參判)이요 증조의 휘는 세좌(世佐)니 판중추 광양군(判中樞廣陽君)이요 외조는 이연원(李延源)이니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요 원주(原州)사람이다. 공이 형제에서 둘째요 형님의 휘는 희수(喜壽)요 호는 일송(一松)이며 좌의정(左議政)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이요 시호가 문정(文貞)이니 공은 그분의 아우이다.
공의 휘는 창수(昌壽)요 자는 백향(伯享)이며 호는 성암(省菴)이니 명종(明宗) 5년 경술(庚戌 1550) 9월 16일에 출생했는데 이해 4월에 의정공(議政公)이 공주(公州) 관아(官衙)에서 돌아가니 공이 유복자로 산월이 임박하매 대부인께서 곡물을 입에 대지 않으므로 여러번 훼상을 이루었으나 마침내 능히 은전하였으니 사람들이 다 기이하게 여기었다. 공이 소시에 형님으로 더불어 돈녕공(敦寧公:공의 조부) 슬하에서 즐거워하여 효우가 천성에서 우러났다. 할아버지를 섬기며 어머니를 섬기고 형님을 섬기되 성효와 우애가 겸전했으며 종족과 향당으로 더불어 화목하며 관용하였다. 일찍부터 가정교훈을 받아 성취함이 있으니 사람이 다 그 돈독한 뜻을 탄복했다. 갑술(甲戌 1574)년에 돈녕공(敦寧公)의 상사를 당하매 백공(伯公)이 승중(承重)이 되었는데 집상(執喪)에 예절을 다했다. 선조(宣祖) 정축(丁丑 1577)년에 문음(門蔭)으로 보직되어 신사(辛巳)년에 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에 승진하고 인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했으며 임오(壬午)년에 과천현감(果川縣監)으로 나갔는데 공정하고 청백하여 아전과 백성이 경복했다. 갑신(甲申) 7월에 자친 상사를 당하여 백씨와 더불어 애훼함이 예에 지내어 거의 사경에 이르렀다. 기축(己丑)년에 교하현감(交河縣監)이 되었는데 과천(果川)에 있을 때와 같이 온 고을을 크게 다스리었다. 임진(壬辰)년에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배수하고 이해 첨정(僉正)에 승진되고 계사(癸巳)년에 강도(江都)에 호가(扈駕:임금의 수레를 모시고 피난감)했다가 8월 13일에 전쟁에서 돌아갔으니 수가 겨우 44세이다. 아! 공이 문벌이 좋은 가정에서 출생하여 일찍 벼슬길에 나갔다가 그 쓰임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갔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백씨께서는 형제에 애통을 감내하지 못하며 종족과 향당에서도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이가 없었다. 고양군 목희리(高陽郡木稀里) 효창공(曉窓公) 묘하 임좌(壬坐)의 언덕에 안폄했다. 배위는 증정부인 무송윤씨(贈貞夫人茂松尹氏)요 부친의 휘는 지서(之瑞)니 전적(典籍)이요 조부의 휘는 관(瓘)이니 생원(生員)이요 증조의 휘는 삼락(三樂)이요 외조는 이위(李緯)니 광주(廣州)사람이다. 명종(明宗) 2년 정미(丁未 1517)에 출생하여 광해(光海) 6년 갑인(甲寅 1614)년에 돌아갔으며 공의 묘소 좌편에 합부하고 향년이 68세이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욱(旭)인데 무력으로 나타났으며 벼슬이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인데 준례로 이조참판(吏曹叅判)을 증직하고 배위도 정부인(貞夫人)을 이증(貤贈)했다. 맏자제 부총관(副摠管)의 초취는 평양 조광림(平壤趙光琳)의 딸이요 후취는 봉사(奉事) 안동 김흔(安東金昕)의 딸인데 2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유석(儒碩)이니 통덕랑(通德郞)이요 다음은 유준(儒俊)이니 첨중추(僉中樞)요 장녀는 군수 김집(郡守金)에게 출가했으니 강릉(江陵)사람이요 다음은 군수 황전(郡守黃琠)에게 시집갔으니 상주(尙州)사람이다. 다음 자제는 돈(暾)이니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요 초취는 현감(縣監) 연안 이서린(延安李瑞麟)의 딸이요 후취는 동중추(同中樞) 해평 황보인(海平黃輔仁)의 딸인데 5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유종(儒宗)이요 다음은 유홍(儒弘)이니 군자감정(軍資監正)이요 다음은 유굉(儒宏)이니 부사과(副司果)요 다음은 유달(儒達)이니 첨중추(僉中樞)요 다음은 유적(儒績)이니 부호군(副護軍)이요 장녀는 가선 박득형(嘉善朴得亨)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절충 조이기(折衝趙以起)에게 시집갔다. 다음 자제는 창(昶)이요 호는 하곡(霞谷)인데 백부 일송상공(伯父一松相公)에 출계했으며 후에 군수가 되고 효행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직하고 초취는 찰방 김명현(察訪金命賢)의 딸이요 후취는 진사(進士) 남양 홍율(南陽洪瑮)의 딸인데 2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유훈(儒訓)인데 유일(遺逸)로 진선(進善)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고 증직이 호조판서(戶曹判書)요 다음은 유행(儒行)인데 문과로 집의(執義)요 증직이 좌찬성(左贊成)이다. 장녀는 사부(師傅) 원진해(元振海)에게 시집갔으니 원주(原州)사람이요 다음은 통제사(統制使) 유정익(柳廷益)에게 시집갔으니 문화(文化)사람이다. 다음 자제는 훤(暄)이니 현감(縣監)이며 대호군(大護軍) 상산 황덕윤(商山黃德潤)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1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유관(儒寬)이요 장녀는 참봉 권숙(叅奉權塾)에게 시집갔으니 안동사람이요 다음은 진사 강유(進士姜遊)에게 시집갔으니 진주(晋州)사람이요 다음은 진사 정세주(進士鄭世胄)에게 시집갔으니 동래(東萊) 사람이요 다음은 판결사 김효건(判決事金孝建)에게 시집갔으니 안동(安東)사람이요 다음은 판관이경함(判官李慶霱)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능히 다 기록 못한다. 삼가 공의 행장(行狀)을 안찰하건대 전에 비문(碑文)이 있었으나 그러나 찬술한 자의 성함도 잊지 않고 소략한 탄식이 있으므로 세덕(世德)이 민몰될까 두려워하여 궐루됨을 보충하고 유사(遺事)를 채습하여 참람됨을 피하지 않고 감히 들어서 명(銘)을 하여 이르되
우리 선조(先祖)께서는 대대로 잠영(簪纓:관직이 높은 자의 복식)이 혁혁 하였네, 성조(省祖:공의 작자의 선조 호가 警省軒이므로 이렇게 말함)에 이르러서는 유서(遺緖)를 이음이 아름답고 밝았네, 효우가 근천하였으니 가성(家聲)을 추학시키지 않았네, 두 고을을 맡아 나가매 치적이 성대하였네, 강도(江都)에 호가(扈駕)하매 충의를 먼저 할 이가 없네, 쌓인 포부를 펴지 못하였으니 운명이 어찌하여 순절(殉節)에 그치었던가? 세상에 어진 덕택이 남았으니 4남 1녀를 두었네, 넉넉한 복록이 후세에 드리워서 자손에게 보이었네, 저기 묘소를 바라보니 옷과 신을 안장한 곳이네, 百세에 맑은 바람은 산이 높고 물이 깊게 흐르리라,

공이 돌아가신 후 여섯번째 병자(丙子 1936)年 9月 상순
12세손 몽래(夢來) 공경하여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