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군수공(휘 효겸)묘갈명

 

신천군수공 휘 효겸 묘소 (향토유적 제8호)
소재지: 김포시 장기리 고창산 능촌

묘 비 석


十一世祖 贈吏曹參判 行 信川郡守公 諱 孝謙 墓碣銘
明宗二年丁未六月二十日沈公諱孝謙字公述生于漢城其考翼孝公靑陵府院君諱鋼쯼完山府夫人李氏贈判書薱女凡同氣十人公其第七一氣之連壺儀克誕卽仁順王后而居第一也公胚胎華閥資質純粹恭儉自重不求聞達年三十中司馬試蔭補歷官壬辰扈從大駕之蒙塵四十九始監鴻山縣有些嬚棄歸旋出守信川郡四載遞還年五十四考終于金陵舊第宣祖庚子九月二十四日也越十年庚戌贈左承旨乙卯加贈吏曹參判盖曾有扈從之勞也一松沈相國喜壽輓之曰心全忠孝休休爾習絶羅紈淡淡然城邊風雨三間屋海岸蒿菜一畝田晩翠吳公億齡有輓曰痛絶膏梁習如從草澤來賢關繁播令聞場屋騁雄才嗚呼公之潛行著德今不可得以詳之然寂廖數篇之語可以想像公之忠孝之全恭儉之行是外何必有多乎哉今因公之五代孫靜坐窩公之狀行而塞責後孫相弼之要銘也沈氏貫靑松靑城伯諱德符靑川府院君諱溫恭肅公諱澮忠惠公諱連源皆以黃閣衛社勳業照耀竹帛是皆所蒙也忠惠公生翼孝公矣公之初配宜寧南氏郡守應瑞之女再配固城李氏忠義衛磬之女皆追封貞夫人南氏无育李氏二男二女擧男曰愊縣監贈戶曹參判曰쾩死節江都贈吏曹參議女適縣監金脩原州人次適察訪李必壽廣州人愊生廷逸同知廷哲廷傑同知女適李仁富廷賤廷漢廷豪女宋泓尹陞惕生女適贈持平李翕男廷俊廷逸生榎參奉廷哲生쳺廷傑生 僉知棱奉直郞餘不錄公之幽宅在金浦高昌山陵村酉坐原李夫人祔南夫人公兆之東麓乾坐原噫公有自修之實行可以爲揄揚墓道之刻而尙闕者今其後孫相與謀樹以余從遊之久知莫若也屬之以銘辭不獲而銘曰
生而斂華歿有令名懿親散官鴨綠忠盟松翠兩誅辭 約得衡天佑仁善永保斯塋
開天四三二四年 辛未光復節
前成均館典儀 恩津 宋貢鎬 謹

11세조 증이조참판 행 신천군수공 휘 효겸(孝謙) 묘갈명
明宗2年(1547)年 丁未 9月 20日에 沈公 휘 효겸(諱:孝謙) 자 공술(字:述)이 漢城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익효공 청릉부원군 휘 강(翼孝公 靑陵府院君 諱 鋼)이요, 모친은 완산부부인이씨(完山府夫人李氏)로 증 판서 대(贈判書 薱)의 따님이다.
대개 동기(同氣) 간 열명 중에서 公이 일곱 번째인데 인순왕후(仁順王后)가 탄생하여 첫째이다.
公은 훌륭한 문벌에서 태어나 성품이 순수하고 온공 검박(恭儉)하면서 명예를 구하지 아니하였다. 나이 30歲에 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길에 올랐다가 임진왜란에 선조대왕(宣祖大王)을 호종(扈從)하였고 49歲에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나갔다가 사소한 혐의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으며 곧 신천군수(信川郡守)로 나가서 4年만에 돌아왔다. 나이 54歲에 금릉(金陵:金浦古號) 옛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선조경자(宣祖庚子:1600年) 9月 24日이다. 10年이 지난 경술(庚戌)년에 좌승지(左承旨)로 증직 되었고 을묘(乙卯)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다시 증직 하였으니 대개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국란에 따라갔던 공로이다.
일송 심정승 희수(一松 沈相國 喜壽)의 만사에 이르기를
『마음은 충효(忠孝)가 온전하니 아름다웠고 습관은 사치를 물리치니 깨끗하였다.
성밖에 비바람 가릴만한 삼칸(三間)집이오, 바다 가에 채소밭 한 필지이다.』
라고 하였고 만취 오공 억령(晩翠 吳公 億齡)의 만사(輓)에 이르기를
『사치로운 습관을 애써 물리치고 초야(草野)에 묻혀 지내려 하였다. 벼슬길에 명성을 떨치고 시험장(場屋)에서는 큰 재주를 뽑내셨다.』
아아! 公의 숨은 행적과 나타난 德을 지금에 자세하게 드러낼 수 없으나 조용한 몇 구절 말씀에서 公의 충효(忠孝)의 완전함과 공검(恭儉)한 행실을 상상(想像)할만한데 이밖에 더 많은 것이 필요할 것인가? 지금에 공의 五代孫 정좌와 공(靜坐窩公)의 행장(行狀)으로 인하여 사실을 기록하게 되는데 후손 상필(後孫 相弼)이 비명(銘)을 요청한 것이다.
沈氏의 본관(貫)은 靑松이니 청성백 휘 덕부(靑城伯 諱 德符)와 청천부원군 휘 온(靑川府院君 諱 溫)과 공숙공 휘 회(恭肅公 諱 澮)와 충혜공 휘 연원(忠惠公 諱 連源)은 모두 높은 벼슬로 나라에 바친 공로가 역사에 빛난 것은 더욱 조상의 덕택인데 충혜공(忠惠公)이 익효공(翼孝公)을 낳은 것이다.
공의 처음 부인은 의령 남씨(宜寧南氏)인 군수 응서(郡守 應瑞)의 따님이오. 다음 부인은 고성 이씨(固城 李氏)니 충의위 경(忠義衛 磬)의 따님으로서 모두 貞夫人으로 추봉(追封) 되었다. 南氏는 무후(无育)하였고 李氏는 2男2女를 두었으니 맏아들 픽(愊)은 현감(縣監)으로 증직 호조참판(贈 戶曹參判)이오, 다음 아들 척(惕)은 강화도에서 사절신(死節臣)으로 증직 이조참의(贈 吏曹參議)이며, 딸은 현감(縣監)인 원주 김수(原州 金脩)에게 출가하고, 다음 딸은 찰방(察訪)인 광주 이필수(廣州 李必壽)에게 출가하였다.
픽(愊)의 소생은 동지 정일(同知 廷逸)과 정철(廷哲)과 동지 정걸(同知 廷傑)이오, 딸은 이인부(李仁富)에게 출가하고 아들은 정천(廷賤)과 정한(廷漢)과 정호(廷豪)이다. 딸은 송홍 윤승(宋泓·尹陞)에게 각 출가하였다.
척(惕)의 소생인 딸은 증 지평 이흡(贈 持平 李翕)에게 출가하고 아들은 정준(廷俊)이다. 정일(廷逸)의 소생 가(榎)는 참봉(參奉)이오, 정철(廷哲)의 소생은 침(梣)이오, 정걸(廷傑)의 소생 현(현)은 첨지(僉知)요, 릉(棱)은 봉직랑(奉直郞)이고 다음은 모두 기록하지 못하였다.
公의 묘소(幽宅)는 김포 고창산 릉촌 유좌(金浦高昌山陵村酉坐)이니 이부인(李夫人)은 합장이오, 남부인(南夫人)의 묘소는 公의 묘소 동쪽 기슭 건좌(乾坐)이다.
아! 공의 스스로 닦은 행적을 찬양할 묘갈(墓碣)이 없었는데 지금에 후손(後孫)들이 비석 세우기로 합의하고 막연한 친구가 나에게 비명(銘)을 부탁하므로 사양하다가 부득이 비문을 지었는데 명(銘)에 이르기를.
 生而斂華 생전에는 사치를 물리쳤고
 歿有令名 세상을 떠나서는 이름을 떨치었다.
 懿親散官 조상의 덕택으로 벼슬하였고
 鴨綠忠盟 임금님을 모시고 따라갔던 충성이로다.
 松翠兩誅 일송(一松)과 만취(晩翠)의 두 만사에서
 辭約得衡 행적이 드러났도다.
 天佑仁善 하늘이 어진 이를 도와서
 永保期塋 이 묘소를 길이 보존하리로다.
開天 4324年 신미(辛未) 광복절(光復節)에
전성균관전의(前成均館典儀) 은진(恩津) 송공호(宋貢鎬)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