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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병조참의공 휘 종명 묘소 |
十一世祖 督戰使 贈兵曹參議 沈公 諱 宗明 行狀
壬辰臨津之役督戰使沈公死之先是倭寇軼我忠烈公宋象賢死於東萊從事尹公暹朴公暹死於尙州申將軍砬金從事汝岉死於 ![]() ![]() ![]() 僉知中樞府事 沈定鎭 撰 11세조 독전사 증병조참의 심공 휘 종명(宗明) 행장 임진년(1592년) 임진강(臨津江)의 싸움에서 독전사 심공이 전사(戰死)하였다. 이에 앞서 왜구(倭寇)가 우리나라를 침공(侵攻)하였을 적에 우리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이 동래(東萊)에서 전사하였고 종사관(從事官) 윤공(尹公) 섬(暹)과 박공(朴公) 지(篪)가 상주(尙州)에서 전사하였으며 신장군(申將軍) 립(砬)과 김종사 여물(汝岉)이 달천( ![]() 『후세에 어찌 한신〔韓信, 중국 한(漢)나라 고조의 장신(將臣)으로 한나라 창업(創業) 삼걸(三傑)의 한사람, 회음(淮陰)사람, 고조의 통일대업(統一大業)을 도와서 초왕(楚王)에 봉(封)함을 받았으나 뒤에 열후억멸책(列侯抑滅策)에 의하여 피살(被殺)되었다〕 같은 사람이 없겠으리오 지금 태평한 세상이 오래 되었으나 창졸간(倉卒間)에 변고(變故)가 나서 바로 서울의 도성(都城)이 무너지고 무인지경(無人之境)인 것 같으니 성패(成敗)의 형세는 이미 나타났고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적이 물러날 것을 도모한 것이 어찌 거짓이 아니리오 그 슬기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배수진을 치는 것이 굳게 요해(要害)를 지키고 싸우지 않으며 다만 적으로 하여금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여러 도(道)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병력을 보충한 연후에 천천히 도모하여야 할것이요 그렇지 않고 외로운 군사가 대적(大敵)과 항전(抗戰)하는 것은 마치 고기덩이를 굶주린 호랑이에게 던지는 것 같아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알것이라』 하였다. 한응인이 마침내 듣지 않고 신할(申硈)과 유극량(劉克良)과 공으로 하여금 강을 건너 진을 치게 하니 공이 이에 분연(奮然)히 크게 한 숨 쉬고 말하기를 『용렬한 사람과는 큰 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조금 있다가 적이 산의 뒤로부터 공격하여 화살과 대포를 일제히 쏘아대니 모든 군사는 강물에 빠져 죽고 한응인은 강 북쪽 언덕에서 바라보다가 넋이 빠져 달아났고 공이 주부(主簿) 안할(安硈)과 삼노(三奴)와 같이 추격(追擊)하여 살상(殺傷)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드디어 전사하였으니 실은 이 해 5월 18일 이었다. 공이 전사하자 한 종의 이름 충휘(忠徽)라는 사람이 홀로 공이 타던 말을 끌고 가평(嘉平)의 집에 돌아와서 공의 칼을 항상 말안장에 걸어 놓았고 난리가 끝나자 옷과 칼을 같이 파주(坡州) 우랑동(牛浪洞) 사좌원(巳坐原)에 장사지냈고 뒤에 宣祖大王 癸卯年 왕명(王命)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공은 본디 용맹과 힘이 뛰어났고 활 쏘고 말 타는데 능하며 병법(兵法)을 잘 알았고 집을 효제(孝悌)로써 다스리고 조상을 받드는데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그 가승(家乘)에 말하기를 공의 사적(事蹟)은 임진강 치제문(致祭文)에서 징험(徵驗)할 수 있고 공의 이름이 이조전망록(吏曹戰亡錄)에 나타나 있고 뒤의 여러 직첩(職牒)과 교서(敎書)에 기록하라고 명령한 것이 있으니 지금까지 믿을 수 있도다. 공의 성(姓)은 沈이요 휘(諱)는 종명(宗明)이며 자(字)는 공회(公晦)이다. 시조는 고려조의 문림랑(文林郞) 위위승(衛尉丞) 휘 홍부(洪孚)요 조선조에 들어와 휘 덕부(德符)와 휘 온(溫)과 휘 회(澮)는 삼대를 이어서 정승이었고 공에게 5대 6대 7대조이시다. 고조의 휘는 원(湲)이니 내자시판관(內資寺判官)이요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증조의 휘는 순도(順道)이니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며 할아버지의 휘는 거원(巨源)이니 증호조참의(贈戶曹參議)이고 아버지의 휘는 화(鏵)이니 進士요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좌의정 통원의 아들로 출후(出后)하였으니 찬성공의 제3자 순문(順門)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한산이씨(韓山李氏) 출(秫)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기미(嘉靖己未 1559년)에 낳아서 萬曆癸未(1583)년 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고 해남현감으로 나가서 순절(殉節)하였으니 수(壽)가 34였다. 부인은 풍산김씨(豊山金氏) 군수 선(銑)의 따님으로 공보다 37년 뒤(仁祖戊辰 2月 12日)에 졸하여 부장(祔葬)하였다. 1남2녀를 두어 아들은 위(暐)니 음직(蔭職)으로 전섬(典韱)이요 장녀는 무과 주부 최천용(崔天用)에게 출가하였고 2녀는 이혼(李焜)에게 출가하였다. 暐의 1남은 유진(儒珍)이니 증장악원정(贈掌樂院正)이요 서자(庶子)에 유순(儒醇)과 서녀(庶女)에 이상형(李尙馨)이 있다. 崔天用이 3남을 두었으니 장남 만득(晩得)은 무과 부사(府使)요 다음은 시득(始得)과 영득(英得)이다. 혼이 3남을 두었으니 동현(東顯)은 병사(兵使)요 동구(東耉)와 동상(東相)은 부사(府使)이다. 유진이 4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직( ![]() ![]() ![]() 나는 공과 동조(同祖) 청송이요 계제(季弟) 수(銖)가 공의 지손(支孫)에게 출후 하여 공의 순절한 일을 익히 들었고 성( ![]() 첨지중추부사 심정진 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