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공(휘 영)영죽팔절첩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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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공 휘 영 묘소 묘 비 |
十一世祖 正言公 諱 苓 咏竹八絶帖後
敬題正言諱苓咏竹八絶帖後 『公之直節不可泯者而無家乘墓文惟此所記豈足毁也』 右八絶詩卽我外高祖故正言沈公在謫時所製也嗚呼悕矣公諱苓字天老靑松人公於 明廟乙巳歲在諫院抗危言得罪初謫丹城俄移碧潼而路由良才驛過去始公之族姪鄭彦慤嘗深有怨於公而知公平日好用朱紅濡筆題詩自爲怨國語朱書驛壁上誣謂公筆撤其壁而獻之凶人陳復昌力助之鍊織大獄公竟不免於禍彦慤以是功取榮顯爲騎曺堂上一日冒雨赴衙大風忽起笠帽墮地馬驚騖從者失轡彦慤落於馬足入鐙孔不得脫馬愈驚且走愈疾彦慤肢解死只一脚罥于鐙馬卒來入于公之門視之則公爲兵郞時所乘者也人咸以爲神後公之胤諱仁祺爲靑丹道察訪而復昌子坐於父罪配是驛使之立役爲步從而不遵其令則輒杖之復昌愈慮憤恚感疾而斃其子亦以此自縊死噫世之人嘗言天不可必觀於此二事者其洄泬之理報應之效果何如哉公嘗手錄日問見聞行事及吟咏撰述而其詩句則朱書以別之名雨晴錄緫九卷後失於兵燹中只絶筆一卷在焉公之曾孫郡守諱景龜改粧而寶藏之郡守公歿而又失焉公以精忠勁節夙罹慘禍旣不得大布於一時而不幸平昔文字又蕩蕩不傳於後世重可悲也公素善揎在潼城日手寫疎筍風雨烟祜老雪八竹而各題一絶盖寓意而自況也畵亦見失獨其詩在至今讀之辭道而意正夫其剛正之氣淸肅之容凜凜乎如在左右信可敬也 外玄孫箕城趙門衡謹記 11세조 정언공 휘 영(苓) 영죽팔절첩후 삼가 정언(正言)公 휘 영(苓)의 대나무를 읊은 팔절의 시화첩(詩畵帖) 말미에 글을 쓰나니. (공의 곧은 절개가 민멸되어서는 안되며 가첩과 묘문(墓文)도 없으나 오직 이 기록만은 어찌 없어지리오.) 위에 기록한 팔절시(八絶詩:여기서는 팔폭의 그림에 절시(絶詩) 8수를 이름)는 나의 외고조부이신 심 정언공(沈正言公)께서 귀양 가 계실 때 지은 것이다. 아! 슬프도다. 공의 휘는 영(苓)이오, 字는 천로(天老)이니 靑松人이다. 明宗乙巳(1545)년에 사간원(司諫院)에서 근무할 때 정당한 간언으로 항변하다가 죄를 얻어 처음에 단성(丹城)으로 귀양 갔다가 벽동(碧潼)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길이 양재역(良才驛)을 경유하여 지나갔다. 당초에 공의 조카벌 되는 정언각(鄭彦慤)①이 일찍부터 공에게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는데 공께서 평소 주홍색깔을 써서 고운 붓으로 시제(詩題) 쓰기를 좋아함을 알고 언각이 스스로 나라를 원망하는 글을 만들어서 역의 벽상의 붉은 글씨로 써 붙이고 공의 필적인양 꾸며서 그 벽지를 걷어서 조정에 헌납했고, 흉인(凶人) 진부창(陳復昌)②이 힘껏 조력하여 큰 옥사로 얽어매었다. 이로써 공이 끝내 화를 면하지 못했고 언각은 이런 공으로 영달을 얻어 병조의 당상관이 되었다. 하루는 비를 무릅쓰고 관아로 가는 도중 큰바람이 홀연히 일어나서 입모(笠帽)가 땅에 떨어지고 말이 놀래 뛰니 시중드는 사람이 고삐를 놓치고 언각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발이 등자구멍에 끼어서 빠지지 않고 말은 더욱 놀래어 달아나고 더욱 빨라서 언각은 팔다리가 빠져 죽었으며 다만 다리 하나만이 등자에 걸린 체로 마침내 말이 공의 집 문 앞까지 끌고 왔는데 살펴보니 공께서 병랑(兵郞)으로 있을 때 타던 말이었으니 다들 귀신의 소행이라 하였다. 공의 아들 인기(仁祺)가 청단도(靑丹道) 찰방(察訪)으로 있을 때 부창의 아들이 아비의 죄에 연루되어 이 역으로 와서 복역했는데 끌려 다니다가 영을 어겨서 곤장으로 치니 진부창이 더욱 우려되고 분통이 터져 병에 걸려 쓰러져 죽었으며 그의 자식 역시 이 일로 목매어 죽었다. 아!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무심타고들 하나 반드시 이 두 건의 일을 보게 되면 그 되돌아가는 이치와 앙갚음되는 효험이 과연 어떠한가? 공은 늘 손수 일간 견문이나 행사 및 읊조리는 시문들을 찬술하여 기록해 두는데 그 시귀들을 붉은 글씨로 써서 구별했으니 이름하여 우청록(雨晴錄)이라 했고, 모두 9卷이었는데 병화중에 잃어버리고 다만 마지막에 쓴 한 권이 있었다. 공의 증손인 군수 경구(景龜)가 다시 꾸며서 가보로 간직했었는데 군수가 죽은 뒤에 또다시 잃어버렸다. 공은 정성스럽고 굳은 충절로써 일찍 참화에 얽혀 이미 한 때에 크게 펴보지도 못하고 불행하게 옛날의 문장들이 또한 없어져서 후세에 전하지 못했으니 거듭 슬플 뿐이다. 공이 평소 글씨와 그림을 잘 했는데 당성에 있을 때 손수 소죽(疎竹)과 순(筍), 풍(風), 우(雨), 연(煙), 호(祜), 노(老), 설(雪) 등 팔죽(八竹)을 그려서 각각 절시 한 수씩을 지어 넣었으니 대개 마음 내키는 대로 스스로 만든 것이나 그림 역시 잃어버리고 유독 그 때의 시만이 지금껏 남아 있어서 읽게 되니 표현이 긴박하고 뜻이 바르다. 무릇 그 굳고 바른 기운과 맑고 엄숙한 형용이 늠름하게 좌우에 있는 것 같아서 진실로 공경스럽다. 외 현손 기성 조문형(箕城 趙門衡) 삼가 씀. 주(註) ① 정언각(鄭彦慤):주정가 1498~1556(明宗 11年). 字는 근부(謹夫)진사 희검(希儉)의 아들. 선조 때 경기도 관찰사와 모든 관직이 추탈(追奪)되었음. ② 진부창(陳復昌):?~1563(明宗 18年) 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수초(遂初) 현감 의손(義孫)의 아들. 사관(史官)은 이자를 독사(毒蛇)라고 기록하였고 공조참판(工曹參判)까지 역임하다가 삭탈관직되고 삼수부(三水府)에 귀양갔다가 죄가 가중되어 위리안치 되었다가 귀양처에서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