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안공(휘 광언)신도비명

호안공 휘 광언 묘소
소재지:경기도 남양주시 오남면 양지리


左叅贊胡安公諱光彦神道碑銘
公諱光彦字彦之靑松沈氏六代祖諱德符顯麗季以功封靑城伯入 國朝爲左侍中侍中生諱澄仁壽府尹府尹生諱石雋 贈戶曹判書是公高祖也曾祖諱璿京畿觀察使祖諱安仁慶尙右道兵馬節度使考諱濱 贈吏曹判書是聘大司成徐岡之門以 弘治庚戌生公天資秀偉自髫齔有異凡兒甫十三丁外憂十六又丁內艱能執喪如禮時燕山主短喪法甚嚴公一無所顧旣而發憤力學通究經傳以及國典明律無不閱覽人知其爲遠大器 正德己卯俱中生員進士試 嘉靖乙酉登甲科第一名時鄭文翼公掌試以榜魁得人自賀未唱榜吏部注擬於正言其負時望已如此初授成均館典籍遷司諫院正言改禮曹佐郞選入弘文館爲副修撰累陞校理應敎兼 侍講院文學弼善再爲司憲府掌令庚寅見忤金安老置散數年乃復叙旋出爲昌原府使坡州牧使課績殊異 中廟賜表裡奬之安老敗入爲宗簿寺正司憲府執義司僕寺正適以前任外未滿朞隨例出宰富平府庚子監司又以政最聞特陞堂上拜刑曹叅議歷大司諫禮曹吏曹叅議觀察全羅道瓜滿入丞政院序陞至左副承旨又爲叅議兵吏曹己酉特拜戶曹叅判兼同知義禁府事遷吏曹叅判兼帶春秋館自以前後在銓衡多年辭病遞免歷刑曹復爲吏曹兼副摠管壬子特拜漢城判尹兼都摠管累遷工曹刑曹判書議政府左右叅贊其判京兆長秋部皆至於三最後歷知中樞敦寧府事 隆慶戊辰四月戊子終于正寢享年七十有九訃聞上爲之嗟悼不視朝者二日賻賜吊祭有司俱擧太常易名曰胡安六月丁酉葬于廣州治西長旨里庚坐甲向之原公爲人簡嚴篤厚行已有方當官處事持正不骫尤拊恤宗族其窮不能婚嫁者爲助資裝使無失時奉祭祀甚謹俗節拜墓亦必躬往老而不廢不事産業不喜權勢平時恬靜無爲遇可言輒奮發乙巳以後國事不靖公嘗仰屋竊歎欲退不可但形諸賦詠而已其判刑部也有士人與小民爭訟而一時數三權貴力右士人以此不官吏能敢決者累年公乃
畀小民都憲尹春年誤聽而駁之公略不爲動旣而春年知其實詣門謝罪公受而不謝辛酉夏 明宗御禁苑試諸生製述講經仍特 賜第而外戚多中頗有不公之譏適會天變延訪宰樞一無言及是者公獨直斥不諱辭甚激切 上爲之動容命罷其榜物論多之以爲鳳鳴朝陽公於年至後乞骸不遂公務之外不喜出入諸子居室屋相接日夕環侍兒孫滿前獻笑供歡每佳辰令節游衍郊野鶴髮康强親屬擁道觀者指爲畫圖中人也公娶漢陽趙氏封貞夫人掌隸院判決事邦禎之女漢川府院君溫之玄孫也和淑貞順事公祗愼治家勤儉親戚隣里咸仰其仁庚戌正月丁亥下世享年六十其三月甲申窆在公兆之左凡生四男一女男長曰鉉典牲叅奉事次曰鎬成均進士次曰鍊礪山郡守次曰錦司憲府監察女適前淮陽府使朴胤韓側室又有一男三女男曰銀觀象監叅奉女適宗室西興守鶴貞次適觀象監奉事辛應龍次幼叅奉生一男二女男宗範抱川縣監女適忠義衛李英煥次適幼學朴有容進士無子取監察子宗敏爲后礪山生三男一女男宗吉宗厚宗善女適前直長李長林監察生七男宗道宗忱宗敏宗直宗周宗毅宗準淮陽生一男一女男曰文榮進士女適宗室陽原守譓抱川有二男四女男俅俒女皆幼忠義衛有二男一女男景溫長興直長次景良女適士人宋樺壽宗道一男保宗忱一男偰侃宗敏一男偉一女皆幼陽原有三男三女男思仁好仁求仁女皆幼文榮一男女景溫一女樺壽二男銀二男一女西興二女應龍一男皆幼進士君持其家狀屬寅曰先人葬有年矣尙闕神道之刻不肖無所逃罪子之先君與吾先人少同遊黌舍吾又忝子交契敢以請寅屢辭不獲據其狀叅以所見聞者錄之如右仍繫以銘銘曰沈出靑松大自侍中台階壼極接武連封公少孤寄奮志立躬自在家食聲望已隆翶翔館閣榮路何窮忤姦久外績異徵쥎歷敭華貫終始恪恭遂登八座亦亞貳公公之受性剛毅朴忠不媚權力惟直是從遇變盡言感動 宸衷公道再振世偉其功內行兼至奉先恤宗天報孔昭子孫其充晩景優閒壽考胎融諸福咸備在今孰同廣陵西壤是公幽宮貞珉有刻永流渢

萬曆二年甲戌十月 日立
宋 寅 撰


좌참찬호안공휘광언신도비명(번역문)
공의 이름은 광언(光彦), 字는 언지(彦之)니 청송 심씨다. 6대조의 이름은 덕부(德符)이고 고려 말에 현달하여 그 공훈으로써 청성백(靑城伯)에 봉(封)해졌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좌시중(左侍中)이 되었다. 시중이 징(澄)을 낳으니 인수부윤(仁壽府尹)①이고 부윤이 석준(石雋)을 낳으니 증호조판서이고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선(璿)이니 경기관찰사이다. 조부 이름은 안인(安仁)이니 경상우도의 병마절도사이다. 아버지 이름은 빈(濱)인데 증이조판서이고 이분이 대사성 서강(徐崗)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경술(庚戌:1490)년에 공을 낳으니 타고난 자질이 크게 빼어나서 이를 갈 나이 때부터 보통 아이들보다 다른 데가 있고 겨우 13세 때 부친을 여의고 16세에 다시 어머니를 여의었으나 능히 집상을 예법대로 하였다. 이 때 연산군이 단상법(短喪法)②을 주장하여 심히 엄하였으나 공은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분발하고 힘써 배워서 경전(經傳)③을 다 공부하여 국가의 법률집을 모두 읽었으니 사람들이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을 알았다.
기묘(己卯:1519)년에 생원과 진사시험에 다 합격하고 을유(乙酉:1525)년에 갑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당시 정문익(鄭文翼)이 시험을 주관했는데 공께서 으뜸으로 방(榜)④을 뽑고 인재를 얻었다고 자축을 했는데 방문을 발표하기 전에 이부(吏部)에서 정언(正言)이 될 것으로 추측했으니 당시의 기대가 이미 이러하였다. 초임이 성균관 전적이었고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다가 예조좌랑으로 옮기고 홍문관 부수찬으로 뽑혔다. 여러 번 승급하여 교리 응교 겸 시강원 문학 필선이 되고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경인(庚寅:1530)년에 김안로(金安老)에게 밉보여 두어 해 쉬었다가 복직되고 이어 창원부사, 파주목사로 외직에 나가서도 근무성적이 특수하여 중종께서 안팎으로 표창을 하였다. 김안로가 밀려난 다음 종부시 정(正)으로 들어와서 사헌부 집의가 되고 사복시 정(正)이 되었으나 마침 전임인 외직이 만기가 되지 않아 관례에 따라 부평부사로 나갔다가 경자(庚子:1540)년에 감사가 되고 다시 행정력이 으뜸으로 드러나 특별히 당상관으로 오르고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대사간과 예조와 이조참의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만기가 되어 승정원으로 들어와서 서열대로 좌부승지에 오르고 다시 병조와 이조의 참의가 되었다.
기유(己酉:1549)년에 특별히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임명되고 호조참판 겸 춘추관으로 옮겼다. 이 때를 전후하여 여러 해 동안 전형관(銓衡官)⑤으로 있다가 병가를 얻어 휴직중 다시 이조를 거쳐 형조 겸 부총관이 되었다. 임자(壬子:1552)년에 한성판윤 겸 도총관이 되고 여러 번 공조·형조판서로 옮겼다가 의정부 좌우참찬 한성판윤 형조판서를 모두 세 차례씩 치르고 마지막으로 지중추(知中樞) 돈녕부사(敦寧府事)를 역임하였다.
무진(戊辰:1568)년 四월 무자일에 정침(正寢)⑥에서 생을 마치니 향년 79세였다. 부음이 들리자 명종께서 슬퍼하시며 이틀 동안 조회를 폐하시고 부의와 문상을 유사를 시켜 갖추셨으며 태상관에서 호안(胡安)이라고 시호를 내렸다. 6월 정유일에 광주(廣州) 서쪽 장백리 경좌갑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사람됨이 간엄(簡嚴)⑦하고 독후(篤厚)⑧하여 행실이 법도가 있어 관직으로 처사함에 바르고 굽음이 없고 더욱이 종족을 거두어 어루만지고 가난하여 혼인하기 어려운 자에 혼구를 도와 때를 잃지 않도록 하고 봉제사에는 더욱 근엄하며 명절에는 반드시 몸소 성묘하였으며 늙도록 폐하지 않았다. 생산업에는 일삼지 않았고 권세도 즐기지 않았다. 평소 할 일 없이 조용한 듯하나 옳은 일에는 문득 분발하여 말하였다.
을사(乙巳:1545)년 이후 국사가 어렵게 되자 공은 늘 집을 바라보며 가만히 탄식하고 사퇴하는 것도 옳지 않아 다만 읊조림에 심정이 나타날 뿐이었다. 형조에서 판관으로 있을 때 선비 집안이 약소한 사람과 시비가 있었는데 일시에 두세 사람의 세도가가 힘으로 선비를 돕는 지라 이 때문에 관리가 감히 결정을 짓지 못하고 여러 해를 끌었는데 공이 약소민을 두둔했으나 수사관 윤춘년(尹春年)이 잘못 듣고 소민을 논박함에 공이 지략으로써 동요하지 않으니 윤춘년이 그 실정을 눈치 채고 문간에서 사죄함에 공이 인정하였다.
신유(辛酉:1561)년 여름에 명종께서 비원(秘苑)에 임어하시어 제생에게 글 짓고 강하는 시험이 있었는데 유별나게 외척에게 많이 합격시켜서 불공평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때마침 재변(災變)⑨을 만나 요직들이 방문했으나 여기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이 때 공이 홀로 거리낌 없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함에 말씀이 심히 격절하여 임금께서 시인하시고 그 발표를 취소하게 하니 칭론이 많았고 봉황이 조양(朝陽)에서 울었다고 했다. 공이 많이 늙어서 휴퇴를 빌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공무 이외에는 출입을 싫어하니 모든 아들이 함께 기거하며 아침 저녁으로 서로 접촉하고 아들과 손자들이 앞에 가득히 둘러모시고 웃음꽃으로 같이 즐기고 매양 좋은 때와 명절에는 교외에 나가 노니 학발(鶴髮)⑩이 강건하고 친족들이 길을 에워싸니 바라보는 이들이 그림 가운데 선인이라 하였다.
공이 한양 조씨와 결혼하니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고 장예원 판결사 방정(邦楨)의 딸이며 한천부원군 온(溫)의 현손이다. 화순하고 정숙하며 공을 섬김에 공손하고 삼가며 치가(治家)에 근검하여 친척과 이웃들이 다들 그 어짐을 우러러 보았다. 경술년 정월 정해일에 향년 60세로 마치니 그해 3월 갑신일에 공의 무덤 왼편에 묻었다.
무릇 4남1녀를 낳으니 맏아들 현(鉉)은 전생참봉이고, 둘째 아들 호(鎬)는 성균진사이고, 셋째 아들 연(鍊)은 여산군수이고, 넷째 아들 금(錦)은 사헌감찰이고, 딸은 회양부사 박윤한(朴胤韓)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 또 1남3녀가 있으니 아들인 은(銀)은 관상감참봉이고, 맏딸은 종실 서흥수(西興守) 학정(鶴貞)에게, 둘째 딸은 관상감봉사 신응룡(辛應龍)에게 출가하고 셋째 딸은 아직 어리다.
맏아들인 참봉 현이 1남2녀를 낳으니 아들인 종범(宗範)은 포천현감이고 맏딸은 충의위 이영환(李英煥)에게, 둘째 딸은 유학 박유용(朴有容)에게 출가했다. 둘째 아들인 진사 호는 자식이 없어 감찰의 아들 종민(宗敏)으로 뒤를 삼았다. 셋째 아들인 군수 연은 3남1녀를 낳으니 아들은 종길(宗吉)·종후(宗厚)·종선(宗善)이고 딸은 직장 이장림(李長林)에게 출가하였다. 넷째 아들인 감찰 금이 7남을 낳으니 종도(宗道)·종침(宗忱)·종민(宗敏)·종직(宗直)·종주(宗周)·종의(宗毅)·종준(宗準)이다. 사위인 회양 박윤한이 1남1녀이고 아들은 진사 문영(文榮)이고 딸은 종실 양원수(陽原守) 혜(譓)에게 출가했다.
손자인 현감인 종범이 2남4녀를 두니 아들은 구(俅)와 완이고 딸은 다 어리다. 손주사위 충의위 이영환이 2남1녀를 두니 맏아들 경온(景溫)은 장흥직장이고 둘째 아들이 경량(景良)이며 딸은 선비 송화수(宋樺壽)에게 출가했다. 손자인 종도는 아들 보(保)를 낳고 종침은 아들 간(侃)을 낳고 종민은 아들 위(偉)를 낳고 딸이 하나 있으나 어리다. 양원수 혜가 3남3녀를 두니 아들은 사인(思仁)·호인(好仁)·구인(求仁)이고 딸은 다 어리다. 경온은 1녀, 화수는 2남, 은은 2남1녀, 서흥수는 2녀, 응룡은 1남을 두었으나 다들 어리다.
진사군이 가장(家狀)⑪을 갖고 와서 내게 부탁하였다.
『선친의 장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아직까지 신도비(神道碑)⑫를 세우지 못하여 불초(不肖)의 죄를 피할 수 없으니 송공(宋公)의 선군(先君)⑬은 우리 선인(先人)⑭과 같은 글방에서 공부하고 못난 저 또한 송공과 욕되게도 함께 교유하고 있으니 감히 요청합니다.』
내가 여러번 사양했으나 도리없이 그 가장에 의거하고 나의 견문을 보태어 위와 같이 기록하고 인해 명(銘)으로써 이으니 명(銘)에 가로되,
심씨 청송으로부터 계출하고 시중으로부터 성대하였네.
대전 뜰에 내전(內殿)⑮이 극진하니 자취를 이어 봉(封)함이 연했도다. 공이 어려서는 외롭고 기이하나 뜻을 떨치고 몸을 세웠네.
집에서 놀고 있을 때부터 명망은 이미 높았고 정부 요로에 훨훨 날았으니 영화길 끝이 없도다.
간당의 미움받아 외직에 오래 있고 특이하게 공적 쌓아 훌륭히 부름받네.
두루 거친 빛난 관록 한결같이 공손했고 팔좌(八坐)⑯에 올라서고 이공(二公)⑰을 버금했네.
공께서 받은 성품 강직하고 충박(忠朴)하니 권력에 아첨 않고 오직 곧고 옳게 쫓아 변란 당해 진언하니 상감 마음 감동하고 공도를 다시 떨쳐 위대한 그 공일세.
안행실이 지극하여 봉선(奉先)⑱하고 휼종(恤宗)⑲하니 크게 밝은 하늘 보답, 그 자손이 충실하네.
늘그막에 안한(安閑)하여 수고(壽考)가 융숭하고 모든 복을 두루 갖춰 뉘라서 같을손가. 광릉땅 서쪽 언덕, 공의 무덤 여기 있고 옥돌에 글을 새겨 칭송소리 한이 없네.
      

1574年甲戌10月 日 세움
      송 인 지음


註① 인수부(仁壽府):조선조 초의 세자를 옹위교도 하던 관청. 후에 세자익위사로 바뀜.
② 단상법(短喪法):연산군 때 상주의 복제 기간을 대폭 줄이고자 짧게 책정한 제도.
③ 경전(經傳):성경현전을 줄인 말. 경서와 해설책.
④ 방(榜):합격 발표문. 당시 벽에 붙였음.
⑤ 전형관(銓衡官):과거시험관.
⑥ 정침(正寢):평소 기거하는 방이 아니고 제사나 큰일 때 쓰는 몸체방.
⑦ 간엄(簡嚴):간략하면서 엄한 것.
⑧ 독후(篤厚):독실하고 후덕한 것.
⑨ 재변(災變):천재지변의 준말.
⑩ 학발(鶴髮):학의 깃털, 즉 노인들이 늙어서 머리털이 백발이라는 뜻.
⑪ 가장(家狀):집안의 계통과 행장을 요약해 적은 보첩.
⑫ 신도비(神道碑):임금이나 고관의 무덤 가까이 큰길 옆에 세우는 돌비(碑).
⑬ 선군(先君):남의 부친 사후의 존칭.
⑭ 선인(先人):자기 부친 사후의 칭호.
⑮ 내전(內殿):중전이니, 즉 왕비가 있는 곳.
⑯ 팔좌(八坐):육조(六曹)와 이사(二司). 二사는 사헌부 사간원.
⑰ 이공(二公):의정부의 좌우 찬성을 이름.
⑱ 봉선(奉先):조상을 잘 받듬.
⑲ 휼종(恤宗):어려운 집안을 잘 보살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