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부원군(휘 전)묘갈명

 

감사공 휘 전 묘소
소재지: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 약산 사동

묘비석


 

감사공 신도비


十世祖 贈領議政 靑坡府院君 行京畿觀察使 諱 銓 墓碣銘
不肖敏求外王母靑松沈氏其考曰京畿觀察使諱銓字叔平以萬曆己丑卒葬通津藥山距今四十有七載諸孫承旨詻與嗣曾孫光漢乃克立石冢隧而命不肖鑱其陰嗚呼公卒之歲不肖始生呱呱昧乎奚由徵謹摭家乘一二而敍之曰公之考諱達源以修撰遭己卯士禍幸免事在己卯錄 贈吏曹參判妣貞夫人坡平尹氏吏曹參判希仁女公嘉靖庚辰生自幼通敏有文癸卯登上庠丙午釋褐拜弘文正字轉著作博士至修撰遷吏曹佐郞正郞陞應敎遇有不悅者連出爲豊德長湍入掌樂正丙辰擢重試文科階通政歷承旨禮兵曹參議乞外得全州奉尹夫人備極牲養以勞增二品秩俄拜京畿觀察使其才長於剸劇所蒞稱治丁卯奉使 中朝還未到敲撼又發文致刻深削其職公旣廢屛居西郊蒔花卉左右圖書間唯與隣並雅故琴碁歌酒以取適未嘗失色於嗟戚要以榮悴豫奪無動乎中如是而已子姓甚繁時節奉觴稱壽長幼滿前天固以優閑之福餉之矣及卒春秋七十公內行飭備睦愛骨肉撫恤孤窮人所難行我則有裕素性仁和一以誠信期物而不設隄防拙於處俗早負盛譽藝業通茂側目者己耽耽矣華塗方闢勃發未艾中罹挫閼一躓不振嗟乎嗟乎然公歿未十年雪寃復爵又十年而用子勳 贈領議政封靑坡府院君盖至是而公之天定矣配全義李氏縣監諱翰之女令德淑懿宜婦宜母後公十四年卒乃合葬銘曰
旣之黯黮厥亦惟天旣之昭晣厥亦惟天不嬴在身以多後昆厥亦惟天
外曾孫 大司憲 李敏求 撰
曾孫 大君師傅  光洙 書
謹按公正德庚辰十二月二十二日生萬曆己丑十月初九日卒而碣文只錄嘉靖庚辰生春秋七十嘉靖本無庚辰自己丑泝計至七十則乃正德庚辰也碣文所謂嘉靖誤記無疑夫人正德庚辰十二月二十日生萬曆壬寅三月初十日卒此亦碣文見漏故쯂錄 之

10세조 증영의정 청파부원군 행경기관찰사 휘 전(銓) 묘갈문
불초 민구(敏求)의 외조모는 청송 심씨인데 그의 아버지는 경기관찰사를 지낸 휘가 전(銓)이고 字가 숙평(叔平)인데 萬曆己丑(1589)년에 졸하여 通津藥山에 장사 지냈는데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이다. 손자인 승지 액(詻)이 사증손(嗣曾孫)①인 光漢과 더불어 산소에 돌을 준비하고 불초에게 비문을 새기도록 명하였다. 아! 공께서 졸하신 해에 불초가 처음 태어나서 아무 것도 몰랐으니 어떻게 징거하리오. 삼가 가승(家乘) 몇 권을 살펴보고 서술하나니 공의 아버지의 휘는 달원(達源)인데 수찬(修撰)으로써 기묘사화를 당했으나 다행스럽게 면하였으니 사적이 기묘록(己卯錄)에 있고 증직이 이조참판이다. 貞夫人이신 어머니는 坡平尹氏로서 이조참판 희인(希仁)의 딸이다. 공이 正德庚辰(1520)년에 태어났는데 어릴 적부터 민첩하고 재주가 있었다. 계묘(癸卯:1543)년에 상상(上庠)②에 오르고 丙午(1546)년에 평민의 옷을 벗고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다. 저작(著作)과 박사(博士)로 전직한 다음 수찬(修撰)에 오르고 이조좌랑과 正郞으로 옮긴 다음 應敎로 올랐는데 시기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연하여 豊德과 長湍으로 나갔다가 장악원 정(掌樂院 正)으로 들어왔다. 丙辰(1556)년에 重試文科③에 뽑혀서 通政 위계에 오른 다음 승지와 禮·兵曹參議가 되었으나 외직을 빌어 全州로 나가서 尹夫人(어머니)을 뫼셨는데 항상 육류와 좋은 음식을 갖춰 드렸다. 공로로써 2品이 더해지고 얼마 안되어 경기관찰사가 되었는데 그 재능이 판단하는 솜씨에 능하여 가는 곳마다 잘 다스린다는 칭찬을 받았다. 丁卯(1567)년에 중국 조정에 사신으로 나갔는데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 또다시 헐뜯기고 올리는 글들이 혹심하여 그의 직책이 삭탈당했다. 공은 옷을 벗고 서교(西郊)에서 울타리를 치고는 꽃모종을 심으며 좌우로 도서를 펄쳐 놓고 그 사이에서 이웃과 더불어 잘 어울려서 거문고와 바둑과 술과 노래로써 알맞게 소일하며 조금도 실색이나 한탄함이 없었으며 척속들이 성쇠로써 웅성거렸으나 중심에서 동요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할 뿐이니 자손이 심히 번성하였고 절후따라 잔을 올리고 수를 빌며 노소가 앞에 가득하니 하늘이 진실로 넉넉하고 한가한 복록을 누리게 하였다. 급기야 춘추 70세에 세상을 마쳤으니 기본 행의를 고루 갖춰서 친척간에는 화목하고 우애했으며 외롭고 궁박한 자들을 어루만져 구휼하니 남들은 이행하기 어려우나 스스로 여유롭게 지냈다. 본래부터 성품이 어질고 화순하여 한결같이 정성과 신의로써 사물에 대응하며 남들과 간격을 두지 않고 속된 처신에는 재간이 없었으나 일찍부터 무성한 예찬을 받으며 학문을 관통했으니 곁눈질 하는 자들이 흘겨보았다. 밝은 장래가 한창 열려가다가 뜻을 펼침에 진취하지 못하고 중간에 얽히고 막혀서 한차례 걸려들어 떨치지 못했으니 아깝고 슬프도다. 그러나 공이 졸한지 10년이 채 못되어 억울함이 풀려 벼슬이 회복되고, 다시 10년뒤에 아들의 훈업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파부원군(靑坡府院君)에 봉하게 되었으니 대개 이렇게 되고서는 공의 천정(天定)이라 하겠다. 부인은 全義李氏이니 현감 한(翰)의 딸이다. 훌륭한 부덕으로 맑고 아름다웠으니 현모양처였다. 공보다 14년 뒤에 卒하여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암울함을 당했으니 저 역시 천명이요.
소명하게 밝았으니 이 역시 천운이다.
내 몸에는 남긴 것이 없었으나 후손들이 많았으니 이 또한 천정이다.
외 증손 대사헌 이민구(李敏求) 글 짓고
증손 대군사부(大君師傅) 광수(光洙) 글 씀.

삼가 살피건대 공은 정덕경진년 12월 22일 출생하여 만력기축 10월 초9일 졸하였으나 비문에는 다만 가정경진(嘉靖庚辰)년생으로 춘추가 70세라고 되었으니 가정년대에는 원래 경진년이 없고 기축년으로부터 소급 계산하여 70년인즉 이에 정덕경진(正德庚辰)년이 되니 비문에 적힌 가정이란 연호는 오기임이 분명하다. 부인은 정덕경진년 12월 20일에 출생하여 만력임인년 삼월 초10일에 졸하였으나 이 또한 비문에서 누락 되었음으로 아울러 기록한다.

주(註)
① 사증손(嗣曾孫):대를 이은 증손, 즉 주손(胄孫).
② 상상(上庠):사마시 등 자격 시험에 합격한 자. 또는 성균관 정규 유생.
③ 중시(重試):과거에 급제한 사람 중에서 치룰 수 있는 두 번째 시험. 중시에 붙으면 중용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