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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공 휘 순 묘소 묘표석 |
九世祖
都正公 諱 淳 墓碣銘竝書
族侄相洪族孫琫求抱家狀而來余梧炭之廬請曰吾先祖都正公德行節義著於當世足爲後世之法而家門零替久未遑繫牲之儀今幸宗議詢同將欲役志願垂一言而賜之銘余雖老昏又不文百世一室之地何敢怒恭于哉公卽余之十二世祖己卯名賢鈍庵公從叔也諱淳天順甲申生纔髫齔失恃長於渭陽宅天賦甚高聰明絶人年纔十餘不由師承能解義理所執不失正直叅判公典海州卒于官訃音遽至血淚登程曰病不試藥沒不臨命天地間一罪人也遂返葬焉三年居廬哀毁踰禮情文備至終喪後省掃之節終始不廢百年如一日有終身慕焉以門蔭仕龍驤衛副司直轉敦寧府都正當 中廟時己卯禍作忠良誅 ![]() ![]() 運早否於公之幼執不悽其枯魚索省掃平生如一日終身慕兮孝莫若黃兎之尾靑蠅紛忠良盡兮國空虛痛自極矣無意世賦而臥田廬徜徉乎山水之間志吾志兮樂吾樂義理躍如俟百世刻此珉兮永不鑠
己卯四月十三日 9세조 돈녕부도정공 휘 순(淳) 묘갈명병서 族侄인 相洪과 族孫인 琫求가 家狀을 갖고 누추한 나의 집에 와서 請하기를 先祖都正公의 德行과 節義가 當世에 出衆하시어 可히 後世의 귀감(龜鑑)이 되셨으나 家門이 가난하여 오래토록 禮儀를 갖추어 드리지 못하여 황급(遑急)한 마음 짝이 없더니 이제 다행이도 宗議가 詢同하여 將次 山役을 하고자 하니 銘을 지어 달라기에 나는 비록 늙고 글이 짧으나 어찌 한집안의 處地인데 恭遜하고 믿음직스런 付託을 싫다할 것인가. 公은 나의 12世祖이신 己卯名賢 鈍庵公의 從叔이시다. 諱는 淳이시니 天順甲申 西紀1464年生이시고 어렸을 때 어머님을 여의시고 外家에서 크셨으며 天禀이 매우 高尙하시고 聰明함이 絶人이신지라 10餘歲에 스승의 가르침이 없어도 能히 義理를 解得하고 正直함을 잃지 않으셨다. 叅判公(考位諱安智)께서 海州任地에서 別世하셨다는 訃音을 들으시고 血淚로 슬퍼하시며 海州로 急히 가시면서 病患에 藥을 써드리지도 못하였고 別世하실 때 臨終도 못했으니 天地間의 한 罪人이라고 말씀하셨으며 葬事지낸뒤 廬幕에서 侍墓하시며 슬퍼하심이 禮를 넘으셨고 情과 文을 갖추셨다. 終喪後에도 省掃의 禮를 끝까지 廢하지 아니하시고 終身토록 하루같이 思慕하셨다. 그런가운데서도 용양위부사직(龍쵃衛副司直)으로 계시다가 敦寧府都正으로 전임 되시었으나 西紀1519年 中宗時 己卯士禍를 當하여 忠臣과 어진이를 주살(誅殺)하고 귀양보내며 아첨하는 小人輩들은 벼슬이 날로 높아지니 公께서는 개연(慨然)히 벼슬을 그만 두시고 白湖山 기슭에서 杜門自靖하시었고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셨다. 西紀1529年 嘉靖己丑 6月14日 殞命하시니 享年이 66歲이시었으며 遺命에 따라 白湖山에 安葬하였다. 夫人墓는 右側癸坐原이니 쌍봉(雙封)이다. 둔암공(鈍庵公)이 道伯時 와서 살펴보시고 개탄(慨歎)하시기를 從叔의 높은 行實로서 어찌 이렇게 되셨습니까? 하시며 그 才德을 펴지 않으셨음을 哀惜히 여기셨다. 우리 沈氏의 本은 靑松이요 始祖 휘는 洪孚이시며 麗朝의 文林郞이시었다. 四世祖 諱德符께서는 李朝勳業으로 청성백(靑城伯)에 이르셨고 7世祖 諱 선(璿)께서는 觀察使를 지내시고 단묘명신(端廟名臣)이며 號는 忘世亭이시니 이 분들이 公의 할아버지 以上이시다. 考의 諱는 안지(安智)시고 牧使요 贈職은 기성부경(騎省副卿)이시며 妣位 慶州金氏는 贊成이신 從直의 따님이시다. 公의 配位 淑夫人 河東鄭氏는 直長인 薙의 따님으로서 3男2女를 낳으셨다. 長子 光元은 部將이요 次子 光亨은 訓導요 季子 光貞은 通政이시다. 長女는 生員인 丁爀에 出嫁하시고 次女는 忠義衛 李涑에 出嫁하셨다. 孫을 말하면 기(錡)는 直長이요 종(鍾)은 叅奉이며 정(鉦)은 直長이시다. 曾孫 언겸(彦謙)은 同樞요 민겸(敏謙)은 主簿이시다. 玄孫 민헌(民獻)은 宣武郞이요 민각(民覺)은 縣令이시다. 後孫 世日은 進士요 世重도 進士요 世厦도 進士며 학( ![]() 아? 公의 才德과 節義는 天性에서 自然히 우러나셨으니 平日의 좋은 말씀과 善行이 적지 아니 하셨으나 오래되고 병도(兵燾)에 문헌(文獻)이 없어졌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當時 충조(虫雕)의 變(走肖爲王)으로 간교(奸狡)한 小人輩들이 무고(誣告)하여 賢哲人材가 참육(慘戮)되니 이 어찌 君子가 나아갈 때인가? 하시며 公께서는 世相을 보시고 앞날을 걱정하시며 모든 것을 사양(辭讓)하셨으니 그 識見의 高明하심과 義理의 正大하심을 비록 후백세(后百世) 뒤에라도 반드시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오직 이 일만 갖고도 가히 公의 平生을 알만하지 않는가. 善이 이보다 더 善한 것이 없고 아름다움이 또 어찌 이보다 더 풍부함을 구하리오. 명하여 가로되 公은 어릴적에 운이 비색(否塞)하여 어려운 처지였으니 그 고초를 슬퍼하지 않겠는가? 성소(省掃)를 平生토록 하루같이 하시고 先考를 사모(思慕)하시니 이 같은 孝가 어디에 또 있겠는가? 己卯士禍때 小人輩들이 世上을 어지럽혀 忠良들이 다 없어지니 나라도 공허(空虛)하였다. 病든 世相을 통탄(痛嘆)함이 극에 이르니 世上에 뜻이 없다 하시고 山水좋은 鄕里에서 詩를 읊으시며 義理를 좇아 行하심이 뛰어나셨다. 이러한 事實들을 돌에 새겼으니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西紀1939年 己卯 4月13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