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덕랑공(휘 기)묘표

통덕랑공 휘 기 묘소
소재지: 광주시 광산구 광산동 산 72번지


광주시광산구광산동산칠십이번지내(光州市光山區光山洞山72番地內)에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사척숭봉(四尺崇封)은 통덕랑 심공(通德郞 沈公)의 만년유택(萬年幽宅)이다. 公의 諱는 기(璣)요 姓은 沈氏니 靑松人이라 시조(始祖)는 고려문림랑위위사승(高麗文林郞衛尉寺丞)이신 휘홍부(諱洪孚)로 기일세(起1世)한 뒤 동국대성(東國大姓)이 되었다. 2世 휘연(諱淵)은 합문지후(閤門祗侯)요 3世 전리정랑 휘용(典理正郞 諱龍)은 子 정안공(定安公)의 貴로써 추봉문하시중청화부원군(追封門下侍中靑華府院君)하였으니 公의 5代祖이다. 高祖는 허강선생(虛江先生) 휘덕부(諱德符)이니 여말(麗末)에 충훈양절익찬공신(忠勳亮節翊贊功臣)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문하시중(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을 배수(拜授)함에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으로써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가 되어 태조이성계(太祖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에 추종(追從)한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봉청성백(封靑城伯)하고 특진보국숭녹대부의정부좌정승(特進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政丞)하였으니 諡는 정안공(定安公)이다. 유칠자(有7子)하니 도총제 인봉(都摠制 仁鳳)과 판서 의구(判書 義龜)와 둔재 계년(遁齋 繼年)과 인수부윤 징(仁壽府尹 澄)과 안효공 온(安孝公 溫)과 청원군 종(靑原君 淙)과 동지총제 정(同知摠制 泟)인데 第3子 휘계년(諱繼年)은 高麗때 지성주사(知成州事)로 입조선(入朝鮮)하야 누징부취(累徵不就)하거늘 태조왕(太祖王)이 특명(特命)으로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제수(除授)하니 羅州에 도착(到着)한 날 즉시인부(卽時印符)를 던지고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진원산중(珍原山中)으로 은둔(隱遁)하여 둔재(遁齋)라 자호(自號)하며 결의부사(決意不仕)하고 병집대의(秉執大義)하였으니 公의 증조(曾祖)요 祖는 애암 휘연(愛菴 諱涓)이니 효행(孝行)에 탁이(卓異)하여 입부충효(入不忠孝)면 근어금수(近於禽獸)라 하고 정성무궐(定省無闕)하더니 年17에 太祖가 승하(昇遐)하심에 등산통곡(登山痛哭)하여 경일부지(竟日不止)하면서 쇄누암석(灑淚岩石)하니 화위혈암(化爲血岩)함에 따라 기석(其石)을 심혈암(沈血岩)이라 하다. 太宗이 제사헌부감찰(除司憲府監察)하니 위부칭덕(位不稱德)하고 수부칭인(壽不稱仁)하였다. 이상삼세(以上三世)가 구향양계사(俱享良溪祠)하다. 考는 휘종하(諱宗夏)니 통정대부좌승지(通政大夫左承旨)이다. 비위(妣位)의 姓氏는 실전(失傳)되었고 公의 표덕(表德)과 生卒年까지 구실전(俱失傳)되고 지록통덕랑(只錄通德郞) 뿐이나 사적(事蹟)이 부소(不少)할터인데 누경병선(累經兵燹)으로 因해 배위성씨(配位姓氏)와 생몰년(生歿年)까지 구실전(俱失傳)되었으니 애석(哀惜)하도다. 正5品인 통덕랑오위사직(通德郞五衛司直)을 지냈으니 청아(淸雅)한 관이(官吏)로써 先代의 덕행(德行)에 累를 끼치지 않고 후대(后代)에 귀감(龜鑑)이 되는 봉직(奉職)으로 성실(誠實)한 생애(生涯)를 누렸으리라 사료(思料)된다. 有2男3女하니 男長 희양(希良)은 장사랑(將仕郞)이요 次男 희공(希恭)은 통덕랑(通德郞)이며 女는 적조호(適趙瑚)와 박회(朴茴)와 서웅(徐熊)하였고 손참봉혼(孫參奉渾)과 영정랭(泳汀冷)은 장방출(長房出)이요 장사랑담(將仕郞潭)과 말수(末壽)는 차방출(次房出)이다. 噫라 公의 행적(行蹟)과 경력(經歷)이 민몰(泯沒)되어 下世한지 半千年이 넘도록 상궐현각(尙闕顯刻)함을 죄송(罪悚)히 여기고 종의(宗議)로써 묘비(墓碑)를 세우려고 后孫 정섭(貞燮)이 방여청(訪余請)하기에 以不文으로 고사부획(固辭不獲)하고 보첩(譜牒)에서 뽑아 선후계(先后系)를 적어 묘도(墓道)를 表하다.

西紀2001年 辛巳 閏4月 初吉
月城 李相鏞 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