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과공(휘 태산)유사

부사과공 휘 태산 묘소
소재지: 청송군 청송면 거대동 장등

묘비석


농천재
소재지: 경북 청송군 청송읍 거대리


府君諱太山字子高號弄泉姓沈氏曾祖諱元符典理判書祖諱天潤令同正考諱孝尙號石村以上世系見先稿府君以永樂十一年癸巳二月三日生于山陰之石畓村自在孩提性聰穎甫入學不煩敎訓而文藝夙就及成人動止端嚴言辭周愼潛心爲學不治擧子業年十八以門蔭官副司果辛亥丁先公憂哀毁踰禮癸丑移居于安東才山翌年甲寅始還居于靑松月明村其爲先世桑梓之鄕而又近於叔父參判公所居也村前有一小泉淸寒可愛泉上有石臺平鋪如胡床日吟弄於其間自號弄泉佔畢齋金先生宗直見訪因與登讚慶樓賦詩唔懷而不幸見佚於火雅好山水每遇佳辰令節則輒與同志遊歷於周房靑鶴之濱追感先祖杖屨之蠋而以暢幽鬱今考其遺詩可見矣嘗語人曰爲士者知好山林之趣然後可以超脫俗套矣惜乎志業未遂卒于乙卯五月十一日享年纔二十三臨終語不及他事而惟以先業之荒墜爲憂焉葬于府治內巨大谷長嶝卯坐原配安東權氏處士軫女有婦德壬辰六月三日生後公十七年庚午十月十二日卒墓쯊有二子皆幼長遜年六歲次洪三歲是年七月遭鬱攸之災文籍盡入於灰燼只有古紙數幅而斷爛欲盡豈可謂萬一於當日也耶(己上見家乘)嗚呼府君聰明之質精銳之才若使天假之年宜成遠大之志而脫屣名韁自放於山水之間遵奉先訓務自韜晦而不幸早世家門因以零替文獻從以無徵只作幾百年寂寥語豈非孱孫痛恨之深也謹依行蹟之著枉家乘者錄之如右庶得發輝之語而쯂傳於世則是吾不肖之幸也

後孫 德泳 謹書


7세조 부사과공 휘 태산(太山) 유사
府君의 휘는 太山이요 자는 자고(子高)이며 호는 농천(弄泉)이고 성은 沈氏이다. 증조의 휘는 원부(元符)니 전리판서(典理判書)요 할아버지의 휘는 천윤(天潤)이니 영동정(令同正)이며 아버지의 휘는 효상(孝尙)으로 호가 석촌(石村)이니 이상의 세계(世系)는 선고(先稿:먼저 쓴 초안)에 나와 있다. 부군은 영락(永樂) 11년 계사 2월3일에 산음(山陰)의 석답촌(石畓村)에서 낳았고 어렸을 적부터 성품이 총명하고 영리하여 겨우 배울 때에 번거롭게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문예(文藝)가 일찍 성취되었더니 成人이 되자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엄숙하며 말씨가 두루 신중하고 학문하는데 마음을 잠기고 과거공부를 하지 않았으며 나이 열여덟에 가문의 음덕으로 벼슬하여 부사과(副司果)가 되었고 신해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계축년에 안동재산(安東才山)에 이사하여 살다가 이듬해 갑인년에 처음으로 청송의 월명촌(月明村)에 돌아와서 산 것은 그 선대의 여러 산소가 있는 고향이고 또 숙부 참판공의 사는 곳이 가깝기 때문이었다. 마을 앞에 작은 샘물이 맑고 시원하여 사랑스럽고 샘 위에 석대(石臺)가 의자와 같이 판판하여 날마다 그 사이에서 시(詩)를 읊으며 자호(自號)를 농천(弄泉)이라 하였고 점필재(컒畢齋) 김선생 종직(宗直)이 찾아오면 같이 찬경루(讚慶樓)에 올라가 시를 지었으나 글이 불행히 불에 타 없어졌다. 항상 山水를 좋아하여 좋은 날 경사스러운 날에는 문득 동지와 더불어 주방청학(周房靑鶴)의 물가에서 놀며 先祖가 머물었던 자취를 생각하여 마음에 느끼고 마음이 답답하고 개운치 않음을 풀었으니 지금 그 남은 시를 상고하면 알 수 있도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비는 산림(山林)의 취미를 좋아할 줄 안 연후에야 세속(世俗)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였다. 아깝도다 뜻한 바 일을 이루지 못하고 을묘년 5월11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겨우 23이었다. 임종에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직 조상의 일이 황폐된 것으로써 근심하였고 부내(府內) 거대곡장등(巨大谷長嶝) 묘좌원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안동권씨 처사(處士) 진(軫)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고 임진년 6월3일에 낳아 공보다 17년 뒤인 경오년 10월12일 돌아가시니 묘는 합부(合쯊)하였다. 두 아들이 모두 어리니 장남 손(遜)은 나이 여섯 살이요 2남 홍(洪)은 세 살이다. 이해 7월에 화재(火災)를 당하여 문서와 서적이 모두 타서 없어지고 다만 옛 종이 두어 폭(幅)만 남아 있으나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없어지려 하니 어찌 당일의 만의 하나라도 말할 수 있으리오(이상은 가승에서 본 것임) 아아 부군의 총명한 바탕과 정예(精銳)한 재주로 만약 하늘이 명을 더 주었더라면 마땅히 멀고 큰 뜻을 이루었을 것이요 명예를 헌 신짝처럼 버리고 자유롭게 산수의 사이에서 놀며 조상의 가르침을 준수(遵守)하고 스스로 재지(才智) 학문 등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데 힘썼을 것인데 불행히 일찍 돌아가셔 가문이 인하여 쇠퇴(衰退)하고 문헌이 따라서 증험(證驗)할 수 없게 되어 다만 몇 백년동안 쓸쓸한 말이 되었으니 어찌 미약한 자손의 깊은 한이 아니리오 삼가 행적(行蹟)의 가승(家乘)에 남아 있는 것을 위와 같이 기록하고 빛을 발하는 말을 얻어 아울러 세상에 전하게 되면 이것이 나 불초(不肖)의 다행이 될 것이로다.

후손 덕영이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