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천군(휘 효연)향단비명

 

효연 향단비


古今有治亂之不齊天地有否泰之往來人能於治亂否泰有先鑑之明睿而其進退行藏隨時合乎道則非哲人君子而何故靑松沈公諱孝號晩愚永樂庚子生于京南門外靑坡洞官至折衝君封靑川位登忠勳府堂上一朝遂掛冠浩然歸于梓鄕構一亭而考槃自娛永矢不諼卽今靑松府西德川里也弘治庚戌終壽七十一葬于求之谷丑坐之原謹按世德則以高麗文林郞靑己君諱洪孚爲鼻祖公之五世祖也高祖諱淵閤門祗侯晩年出宰山陰退居石畓村築臺望京有遺墟碑曾祖諱龍典理正郞門下侍中靑華府院君卽 昭憲王后之曾祖也祖諱元符號岳隱典理判書麗亡入杜門洞享于杜門洞書院及長城景賢杜考諱天潤令同正守先訓不就徵辟我 太宗褒旌忠孝配貞夫人慶州崔氏漢弼女祔公墓一子孟合勵節校尉校尉有一男一女男曰守文通政女適全泰貞至于玄孫曰漹曰湖曰汀湖泗川縣監以忠孝世其家汀壬辰之亂倡義戰沒于彈琴臺后裔漸蕃其麗數百蔚然爲一鄕之聞族玆豈非積累先蔭之攸曁歟旣有如彼父祖之炳炳忠義又有如公之急流勇退信乎靈芝有根醴泉有源而千載之下孰莫不景仰其高風也哉雖然在朝趨班之時必有補袞煥猷之奇蹟解官歸老之日又必有暢懷言志之述作而歲月彌久滄桑屢變寥寥焉杞宋無徵則是所爲公最惜者也且墳墓化爲村落之町場無傳亭榭亦不免於興廢往來之中則彼尋常行路莫不咨嗟歎惜而况爲公之後裔者哉蓋累仁積德之家世必洧孝子慈孫出而不使永沒其蹟者及天報之常理而舊己建亭於甘蓮村而扁以晩愚今乃設壇於疑塚之傍而不廢歲祀於是乎公之精靈毅魄欣欣然宛若陟降於此也公之十四世孫能釜十五世孫宜榮俱以望七衰老不遠千里而委訪要余以不朽之若非過人絶特之誠孝焉能至此余碌碌庸夫非不知妄僭亦不敢孤其篤志謹按實錄如右略述而今勒碑之庚子偶與公嶽降之歲相符眞不偶之偶而斯豈非公令聞廣譽從此大振之驗歟繼而銘曰
君子見機不俟終日掛冠脫屣行高志潔松栢猶存泉石可悅迺迺父祖繼箕繼裘大冬寒松疾風勁草塚失亭圮興廢有數剝陽不盡詎無來復後孫克肖壇高亭翼璇風攸揚祥雲玲瓏樹此戹石于祖有光

歲庚子寅月下澣
竹山后人 安東周 謹撰


6세조 청천군 휘 효연 향단비명
예나 지금이나 치란(治亂:치세(治世)와 난세(亂世)가 가지런하지 못함이 있고 천지에 비태(否泰:막힌 운수와 터진 운수)가 있으니 사람은 치란과 비태에 먼저 거울삼는 밝은 지혜가 있으나 그 세상에 나가서 道를 행하는 일과 숨는 일이 때에 따라 도에 맞는 것인즉 철인(哲人) 군자가 아니면 어떻게 능하겠는가 청송심공의 휘는 효연(孝)이요 호는 만우(晩愚)이며 영락(永樂) 경자년 1420년에 서울 남문(南門)밖 청파동(靑坡洞)에서 낳았고 벼슬이 절충(折衝)에 이르고 청천(靑川)에 封君되었으며 충훈부(忠勳府)의 堂上에 올랐더니 하루아침에 드디어 관(冠)을 벗어놓고 고향으로 돌아와 한 정자를 지어 은둔처(隱遁處)를 마련하고 유유자적(悠悠自適:속세를 떠나 아무것에도 속박되지 아니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편히 삶)하고 영원히 속세에 나가지 않기로 맹세하였으니 즉 지금의 청송부 서쪽 德川里요 弘治 庚戌年 1490년에 돌아가니 壽가 71이요 구지곡(求之谷) 축좌원(丑坐原)에 장사지냈다. 世德을 살펴보면 고려 문림랑 靑己君 휘 洪孚가 시조요 공의 五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연(淵)이니 합문지후요 만년(晩年)에 山陰의 守令으로 나갔다가 석답촌(石畓村)으로 물러나 살며 대(臺)를 쌓고 서울을 바라 보았으니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증조의 휘는 용(龍)이니 전리정랑(典理正郞) 문하시중이며 청화부원군이며 소헌왕후의 증조요 할아버지의 휘는 원부(元符)이니 호가 악은(岳隱)이요 전리판서로서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두문동서원과 長城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으며 아버지의 휘는 천윤(天潤)이니 令同正이요 조상의 가르침을 지켜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니 태종대왕이 정려(旌閭)를 내리고 충효를 표창하였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경주최씨 한필(漢弼)의 따님이니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孟合으로 여절교위(勵節校尉)요 교위가 1남1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守文으로 通政이요 딸은 전태정(全泰貞)에게 출가하였고 玄孫에 이르러 언(헜), 호(湖), 정(汀)이 있었으니 호는 사천(泗川) 현감으로 대대로 충효를 전하였고 정은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하여 탄금대(彈琴臺)에서 戰死하였으며 후손들이 점점 번창하여 그 數가 수백명이나 되어 울연(蔚然)히 一鄕의 이름난 족벌(族閥)이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조상의 음덕이 아니리오 이미 저와 같이 父祖의 빛나는 忠義가 있고 또 공과 같이 속세에서 용퇴(勇退)함이 있었으니 영지(靈芝)에 뿌리가 있고 예천(醴泉)에 근원이 있다는 것이 진실이거늘 천년후에라도 누군들 그 높은 풍도(風度)를 우러러보지 아니하리오 비록 그러하나 조정의 반열(班列)에 나갔을 때에 반드시 宰相감으로서 임금의 잘못을 보충하는 기적(奇蹟)이 있었을 것이며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는 날에 또 반드시 회포를 펴고 뜻을 말하여 지은 것이 있었을 것이나 세월이 오래되고 세상이 여러 번 변하여 쓸쓸하게 없어지고 기(杞) 나라와 송(宋) 나라를 징험(徵驗)하지 못하는 것처럼 되었으니 이것이 공에게 가장 哀惜한 바요 또한 墳墓가 村落의 밭두둑이 되어 전해지지 않았으며 亭子 또한 往來하는 중에 없어져서 저기 보통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도 슬퍼하고 애석하게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거든 하물며 공의 후손이 된 사람이리오 대개 仁德을 거듭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孝子慈孫이 나와 그 자취가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하늘이 보답하는 떳떳한 이치이다. 옛적에 이미 정자를 감련촌(甘蓮村)에 짓고 만우(晩愚)로써 편액(扁額)하고 무덤이 있었을 것 같은 곳 근방에 設壇하고 歲祀를 폐하지 아니하니 이에 공의 정령의백(精靈毅魄)이 기뻐하시며 여기에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할 것이로다. 공의 14세손 능부(能釜)와 15세손 의영(宜榮)이 망칠(望七)의 늙은 나이에 천리를 멀다 않고 나를 찾아와서 비문을 지어달라고 하니 만약 다른 사람보다 나은 특별한 효성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에 이르렀으리오 나같이 평범한 사람보다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비문을 짓는다는 것이 망년되고 참람(朁濫)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감히 그 도타운 뜻을 외롭게 할 수 없어 삼가 實錄을 살펴보고 위와 같이 대략 짓고 금년 경자년에 비석에 새기게 되니 경자년은 우연히 공이 낳으신 해와 서로 부합되어 진실로 우연치 않은 것이 우연이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공의 아름다운 명성과 널리 퍼진 명예가 이로부터 크게 떨칠 징조가 아니리오 이어서 명(銘)을 지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군자가 기미를 보고 이해화복(利害禍福)을 사전에 알아 챘으니 終日을 기다리지 아니하였도다. 冠을 나무 가지에 걸고 속세를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숨었으니 행실이 높고 뜻이 깨끗하였도다. 松栢같은 굳은 절개요 泉石같이 맑은 행실이었도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전해주신 유업(遺業)을 능히 이어받았도다. 한겨울 추위에 견디는 소나무요 질풍(疾風)에도 꺾기지 않는 강한 풀이로다. 무덤을 잃고 정자가 무너짐은 흥폐(興廢)의 운수가 있음이로다. 天運이 다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다시 오지 않으리오 어진 후손이 단을 쌓았고 정자를 지었도다. 아름다운 풍속이 드날리는 바요 상서로운 구름이 빛나도다. 이 비석을 세우니 영원무궁하리로다.

경자(1960)년 정월 하순에
죽산후인(竹山后人) 안병주(安秉周)가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