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정공(휘 천윤)

석촌공 효상 제단비
경북 청송군파천면 덕천리

영동정공 천윤 제단비
경북청송군 파천면 덕천리


6세 효연 제단비
소재지:경북 청송군파천면 덕천리


 소재지: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


6세 지군사공 휘 자연 묘소
소재지: 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 대각동

묘 비

令同正公諱天潤祭壇碑銘(영동정공휘천윤제단비명)
昔麗氏之運訖也殉身盡節者閉關自靖者項背相望其跡殊而其義一也若典理判書岳隱沈先生乃其時死節臣也胤子令同正公痛念君親不膺新朝召命而竄身以沒世焉當是時禍變罔極擧家流離兩世巾舄之藏俱失所在其後雲仍甚繁衍常以是痕恨連世搜廣而不遇深目迺全宗合謀就先鄕之堯山下而爲兩世設壇竪碑寓羹墻之慕奉苾芬之享寔出於孝思之無窮也後孫相縉持所述遺事來余請銘之窃惟玆事甚重非不侫可堪而以不侫爲當日同義家遠孫責以事契義不敢終辭謹按公諱天潤靑己君諱洪孚閤門祗侯淵門下侍中靑華府院君諱龍寔祖以上三世考諱元符卽岳隱先生先妣夫人及配位姓氏幷失傳有三子長孝尙號石村次孝叅判勳封靑川君號晩愚次自知郡號聾隱孝尙一子太山孝 一子孟合勵節校尉自二子禹卿致山以下不錄今距公之世已五百餘載文籍蕩迭公表德及生卒年月從宦履歷無由得其詳而惟家乘數條有可證響者公遵先公命退隱耕讀于先庄而每當先公入山之日西望瞻拜痛泣不已益堅不二之操嘗與吉冶隱元耘谷有師友之契耘谷以書勸出仕曰我則前朝賤俘今年已老餘日不多不可出世門下卽少壯人也抱奇偉之才不必深藏而不市出事明主以慰時望云公答書畧曰不幸今猥蒙徵辟之命冒死哀乞僅獲容賜而知天潤如足下者乃不矜憐而反欲使重禍耶耘谷亦不能强焉先是冶隱之歸田里也公作詩二章而送之曰
「嚶嚶黃鳥裊裊垂柳之子南歸祖彼道右復會何時言執子手有酒有酒爵以大斗洋洋漢水遠遠烏山之子南歸于彼閒閒日旣晩矣謂行多艱不有之子誰叩我關」
卽此書與詩公志節之高邁已無可言而文章之雅正亦可以窺見其一班矣及公晩年太宗以公不忘前朝特奬忠孝俾表門閭云於乎以公才德之媺若少屈而出而需世而攀龍附翼則其功名事業誰之不如而罔臣罔僕矣死不渝者誠以天地之正氣未嘗亡也春秋之大義不可背也只可安吾心守吾志而已其淸風峻節何遽在杜門諸賢之下哉猗歟偉哉 銘曰
維忠維孝 是父是子 痛深家國 天胡此禍 新朝屢徵 冒死不仕 以自靖獻 惟盡在我
兩世壇壝 桑鄕舊社 洋洋陟降 于焉報祀 淸風如昨 廉頑立懦

丙辰流火節  興海 裵東煥 謹撰


영동정공휘천윤제단비명(번역문)
옛날에 고려(高麗)의 국운이 다하였을 때 몸을 바쳐 절의를 지킨 자와 문을 닫고 손님을 맞지 않으며, 벼슬 않고 분수만 지키며 산자가 남들이 하는 일을 참작하여 진퇴(進退)를 하였으니 그 발자취는 다르나 그 의의는 한가지이다.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악은공(岳隱公) 沈先生은 그 때 사절(死節)한 신하이다. 아드님 영동정공(令同正公:諱는 天潤)은 아버지께서 새 나라의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은 것을 비통하게 생각하여 몸을 숨기고 살며 세상을 마치셨다.
이 때를 당하여 화변(禍變)이 망극하여 온집안이 사방으로 허트러졌기 때문에 양세(兩世)의 묘소는 함께 소재지를 실전하였다. 그 후에 자손이 번창해짐에 항상 이일로 한을 품고 대를 이어 널리 찾아 보았으나 묘소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에 전 종중이 합의하여 옛고향의 산밑에 양세를 위해 설단하고 비석을 세워 추모하여 제향을 받드는 곳으로 삼고 향화(香火)를 받들게 되었으니 이는 효성이 무궁한 데서 나온 것이다.
후손인 상진(相縉)씨가 저술한 유사(遺事)를 가지고 내게 와서 비명(碑銘)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생각해 보건대 이는 심중한 일이어서 못난 사람으로서 감내할 것이 아니로되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천윤(天潤)이니 청기군(靑己君:諱는 洪孚) 합문지후공(閤門祗侯公:諱는 淵) 문하시중(門下侍中)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諱는 龍)은 할아버지 이상 3世이며 아버지의 휘는 원부(元符)이니 즉 악은(岳隱) 선생이시다. 어머니와 배위의 성씨는 모두 실전하였다.
영동정공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효상(孝尙)이니 호가 석촌(石村)이고 차남은 효연이니 참판(叅判)으로 청천군(靑川君)에 봉군되고 호는 만우(晩愚)이며 삼남은 자연(自)이니 지군사(知郡事:현재의 군수)이고 호는 농은(聾隱)이다. 효상(孝尙)의 장남은 태산(太山)이고 효연의 장남은 맹합(孟合)이니 여절교위(勵節校尉)이며 자연은 두 아들을두니 우경(禹卿)과 치산(致山)이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공의 생존시까지 오백여 년이 되며 문적(文籍)이 멸실되어 공의 표덕(表德)과 생졸년월일 그리고 벼슬한 이력 상세한 것을 얻어 볼 수 없으며 다만 가승(家乘)의 몇 군데에 증거할만한 것이 있을 뿐이다.
공께서는 악은 선생의 교훈을 준수하여 선영(先塋) 마을에 숨어 살며 주경야독(晝耕夜讀)하였다. 매양 선공(先公)께서 입산(入山)할 날을 당하면 서(西)쪽을 향해 망배하고 통곡을 그치지 않았으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더욱 굳건히 하였다.
일찍이 야은(冶隱:諱는 吉再)과 운곡(耘谷:諱는 元天錫)과 더불어 사우(師友)의 결의를 맺었다. 운곡께서 서신을 보내어 출사(出仕)토록 권하였다.
『나는 고려조의 한백성으로 지금은 나이가 늙어 여생이 많지 않아 출세할 수 없으나 자네는 아직 젊은이이고 훌륭한 재주를 품고 있으니 반드시 깊이 숨어 있을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아가 밝고 총명한 임금을 섬겨 시대적인 바램에 따르라.』
여기에 공께서 담서(答書)하기를
『지난날 불행을 당했을 때 겨우 용서를 받아 황공함을 금치 못하고 있는 본인의 처지를 잘 알고 계시는 귀하께서 어찌 거듭된 화(禍)를 당하게 하려고 하십니까?』
하고 회신하니 운곡께서 더 강요하지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야은(冶隱)이 시골(善山땅 金烏山)에 귀향할 적에 시(詩) 두장을 지었는데 「꾀꼴 꾀꾈 꾀꼬리 울고 간들간들 능수버들 늘어지는데 그대 남쪽(고향)으로 돌아가니 길가에서 전송하도다. 언제 또다시 만나려나 자네 손잡고 말나누며 술이 많이 있으니 큰잔으로 나누어 보세. 한강수는 양양 흐르고 금오산 가는 길은 멀고 먼데 그대 남쪽으로 돌아가니 저곳은 한가롭겠지. 날이 벌써 저물었으니 가는 길 고생이 많겠네. 그대가 옆에 있지 않으면 그 누가 내집 문을 두드리리.」 즉 이 글과 시는 공의 지조가 고매함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장이 우아함도 또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공께서 만년에 이르렀을 때 태종대왕(太宗大王)께서 공이 고려조를 잊지 않고 충효(忠孝)의 정신을 장려했다 하여 정려문(旌閭門)을 세우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아! 공의 아름다운 재덕(才德)으로 만약 조금만 몸을 굽혀 세상에 나아가 왕(王)을 도왔다면 그 명성과 업적이 누구도 따르지 못했을 것인데 신하 노릇을 아니하므로서 변절하지 아니한 것은 실로 천지(天地)의 정기(正氣)가 일찍이 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가히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 마음을 편안히 하고 자기 의지를 지켰을 뿐이다. 그 맑은 기풍과 높은 절개가 어찌 두문동(杜門洞)에 입산(入山)한 제현(諸賢)의 하위(下位)에 처하랴.
아! 훌륭하시도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오직 충성하고 오직 효도하니 이런 아버지에 이런 아들이로다.
나라를 이처럼 걱정했는데 하늘이 어찌 이런 화를 내렸나요.
새 임금이 자주 불렀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나가지 않았으며
자정(自靖)할 것을 아뢰고 자기에게 있는 분수만을 다하였도다.
양세의 제향단을 고향 옛터에 설치하니
영혼이 양양히 오르내리어 보은하기 위해 제향을 받들도다.
청풍(淸風)이 어제 같으니 강자는 겸손하고 약자는 뜻을 세우리라.
병진년(1976年) 유화절(陰 6月15日)

흥해 배동환이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