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효공 배위 안부인 이장기문

夫人墓初在龍仁與公異塋 世宗朝永膺大君累年有奇疾 世宗請醫於 皇朝帝爲遣太醫診治無效太醫素曉卜莁地理卜謂山崇非可以藥治見 健元陵與獻陵皆大讚請見外家沈墳又以公塋爲吉至府夫人墳曰乃此山之害 世宗爲請移窆太醫到京圻安城東嘉味村得壬坐之原 上命自官移葬夫人之塋
此說未知出於何處而安孝公宗孫家藏中有之故玆載之以待更考
夫人給牒在於 世宗朝夫人生時公之復官在於 文宗朝故夫人之墓獨以一品命婦禮葬之公之墓則今仍始葬之禮而不追改云
謹按安孝公行跡中景泰元年條中有兩位並葬之言則當初與公合窆明矣後遷安城之由雖不可知而 上所云太醫之說似未可信也
兩位並葬未必合窆雖異岡相望亦或謂之並葬耶以此言之亦可知初葬山義後遷安城爾
禍事始末 一夲作行跡

5세조 안효공배위 안부인 이장기문
부인의 묘가 처음에는 용인에 안효공(安孝公)과 다른 무덤에 있었더니 세종조에 영응대군이 여러 해 동안 이상한 병이 있어 세종이 중국의 황제에게 청하여 태의(太醫)를 보내와 치료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는데 태의가 원래 지리(地理)를 보는데 밝아 이것은 산화(山禍)임으로 약으로 고칠 병이 아니라 하고 태조의 건원능(健元陵)과 태종의 헌능(獻陵)을 보고는 모두 길지(吉地)라 하고 외가 심씨의 무덤을 보았고 또 공의 무덤을 보고서도 좋다고 하더니 부부인의 묘를 보고서는 이 산이 좋지가 않다 하니 세종이 이장할 것을 청하여 태의가 경기도 안성의 동쪽 가미촌(嘉未村) 임좌원이 좋다고 하니 임금이 명령하여 부인의 묘를 이장하였다.
〈이 말은 어디에서 나온지 모르나 안효공 종손의 가장중에 있었으므로 여기에 실어놓고 다시 상고할 때를 기다린다〉
부인에게 직첩을 준 것은 세종조에 부인의 생시였고 공이 복관(復官)된 것은 문종조 였으므로 부인의 묘만 일품(一品)인 외명부(外命婦) 직으로 예장(禮葬)하였고 공의 묘는 처음 장사지내는 예로 하고 뒤에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삼가 안효공의 행적을 살피건대 경태원년(景泰元年) 조중(條中)에 양위(兩位)를 병장(쯂葬)하였다는 말이 있으니 당초에 공과 합폄한 것이 분명하다. 뒤에 안성으로 이장한 이유는 비록 알 수 없으나 위에 말한 태의의 말을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것 같다. 양위를 병장한 것은 반드시 합폄이 아니로되 비록 다른 산이라도 서로 바라보고 있다면 또한 병장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이것으로써 말한다면 처음에는 산의(山義)에 장사지냈다가 안성으로 이장한 것을 또한 알 수 있다.